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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남을 위대한 여성 127

19세기 천재소녀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5/5)

19세기 천재소녀 피아니스트, (5/5) 브람스와의 관계 현재도 요하네스 브람스(독 ; Johannes Brahms、1833년-1897년=독일 작고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와 클라라의 불륜설이 끊이지 않으나 그 뒷받침은 전혀 없다. 사실로 존재하는 것은 브람스와 클라라는 생애를 통하여 친교가 깊은 친구였다는 것뿐이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죽은 후 이듬해에 뒤를 쫓듯이 병몰했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기차를 탔는데, 잘못하여 완행차를 탔기 때문에 멀리 돌아서 가는 바람에 장례식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본에 있는 남편 로베르트 슈만의 묘에 매장 직전에 겨우 닿아서 닫힌 관을 열고 잠간 보기만 했다 한다. 일본어원문=クララ・シューマン - 生涯 - わかりやすく解説 Weblio辞書 출처=http..

19세기 천재소녀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4/5)

19세기 천재소녀 피아니스트, (4/5) 자녀들과 제자 로베르트 슈만과는 8명의 자녀를 두었다. 1840년대에는 임신 중인데도 유럽을 돌며 연주회를 열고 있고 대단한 힘든 일정이었다는 것이 일기에 남겨있다. 단지 자녀는 많았지만 장남 에비르는 1세에 사망하고 막내 페릭스는 로베르트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기 때문에 부친의 얼굴을 모른다.(페릭스에게는 시의 재능이 있고 브람스의 Op.63-5 등 3곡의 시에 곡을 붙이고 있다.) 3남 페르티난도는 로베르트의 정신장애가 부분적으로 유전 된 것이 원인이 되어서 자살했다. 로베르트는 자식으로 고민이 많았으나 그녀 자신은 는 말을 남기고 있다. 로베르트 사후 클라라는 정신병 이미지가 붙어서 돌던 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분주하여 극히 만년의 작품이나 편지는 거의 폐..

19세기 천재소녀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3/5)

19세기 천재소녀 피아니스트, (3/5) 작곡가로서의 재능 어릴 때부터 작곡가로서의 재능도 발휘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성이 자곡가가 되는 것은 세상이 인정하지 않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런 때문에 37세 무렵에 작곡을 그만 두고 피아니스트와 피아노 교사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작품을 들은 리스트는 고 절찬한 편지를 파리의 음악지 『류뷰 에 뮤지칼』과 『신음악시보』에 투고하여 클라의 가곡 3곡을 피아노독주곡으로 편곡했다. 로베르트는 젊어서부터 협작(協作)을 행했다. 자신들이 만든 주제를 주고받아서 결과로서 로베르트는 , 에 클라라의 주제를 넣고 있다. 또 로베르트의 만년에는 공동으로 후가연구에 힘쓰고 각각 후가를 남기고 있다.(클라라의 작품은 베르트로부터 주어진 ..

19세기 천재소녀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2/5)

19세기 천재소녀 피아니스트, (2/5) 음악가로서의 발자취 클라라의 부친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는 클라라가 어릴 때 아내(가수)와 이혼했다. 아내의 수입에 의존했던 프리드리히는 아이들에게 눈을 돌려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클라라에게만 교육을 시키고 다른 자식들은 그대로 두었다 한다. 그는 클라라를 를 만들려 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그녀가 일기에 적는 내용까지 지시하였다고 한다. 클라라가 12살 때에 유럽을 연주하고 돌아다닐 정도가 되어서 청중은 물론 많은 음악애호가의 저명인사나 황제, 음악가 등에게서 절찬을 받았다. 1838년에 당시 오스트리아황제 페르디난도1세는 18세의 그 라 부르고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영예로운 의 칭호(외국인 여성의 입장에서는 전례가 없는)를 주었다...

19세기 천재소녀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1/5)

19세기 천재소녀 피아니스트, (1/5) 개요 클라라 요세피네 슈만(Clara Josephine Wieck-Schumann, 1819년 9월 13일 - 1896년 5월 20일)은 독일의 피아니스트, 작곡가이다, 피아노 교사 프리드리히 위크(Friedrich Wieck)의 차녀이다. 19세기에 활동한 피아니스트이고 작고가 로베르또 슈만의 처라고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프로 데뷔는 1828년 9살 때 라이프치히 게반토하우스관현악단의 연주회에서 모찰트 피아노 협주곡의 소리스트(soliste/독주자)를 하던 클라라는 당시의 라이프치히 삭샌왕국뿐 아니라 현재의 독일 전역에 천재소녀라고 알려지게 되어 이후 19세기에서 가장 이름 높은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현대에서도 유럽 공통통화 유로에 통합되기 전의 최후의 100..

