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제4차 북벌(1)
1, 제4차 북벌
<제4차 북벌>은 촉한(蜀漢)의 <최후의 광망(光芒)> 이라 할 수 있는 싸움이다.
이때 공명(孔明)은 가장 강했다. 전장에서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자랑하는 사마의(司馬懿)의 위나라 군대를 연전연패시킨 후 적의 명장 장합(張郃)을 쳤으니까. 그러나 결국 보급이 끊기어 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강해졌느냐 하면 <신상필벌>를 철저히 행하고 과거의 실패를 깊이 반성하고 근본적인 개선책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공명은 각별한 성장을 이룩한 것이었다.
그는 <제2차 북벌>의 패인을 <보급의 문제>라고 바르게 인식했다. 그래서 몇 가지 개선책을 세웠다.
① 수송용 기기(목우/木牛)를 개발하여 후방으로의 보급을 원활히 하였다.
② 수확기에 적지에 침공하게 되므로 식량의 현지조달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런 시책은 크게 성공하여 위나라 군대는 최초는 지구전을 꾀하여 촉군이 철퇴하기를 기다렸으나 보급사정을 개선한 적(촉한/蜀漢)은 도저히 철퇴하려 하지 않으므로 격투 대결을 감행하여 단련된 촉한(蜀漢)의 정예와 명장 위연(魏延)과 왕평(王平) 앞에 대패하였다.
그 개요를 시기 별로 보기로 한다.
서기 231년 공명의 군세(추정 5만)는 사곡도(斜谷道)에서 섬서성(陝西省)으로 나갔다. 어째서 이 길을 택했는가 하면 진창도(陳倉道)는 진창선(陳倉城)이 굳게 방어되어서 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제2차북벌 참조) 그렇다고 해서 가장 장안(長安)에 가까운 자오도(子午道)는 좁은 데다 적이 경계가 엄중해서 통과하기는 무리라 생각하였다. 곧 소거법(消去法)으로 가장 서쪽에 치우친 사곡도(斜谷道)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지방은 과소지대이므로 출구에 진창성(陳倉城) 같은 큰 성은 없었다. 단지 기산(祁山)이라는 산이 있었다. 그래서 공명의 출구를 예측한 위나라 군대는 이 산에 진을 치고 공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산상(山上)의 진에서는 공명의 대군을 구속할 수 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장안으로부터의 원군을 기다리기 위한 발이 묶긴 부대였다. 그 원군을 이끄는 자는 와병 중인 조진(曺眞)을 대신하는 사마의(司馬懿)이다. 그 군세는 10만이 되었을 것이다.
공명은 사마의가 도착하기 전에 이 지역의 보리밭의 보리를 몽땅 베어내어 보급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서방 이민족(異民族)과 연락을 취하여 공동전선을 치려고 했다. 실로 좋은 작전이었다.
이 전략에 보기 좋게 활약한 장군은 위연(魏延)이었다. 그는 이민족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전해임 서기230년에 1만의 군세를 이끌고 섬서성(陝西省)을 서쪽으로 돌파하였다. 이것을 안 위나라는 곽회(郭淮)와 비요(費曜) 두 장군을 방해하기 위하여 보냈다. 위연(魏延)은 남북으로 협공 당하는 것을 무릅쓰고 서두르지 않고 이 적군을 연전연패시켰다. 단지 공명은 위연이 고립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에게 복귀 명령을 내렸으므로 이민족과의 공동 투쟁은 중간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이민족을 끌어들이는 작전은 후에 주효해서 제4차 북벌 때는 공명(孔明)에 호응하여 위나라의 영내에 침입한 선비족(鮮卑族)은 사마의(司馬懿)의 배후를 계속하여 위협하였다.
