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오장원에서 별은 떨어지다(2)
3、위연(魏延)의 최후
사마의(司馬懿)의 추격을 따돌리고 산간으로 도망친 촉한(蜀漢) 군은 두 길로 나누어 성도(成都)를 목표로 하였다.
두 길로 나눈 것은 양의(楊儀)와 위연(魏延)이 적대관계로 들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상대를 <모반인>이라 욕하면서 각각 파발을 황제 유선에게로 날려서 상대를 조정의 적이라고 했다.
성도(成都)에서는 유선(劉禪)이 매일 <위연이 모반을 일으켰다.> <양의가 모반을 일으켰다.>고 서로 모순되는 파발의 보고를 받아서 혼란스러웠다. 유선은 군신(群臣)을 모아 <어느 쪽의 주장이 바른가?> 하고 상담하였다. 다수의 견해는 <위연이 모반했다는 것이 바르겠지요.>
그런 유선의 주변에는 문관만이 있었다. 문관들은 당연히 평민 출신인 위연보다 문관 사대부인 양의(陽儀)를 지지하였다. 이 문관들의 발언이 황제 유선에게 크게 영향을 끼쳐 위연에게 모반자의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다른 잔도(桟道)로 한중(漢中)으로 향하는 양의(楊儀)와 위연(魏延)은 서로 척후대를 내어 상대의 진로를 방해하면서 나갔다. 거기에 조정에서의 파발이 도착하여 전군에 <위연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통달하였다.
원래 공명의 관을 지키는 양의(陽儀) 쪽이 군세도 많고 마음을 주는 장군도 많았다. 그런데다가 칙사의 도착은 상황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초조한 위연(魏延)은 양의(陽儀)에게 결전을 통고하고 공명의 관을 뺏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 앞을 막아 선 것은 왕평(王平)이었다. 왕평이 큰 소리로 위연군에게 투항하라고 소리를 지르자 위연군의 사기는 붕괴하고 탈주병이 속출하였다.
<정사>에 따르면 위연은 인덕자(仁德者)였기 때문에 병사들은 아버지처럼 위하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황제 유선에게로 충성심이 모아진 것이다.
위연은 십여 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성도(成都)를 목표로 나갔다.
그런데 양의(陽儀)는 마대(馬岱)의 부대를 파견하여 집요하게 위연을 추적하여 위연 일족을 모두 살해하였다. 일세의 명장 위연은 이렇게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진수(陳壽)는 <정사>의 <위연전>에서 <위연은 모반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하여 당시 <위연의 죽음은 모반의 결과이다.>라는 통설을 뒤집고 있다.
4, 양의(陽儀)의 자멸
양의(陽儀)는 형주(荊州)의 사대부 출신으로 잔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유비(劉備)에게 벼슬하였는데 그를 발탁한 것은 공명이었다. 공명은 <형주 출신 사대부>가 좋아서 거기서 인재를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버릇이 있었다.
양의는 계수(計數) 관리에 독특한 재주가 있어서 병량(兵糧) 관리나 운반 계획 입안이나 예산편성 같은 일에 장기가 있었다. 그래서 공명과는 매우 좋은 관계였다.
황제 유선의 비서로서 일했는데 인간관계의 문제를 많이 일으켜서 만년에는 지방에 좌천되었었다.
양의는 공명의 관리 업무면에서의 보좌역으로서 항상 북벌에 동행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인간관계의 트러블이 있었다. 왜냐하면 양의는 그 인간성에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오만하고 자신과잉 상태이며 곧잘 남을 경멸하는 심술궂은 사람이었다.>
그가 특히나 사이가 나쁜 사람은 위연이었다. 위연은 말하자면 <영업본부장> 같은 사람으로 많은 고객을 모으는 데 혼자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누구나 그를 존경하였다. 그러나 오직 양의(陽儀)만은 달랐다. 오만한 그는 위연을 <평민 출신의 병사놈!>이라 하여 바보 취급을 하였다. 자긍심이 강한 위연은 이 오만한 문관을 매우 싫어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진 결정적인 사건은 군의(軍議)에서 구론을 벌린 일이었다. 이때 격노한 위연은 칼을 빼고 죽이려 하자 양의는 울기도 하였다 한다. 비위(費禕)가 위연(魏延)을 달래어 무마하였으나 만좌에서 치욕을 당한 양의는 위연에 대해서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공명(孔明)은 위연(魏延)의 전투능력과 양의(楊儀)의 관리능력을 높이 평가하였으므로 둘 사이가 이상할 정도로 나쁜 것을 항상 염려하였다.
공명이 죽었을 때 촉한(蜀漢) 군 내부에서는 일시적으로 권력의 공백상태가 생겼다. 곧 항상 공명 곁에 있던 양의가 공명의 권력을 난용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는 위연이 철군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그의 부대를 전지에 그대로 두고 철퇴를 개시하였다.
이에 격노한 위연은 서둘러서 양의를 뒤쫓았다. 그 지방 지리에 밝은 위연은 양의와는 다른 길로 돌아 먼저 가서 서로 역적의 오명을 쓰게 하려고 획책했다. 그러나 양의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양의는 공명의 관을 지켜 성도(成都)로 돌아왔다. 그는 공명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었는데 공명의 유언장에는 장완(張琬)을 후계자로 지명하였었다.
장완(張琬)은 역시 <형주사대부>이었는데 공명이 출정 중에 촉한(蜀漢)의 내정을 장악하고 보기 좋은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당연히 모두가 이에 순응하였다.
그러나 양의는 장완(張琬)이 공명의 후계자가 되는 인사에 불만을 가지고 노이로제에 걸려 황설수설하고 다녔다.
이 모습을 걱정한 황제 유선은 비위(費禕)에게 양의(楊儀)의 집을 방문하게 하였다. 비위는 온후해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받는 사람이라서 양의의 본심을 알아오도록 한 것이었다.
그때 양의는 본심을 털어놓았다.
양의는 <나는 후회하고 있다. 내가 공명의 시체를 지키고 나라에 돌아온 것은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완(張琬)에게 그 자리를 뺏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장원(五丈原)에 있을 때에 원정군을 데리고 사마의(司馬懿)에게 항복해야 했다. 그러면 지금쯤 나는 위나라의 승상이 되었을 터인데--->
이 발언을 들은 비위(費禕)는 안면이 창백해지면서 황제 유선에게 복명했다. 놀란 유선은 양의를 파직하고 평민으로 격하시켰다. 그러나 양의는 이를 거슬러서 격렬한 비방문서를 조정에 내는 것이었다. 이를 참지 못한 유선은 양의를 체포하게 하여 투옥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하고 말았다. 양의는 촉한(蜀漢) 최강의 장군 위연을 참사시키고 자기 스스로 목숨을 버린 인격 파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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