수학의 파이오니어 여성수학자 <소피 제르맹>(4/4)

수학의 파이오니어 여성수학자 (4/4) 받아들여지다. 제르맹은 과학자의 커뮤니티 (community)에서 받아들여져서 이 특권을 가진 최초의 여성이며 프랑스연구소의 회의에 참가할 수가 있었다. 죽음과 평가 제르맹은 1831년 6월 27일 유방암으로 사망하기까지 혼자 활동하고 대응하였다.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게팅겐대학(Georg-August-Universität Göttingen)에서 제르맹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취득하게 하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었는데 상을 받기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파리의 학교 과 은 오늘날 파리에서 제르맹을 기리는 장소가 되었다. 특정의 소수(素數)는 라 불린다. (출처=https://wonderfulmind.co.kr/sophie-germain-a-biography-of-a-prod..

수학의 파이오니어 여성수학자 <소피 제르맹>(3/4)

수학의 파이오니어 여성수학자 (3/4) 수학자 이렇게 하여 제르맹은 많은 수학자에 대응하여 이 순번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이들 수학자 중에 2명이 두드러졌다. 은 여성이고 아무튼 통신을 계속하고 있던 조셉 루이 라구랑쥬(불어 ; Joseph-Louis Lagrange、1736년 1월 25일 - 1813년 4월10일=독일 수학자, 천문학자)와 독일의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라틴어 ; Carolus Fridericus Gauss、1777년 4월 30일 - 1855년 2월 23일=독일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는 결국 제르맹과 3년간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있었다. 1808년 이전에는 주로 수론에 힘을 썼다. 그 후 제르맹은 크라드니(에른스트. 프로렌스. 프리드리히. 크라드니/Ernst Florens F..

수학의 파이오니어 여성수학자 <소피 제르맹>(2/4)

수학의 파이오니어 여성수학자 (2/4) 수학의 발견 제르맹은 아르키메데스의 전기인 『시라큐스의 아르키메데스 이야기 (Archimedes of Syracuse )』 이야기를 읽었다. 그는 죽을 때는 기하학을 읽고 있었다고 했다. 기하학을 발견한 제르맹은 수학, 라틴어, 그리스어를 독학하여 고전적인 수학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녀의 양친은 그녀의 연구에 반대하여 그것을 막기 위하여 밤에 공부할 때 양초를 없애고 야간에 불을 켜지 못하게 하였다. 그녀는 양초를 밀수하고 침구로 몸을 감쌌다. 그리하여 밤에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대학의 연구 프랑스의 18세기에는 여성은 통상 대학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에콜 포리테크닉(불어 ; École polytechnique、수학에 관한 흥미진진한 연구가..

수학의 파이오니어 여성수학자 <소피 제르맹>(1/4)

수학의 파이오니어 여성수학자 (1/4) 개요 소피 제르맹(Sophie Germaine,1776년 4월 1일-1831년 6월 27일)은 가족의 만류나 선례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조기에 수학자가 되려고 마음먹었다. 프랑스아카데미는 진동에 의하여 생성된 패턴에 관한 논문을 받아들여 상을 수여했다. 이 작품은 오늘날 초고층빌딩의 건설에 사용되는 응용수학의 기초이고 수학물리학의 새로운 분야 특히 음향과 탄성의 연구에 당시는 중요했다. 결혼하여 회원이 되지 않고 아카데미 데 사이언스(불어 ; Académie des sciences)의 회의에 출석하지 않은 최초의 여성이고 프랑스의 학회의 집회에 초대된 첫 여성이다. 당시 고 하는 가치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수학을 연구하여 여성으로서 최초로 파리 왕립..

고백시의 개척자 <실비아 플래스>(5/5)

고백시의 개척자 (5/5) 5, 사후 실비아 플래스의 사후, 그녀의 글을 모아 출판하는 일은 테드 휴스에게 맡겨졌다. 이때 충격 받은 자식들을 위해서 아이언 자이언트라는 동화를 집필했는데 당연히 대중에게 '네가 자살하게 만들었으면서 뭔 위선이냐'고 엄청나게 까였다. 자식들조차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고 사후 아버지를 원망하는 인터뷰를 했을 정도다. 테드 휴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담긴 실비아 플래스가 결혼생활 마지막 몇 달 동안 쓴 일기를 없앴다. 시집 《아리엘(Ariel)》를 편집하면서, 순서를 밝고 경쾌한 내용의 시로 시작하여 점차 우울하고 어두운 내용의 시로 가도록 고의적으로 배열해 비판을 받았다. 실비아 플래스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누이 올윈 휴스(Olwyn Hughes)가 이 과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