그런데 사마의(司馬懿)는 실전경험이 없었던 때문인지 오랫동안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는 기산(祁山)을 포위하는 공명군의 북측에 진을 치고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최초에는 <공명은 전번처럼 곧 보급이 끊길 것이다. 지구전으로 좋다.>하고 낙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장(諸將)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사마의(司馬懿) 님은 공명을 호랑이처럼 무서워하고 있다. 이쪽이 군사의 수는 위이니까 한꺼번에 해치울 일이다.>
장합(張郃) 장군 같은 입신출세한 베테랑 들이 입을 모아 말하니까 사마의(司馬懿)도 마음이 동하였다. 그래서 대결의 막이 오른 것이다.>
명장 장합(張郃)은 남으로 돌아서 왕평(王平)의 진을 공격하였다. 가정(街亭) 이래의 인연의 대결이다. 그러나 그때와 달라서 마속(馬謖) 같은 자는 없었다. 왕평(王平)은 견딜 수 있는 한 힘을 짜내어 싸웠다. 장합(張郃)은 공격하는 데 게을러 열세가 되었다.
그 사이 사마의는 주력을 이끌어 공명의 본진을 총공격하였다. 공명은 위연(魏延)과 오의(呉懿)를 선봉으로 하여 과감히 요격하였다.
촉군 대승리!
위나라 군대는 갑수(甲首) 3000, 갑옷(鎧) 5000, 31000장의 노(弩)(대형 화살 발사기)를 잃고 괴멸 상태가 되어 본진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사마의(司馬懿)는 진 안에 숨어서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손해를 입었음에도 위나라의 전선은 붕괴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국력을 가진 위나라로서는 이 정도의 손해는 대단한 일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공명은 아쉬웠다. 그는 한꺼번에 패주하는 사마의를 추격하여 장안(長安)까지 점령할 작정이었으니까. 그러는 사이에 보급이 끊기었다. 공명은 하는 수 없이 전군을 묶어 귀로에 올랐다.
이것을 본 사마의(司馬懿)는 추격전을 명하였다. 전술적으로 연전연패한 그는 위나라 조정에 대하여 면목이 없음을 두려워하였다. 장합(張郃)은 <공명은 퇴각전(退却戰)에 유능하니까 무리하지 않은 것이 좋다.> 하고 반대했으나 사령관은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장합(張郃)이 선봉이 되어 추격전을 감행하였다.
예상한 대로 공명은 궁대(弓隊)를 뒤에 잠복시켰다. 목문도(木門道)라는 좁은 길에 닿은 위나라 군대는 빗발 같은 화살을 맞고 장합(張郃) 장군도 전사하고 말았다.
촉군(蜀軍)은 연전연승하였다. 그런데 촉군은 보급사정이 악화되어 부득이 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급이 정체된 이유는 촉나라의 잔교(棧橋)가 오랜 비로 붕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중(漢中)에서 보급을 담당하고 있던 무장 이암(李巖)은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이 싫어서 성도(成都)의 황제에게 <공명은 이유도 없이 마음대로 퇴각하였다.>고 거짓말 보고를 보냈던 것이다.
성도(成都)에 돌아온 공명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는 이암(李巖)에게서 <보급을 이 이상 보내지 못하므로 돌아오라.>라는 편지를 받았기 때문에 철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황제 유선(劉禪) 앞에서 누가 바른지 재판을 행했다. 그 결과 공명이 이겼다. 공명은 이암(李巖)한테서 받은 편지를 전부 보관하고 있었다. 게다가 날짜순으로 완벽하게 파일을 만들고 있었다. 이것으로 이암(李巖)이 아무리 능란하게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이길 수는 없었다. 공명은 뼈까지 관료타입이었던 것이다.
이암(李巖)은 촉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호족(大豪族)이었다. 그래서 공명은 그에게 보급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이암(李巖)은 어쩌면 공명만이 각광을 받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원래 착실하고 의리가 굳은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사건으로 이암은 평민으로 격하되었다. 그리고 그는 공명이 죽음을 알고서는 절망으로 병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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