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창신 溫故創新 ongochangsin

인물 전기/제갈공명 이야기

제17화 오장원에서 별은 떨어지다(1)

간천(澗泉) naganchun 2020. 7. 19. 10:43

제17화 오장원에서 별은 떨어지다(1)

 

1, 공명의 죽음

 

공명과 사마의(司馬懿)는 서로 진지 안에 농성하여 서로 노려보기만 하였다. 원래 사마의는 방어하는 편이니까 그가 농성하는 것은 옳다. 그런데 공명은 공격했는가 하면 그는 전혀 그런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에게 보리씨앗을 뿌리게 하고 그 후는 방비에 철저했다.

확실히 공명의 태도는 불가해였다.

요컨대 공명은 <공격편에 들기가 싫어서>이다. 그는 종종 황제 유선에게 상주하고 있다. <저는 용기가 없어서 결정적인 장면에서 겁쟁이가 되기 때문에 언제나 북벌에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공명은 사마의(司馬懿)를 도발하여 그를 공격하는 편에 서도록 획책한다. 그는 방어전이라면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촉한(蜀漢) 군에게는 궁극의 방어무기인 <원융(元戎)>이 대량으로 장비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사마의(司馬懿)는 제4차 북벌에서 징계를 받았으므로 두 번 다시 공격 측에 몸을 두고 싶지 않았다. 초군의 도발을 무시하여 가만히 농성만 하였다.

속이 타는 공명은 여자의 옷을 사마의의 본진에 보냈다고 한다. <진지에서 농성만 하는 너는 여자 닮아서 근성이 없다.>는 식의 도발이다. 이에는 유막에 모이는 위나라의 제장들도 격노하여 <출진합시다,> 하고 떠들썩했다.

사마의도 화가 났겠지만 그는 이대로 방어하는 쪽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여 제장들을 달랬다. 그런데 모두가 분노해서 자아를 잊어버릴 정도이다.

궁한 사마의(司馬懿)는 낙양의 황제 조예(曹叡)에게 편지를 내어 출진 허락을 받으려 한다. 물론 총명한 황제 조예가 각하할 것을 기대한 일이었다. 그리고 조예는 사마의(司馬懿)의 진의를 깨닫고 <절대 출진해서는 안 된다.> 하고 칙서와 함께 중신 신곤(辛昆)을 대신 피견하였다. 신곤 노인은 사마의 군의 군문 앞에서 막대를 잡고 막아서서 제장들의 폭주를 멈추게 하였다.

이것을 안 공명은 <모두 끝났다.>고 절망하였다. 그리고 일에 시달린 그 육체는 마침내 파탄 경계를 맞으려 하고 있었다.

한때 공명의 군사(軍使)가 도전장을 가지고 사마의의 본진을 방문하였다. 사마의는 싸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공명의 일상생활에 대해서 군사에게 물었다. 군사는 이렇게 답하였다.

<우리 승상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심야에 겨우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매질 20회 이상의 벌은 모두 스스로 집행합니다. 드시는 식사는 하루 두 홉도 되지 않습니다.>

이 군사(軍使)는 존경하는 공명의 위대함을 제장들에게 어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마의는 군사(軍使)가 돌아간 후에 웃었다. <허허 공명은 곧 죽겠구나!> 군사가 한 말이 과장되었다 해도 공명은 과로로 죽기 직전까지 일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가을바람이 부는 음력 8월 공명은 병으로 쓰러졌다. 향년 54세였다.

 

2, 죽은 공명(孔明)이 살아있는 중달(仲達)을 달리게 한다.

 

공명은 이렇게 전장에서 쓰러졌다.

그는 유언에 <내가 죽거든 전군이 퇴각하라.> 하고 남겼다. 당연한 말이다. 촉한(蜀漢) 군이 강함은 병사들의 공명에 대한 존경과 신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 공명이 죽었다고 하면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지고 벌써 전쟁을 할 수 있는 형편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촉한(蜀漢) 군은 공명의 죽음을 병사들에게 숨기고 바로 오장원(五丈原)에서 철퇴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에 반대하는 인물이 있었다. 위연(魏延)이었다. 그는 <공명이 죽은 것 정도로 어째서 퇴각한단 말인가? 전장에 남아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무리하지만 생각해 볼 여지가 있었다.

왜냐 하면 이것은 촉한(蜀漢)으로서는 <뿌리 채 뽑은 동원>으로 최후의 결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전도 벌이지 않고 퇴각한다는 것은 국민에 대해서도 황제 유비(劉備)의 혼령에 대해서도 죄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명의 시신을 모신 관() 가까이는 위연의 정적인 양의(楊儀)가 있었다. 이것은 그로서는 정적을 누르는 데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문관인 비위(費禕)와 무관인 강유(姜維)을 짜고 위연의 부대를 전장에 두고 그 이외의 부대를 묶어서 은밀 리에 퇴각을 개시한 것이다. 전장에 남겨진 위연은 서둘러서 부대를 묶어 뒤를 쫓았다.

그런데 사마의(司馬懿)는 촉한(蜀漢) 군이 2단계로 나누어 퇴각하는 데 놀라 전쟁의 정석에 따라 전군으로 추격을 개시하였다. 그는 적의 주력이라고 생각되는 양의(陽儀)의 부대의 뒤를 쫓았다. 보통 군대는 퇴각 시에는 약해진다. 대열이 흐트러지고 병사의 사기도 떨어지는데 촉한(蜀漢) 군의 퇴각은 그렇지 않았다. 촉한(蜀漢) 군은 지형과 고성능의 날아다니는 도구를 교묘히 이용하여 추격자를 두드리는 명수였다. 사마의(司馬懿)는 제4차 북벌 때 자신의 한 팔과 믿어 의지하던 장합(張郃)을 잃는 쓴 경험을 하였다. 그런 때문에 그는 촉한(蜀漢) 군의 역습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신중하게 진군시켰다.

그런데 사마의가 추격해오는 것을 눈치 챈 강유(姜維)와 양의(楊儀)는 군영의 큰북을 울리고 군대를 반전시키며 환성을 질렀다.

이것을 본 사마의는 기가 약해져서 전군에 철퇴를 명하였다.

이리하여 촉한(蜀漢) 군은 무사히 산간으로 도피하여 공명의 죽음을 발표하고 조상(弔喪)의 차례로 들었다.

가까운 지방 주민들은 이 상황을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달리게 한다.> 고 퍼뜨렸다.

측근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사마의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고 한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라면 읽을 수 있지만 죽은 인간의 생각 따위는 알지 못한다.>

그 사마의는 오장원(五丈原)의 촉한(蜀漢) 군진지 자리를 시찰하고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아 공명(孔明)은 천하의 기재(奇才)이다....>

촉한(蜀漢)은 참으로 아까운 인재를 잃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