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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전기/제갈공명 이야기 23

제18화  제갈공명전설(諸葛孔明傳説)

제18화 제갈공명전설(諸葛孔明傳説) 공명의 역사상 본질은 의 평 부분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정치의 본질을 숙지하고 있는 좋은 인재이고 관중(管仲)(춘추시대의 명재상)이나 소하(蕭何)(전한의 명재상) 같은 명재상과 같은 반열에 놓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매년 군세를 움직이면서도 잘 성공하지 못한 것은 임기응변의 기략이 그에게는 능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일까.>(제갈량전) 공명은 초일류의 관리본부장이었고 대단히 공부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군사에 대해서도 꽤 숙달해 있었다고 생각된다. 단지 승부에 대한 감각이라든지 기책을 쓰는 법 등은 서툴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인류의 영원한 이상을 체현시킨 정치가라 할 수 있다. * 제갈공명 평가의 변천상 편찬(서기 200년대) 후 1000여년..

제17화 오장원에서 별은 떨어지다(2)

제17화 오장원에서 별은 떨어지다(2) 3、위연(魏延)의 최후 사마의(司馬懿)의 추격을 따돌리고 산간으로 도망친 촉한(蜀漢) 군은 두 길로 나누어 성도(成都)를 목표로 하였다. 두 길로 나눈 것은 양의(楊儀)와 위연(魏延)이 적대관계로 들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상대를 이라 욕하면서 각각 파발을 황제 유선에게로 날려서 상대를 조정의 적이라고 했다. 성도(成都)에서는 유선(劉禪)이 매일 고 서로 모순되는 파발의 보고를 받아서 혼란스러웠다. 유선은 군신(群臣)을 모아 하고 상담하였다. 다수의 견해는 그런 유선의 주변에는 문관만이 있었다. 문관들은 당연히 평민 출신인 위연보다 문관 사대부인 양의(陽儀)를 지지하였다. 이 문관들의 발언이 황제 유선에게 크게 영향을 끼쳐 위연에게 모반자의 낙인이 찍히게..

제17화 오장원에서 별은 떨어지다(1)

제17화 오장원에서 별은 떨어지다(1) 1, 공명의 죽음 공명과 사마의(司馬懿)는 서로 진지 안에 농성하여 서로 노려보기만 하였다. 원래 사마의는 방어하는 편이니까 그가 농성하는 것은 옳다. 그런데 공명은 공격했는가 하면 그는 전혀 그런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에게 보리씨앗을 뿌리게 하고 그 후는 방비에 철저했다. 확실히 공명의 태도는 불가해였다. 요컨대 공명은 이다. 그는 종종 황제 유선에게 상주하고 있다. 스스로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공명은 사마의(司馬懿)를 도발하여 그를 공격하는 편에 서도록 획책한다. 그는 방어전이라면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촉한(蜀漢) 군에게는 궁극의 방어무기인 이 대량으로 장비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사마의(司馬懿)는 제4차 북벌에서 징계를 받았으므로 ..

제16화 제5차 북벌

제16화 제5차 북벌 1. 제5차 북벌 제5차 북벌은 공명(孔明)의 최후의 싸움이다. 제4차 북벌로부터 귀환한 그는 촉한(蜀漢)의 국력이 쇠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튼 인구 90만의 가난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5만 규모의 군세를 4년이나 연속하여 출정시킨 때문에 경제력이 처참할 정도로 약해졌던 것이다. 이에 공명은 3년 간 전쟁을 멈추고 내정의 강화에 힘썼다. 또 동맹국인 오나라와의 연락을 밀접하게 하였다. 그는 다음번에는 오나라의 국력을 합해서 를 기획했다. 공명은 침식을 잊고 일하였다. 그 노력은 황제 유선(劉禪)이나 측근들에게 하고 말할 정도였다. 지휘자가 힘써 노력하면 부하는 그 이상 분발하는 것이다. 촉한(蜀漢)의 군대가 강해진 것은 그 때문이라 생각된다. 운명의 서기 234년 봄 공명은 1..

제15화 가정인으로서의 공명(孔明)

제15화 가정인으로서의 공명(孔明) 1, 제갈공명의 아내 그는 20대 전반에 결혼하였다. 상대는 형주(荊州)의 명사 황승원(黄承元)의 딸이다. 이 사람은 얼굴이 못생기기로 유명한 추녀로서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처녀였다. 당시에 라는 유행가가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어째서 공명 같은 미남이 그런 얼굴이 못생긴 여자와 결혼했는가 하면 아마도 정치였을 것이다. 공명은 이기는 하였으나 이향(異鄕) 출신인데다가 중에서는 이단자였기 때문에 좋은 벼슬자리를 얻기가 어려웠다. 그는 명사인 황승원과 연척관계를 이룸으로써 자신의 진로를 개척하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단 이 아내는 매우 총명한 여성으로 여러 가지로 이 있었고 두 부부의 사이도 매우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출세한 공명은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는 인간은 ..

