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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제5차 북벌

간천(澗泉) naganchun 2020. 7. 14. 11:02

제16화 제5차 북벌

 

1. 제5차 북벌 

 

5차 북벌은 공명(孔明)의 최후의 싸움이다. 4차 북벌로부터 귀환한 그는 촉한(蜀漢)의 국력이 쇠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튼 인구 90만의 가난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5만 규모의 군세를 4년이나 연속하여 출정시킨 때문에 경제력이 처참할 정도로 약해졌던 것이다.

이에 공명은 3년 간 전쟁을 멈추고 내정의 강화에 힘썼다. 또 동맹국인 오나라와의 연락을 밀접하게 하였다. 그는 다음번에는 오나라의 국력을 합해서 <중국 남부군에 의한 대공세>를 기획했다.

공명은 침식을 잊고 일하였다. 그 노력은 황제 유선(劉禪)이나 측근들에게 <승상은 언제 잠을 자는지 일밖에 다른 즐거움이 있는 것일까?>하고 말할 정도였다. 지휘자가 힘써 노력하면 부하는 그 이상 분발하는 것이다. 촉한(蜀漢)의 군대가 강해진 것은 그 때문이라 생각된다.

운명의 서기 234년 봄 공명은 10만의 군세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이 군세는 거의 뿌리 채 뽑아 동원한 셈이다. 공명은 이 일전에 모두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오나라의 손권(孫權)도 그에 호응하여 대공세를 취한다. 그는 날로 벌어지는 위나라와 국력의 차에 머리를 앓고 있었으므로 역시 이 일전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의 군세는 총 10만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하는 위나라는 동서의 두 전선에 30만 전후의 대군을 준비하였다. 이미 위나라와 오나라의 국력의 차는 결정적일 만큼 벌어져 있었다.

공명의 군세는 촉한(蜀漢)의 잔도를 억지로 건너서 사곡도(斜谷道)에서 섬서성(陝西省)에 나온다. 전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기산(祁山)을 버리고 전군이 동진을 시작하였다.

이것을 본 위나라 장군 사마의(司馬懿)는 크게 초조해졌다. 공명이 전멸을 각오한 특공 작전으로 장안(長安)으로 쳐들어간다면 위나라의 손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명의 군세는 도중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공군(武功郡)에 주걱 같은 모양의 광대한 대지를 발견하고 전군을 여기에 주둔시킨 것이다. 이 대지가 바로 <오장원(五丈原)>이다.

사마의(司馬懿)는 크게 기뻐하였다. <역시 공명은 안전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이군.>

대지에 들어간 공명은 병사들에게 명하여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는 이런 모양으로 보급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공명의 군대는 규율 바르게 행동하였으므로 그 지방의 주민들은 안심하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도왔다. 그러나 공명은 <결전>을 위하여 온 것이지 대지 안에 들어 박혀 농사를 시작하다니 어쩐 셈인가?

사마의(司馬懿)30만은 오장원(五丈原) 전면에 포진하여 공명군 10만을 완전히 묶어 놓았다.

공명은 대지를 진지화(陣地化)하여 요격하려 하였다. 그는 제4차 북벌 때 대승리의 재현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사마의(司馬懿)는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공격하려고 하지 않고 지구전으로 상대하려는 것이었다.

공명의 유일한 희망은 강남(江南) 전선에서 오나라가 대승을 거두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마의(司馬懿)도 수도의 위기를 구하기 위하여 퇴각할 것이다. 그러면 추격하리라 하고 마음속으로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나라는 패배하고 말았다.

() 나라 군대는 합비(合肥), 강하(江夏), 강릉(江陵)의 삼 방면으로 북진시켰다.

합비(合肥)의 요새는 위나라군대의 맹공을 완강히 버티었다. 그리고 강하(江夏) 방면에서는 오나라 군대는 위나라 군대의 기습공격을 받아서 대참패하였다.

유일하게 쾌히 진격을 계속한 것은 강릉(江陵)의 육손(陸遜)이다. 유비(劉備)를 이릉(吏陵)에서 괴멸시킨 실력은 모양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방면이 열세였기 때문에 그의 군대는 적중에 고립당하는 형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서둘지 않고 군대를 북진시키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위나라 군대를 동요시켜 보기 좋게 전군을 퇴각시켰다.

오나라가 총공격에 실패한 최대의 원인은 위나라 황제 조예(曹叡)가 몸소 친위대를 이끌고 구원에 달려든 것이었다. 황제가 몸소 출진하였기 때문에 위나라 전군의 사기는 높아지고 공격은 강해졌다.

오장원(五丈原)의 공명은 크게 낙담했다. 그는 오나라의 공격이 성공할 것을 믿고 이 대지에 농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앞에는 3배의 병력을 가진 사마의(司馬懿)가 있어서 완강히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공명의 전략은 대실패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