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천재소녀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2/5)
음악가로서의 발자취
클라라의 부친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는 클라라가 어릴 때 아내(가수)와 이혼했다.
아내의 수입에 의존했던 프리드리히는 아이들에게 눈을 돌려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클라라에게만 교육을 시키고 다른 자식들은 그대로 두었다 한다.
그는 클라라를 <제2의 모찰트>를 만들려 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그녀가 일기에 적는 내용까지 지시하였다고 한다.
클라라가 12살 때에 유럽을 연주하고 돌아다닐 정도가 되어서 청중은 물론 많은 음악애호가의 저명인사나 황제, 음악가 등에게서 절찬을 받았다.
1838년에 당시 오스트리아황제 페르디난도1세는 18세의 그 <천재소녀>라 부르고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영예로운 <왕실실내연주자>의 칭호(외국인 여성의 입장에서는 전례가 없는)를 주었다.
그리고 많은 신동(청년 멘델스존 등)들을 자택으로 초청하여 연주시켰다.
시인 괴테도 <재능 있는 예술가 클라라 비크를 위하여>라는 명문을 새긴 메달을 보냈다.
클라라의 연주를 들은 쇼팽은 <나의 연습곡 집을 칠 수 있는 유일한 독일 여성>이라고 절찬하고 그 연주를 쇼팽이 들은 리스트는 라이프니치의 출판업자 프리드리히 호프마이스타의 편지 중에서 <힘세고 지성적으로 정확하게> 치는 이 젊은 여성의 연주를 이제 금방이라도 듣고 싶다. 그런 피아니스트가 있다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매우 드문 현상>이라고 적고 있다.
그녀는 부친 뷔크에게서 연주가로서의 책임은 작곡가의 정신과 의도에 가능한 한 가까운 연주를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으므로 연주할 곡을 트릴(trill)이나 극단의 템포( tempo) 등으로 좋을 대로 장식하는 리스트(Franze Liszt, 1811〜1886年, 크라식 낭만파의 피아니스트, 작곡가)의 연주에는 부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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