제14화 제4차 북벌(2)

제14화 제4차 북벌(2) 2, 발명가로서의 공명(孔明) (1) 목우(木牛)와 유마(流馬) 제4차 북벌에서 등장한 것이 이다. 제4차 북벌 때 쓰인 것이 목우(木牛)이고 제5차 북벌 때 쓰인 것이 유마(流馬)이다. 유마는 목우의 발전 개량한 것일 것이다. 에서는 전혀 설명이 없으므로 진수(陳壽)가 편찬한 『제갈량집(諸葛亮集)』이라는 문집에 설계도 같은 것이 있는데 라는 설명이 있으므로 진실한 학자는 상대하지 않는다. 아무리 공명이 취미를 가진다 해도 수송용 기구에 눈이나 귀를 붙일 만큼 바보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최고의 군사기밀이므로 공명은 군(軍) 밖으로 참 정보를 누설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동시로서는 획기적인 발명이었을 가능성이 ..

제14화 제4차 북벌(1)

제14화 제4차 북벌(1) 1, 제4차 북벌 은 촉한(蜀漢)의 이라 할 수 있는 싸움이다. 이때 공명(孔明)은 가장 강했다. 전장에서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자랑하는 사마의(司馬懿)의 위나라 군대를 연전연패시킨 후 적의 명장 장합(張郃)을 쳤으니까. 그러나 결국 보급이 끊기어 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강해졌느냐 하면 를 철저히 행하고 과거의 실패를 깊이 반성하고 근본적인 개선책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공명은 각별한 성장을 이룩한 것이었다. 그는 의 패인을 라고 바르게 인식했다. 그래서 몇 가지 개선책을 세웠다. ① 수송용 기기(목우/木牛)를 개발하여 후방으로의 보급을 원활히 하였다. ② 수확기에 적지에 침공하게 되므로 식량의 현지조달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런 시책은 크게 성공하여 위나라..

제13화 제3차 북벌과 외교전(2) 

제13화 제3차 북벌과 외교전(2) 2, 오(吳), 촉(蜀)의 외교전 외교란 일종의 이다. 자기 나라를 위하여 상대를 끌어들여 이익을 이끌어 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맹국끼리의 외교는 가장 어렵다. 왜냐하면 표면적으로는 우호관계를 지탱하면서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면에서 고도의 교섭 기술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촉오동맹(蜀呉同盟)에 있어서 교섭의 주체가 되는 것은 거의 촉한(蜀漢) 측이다. 왜냐하면 소국인 촉한 쪽이 보다 많이 오나라의 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총명한 공명은 촉한(蜀漢) 단독으로는 위나라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위나라에 두 개의 정면작전을 강요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손권(孫權)의 황제즉위마저 용인..

제13화 제3차 북벌과 외교전(1) 

제13화 제3차 북벌과 외교전(1) 1, 제3차 북벌과 위나라의 맹반격 제3차 북벌은 공명의 명예 만회를 위한 싸움이었다. 공명이 노린 것은 한중(漢中) 서방에 인접하는 무도군(武都郡)과 음평군(陰平郡)이다. 이것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위나라의 옹주(雍州)에 속해 있는데 주민의 90%가 이민족이라고 하는 정치적으로 중요성이 매우 낮은 지역이다. 당연히 수비병도 거의 없다. 공명은 이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고 국민에게 어필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공명은 고생을 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듯 장군 진식(陳式)(『정사(正史)』의 작자 진수(陳壽)의 아버지!)의 군세만을 이 2군(郡)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위나라의 옹주(雍州) 장관 곽회(郭淮)는 대군을 이끌고 북방에서 참여하여 영격(迎擊) 체제에..

제12화 제2차 북벌(2)

제12화 제2차 북벌(2) 2, 제2차 북벌 공명이 제2차 북벌을 발하는 결의를 한 배경에는 강남 전장에서 오나라의 우세함이 있었다. 손권(孫權)은 주방(周魴)이라는 부하에게 라고 하는 거짓 편지를 써서 위나라의 방면군사령 조휴(曺休)를 영내로 유인하여 이를 포위 섬멸한 것이다. 목숨을 간신히 건진 조휴(曹休)는 이 패전을 부끄럽게 여겨 병사하였다. 이 동맹군의 승리는 공명에게 크게 용기를 붙여주었다. 어쩌면 위나라는 오나라의 국경을 굳게 하기 위하여 섬서성(陝西省)의 병력을 빼어서 허술하게 할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시 원정에 나설 기분이 났다고 한다. 이번의 공명은 저번의 실패를 반성하여 전투서열을 대폭 개선하였다. 쓸 데 없는 파벌 인사나 엘리트 지향을 멈추고 입신출세하는 위연(魏延)과 왕평(王平)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