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의 신탁과 살라미스 해전
-고대 그리스의 운명을 바꾼 성스러운 장소-
델피의 신탁
델피(Delphi)는 그리스 중부의 포키스(Phocis)지방에 위치한 파르나소스(Parnassus)산 기슭에 있다. 거기에는 아폴론대신전이 있다. 중후한 38개의 도리스식 원주에 둘러싸인 대신전에는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아 고대 그리스의 중심이라고 하기에 걸맞은 곳이다.
이 대신전은 아크로포리스(Acropolis)에 있는 파르테논(Parthenon) 신전과 동등한 규모를 가지고 파르테논 신전보다 100년 이상 전에 지어졌다. 신전 내부에는 일찍이 포세이돈(Poseidon)의 제단이 있고 겸해서 제우스(Zeus)와 아폴론(Apollon)의 상이 서 있었다.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일부의 신탁사제, 무녀 기타 한정된 사람들뿐이었다.
신전의 서부에 있는 신탁소는 무녀가 신탁을 행하는 곳으로 가장 신비스럽고 숭고한 장소이기도 하였다. 여기는 고대 그리스인이 마치 지구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곳으로 그리스문명의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다.
델피신전유적
이 델피의 신탁은 기원전 10세기 이상 전부터 약 천년에 걸쳐 그리스의 세계를 선도하고 중요한 결정이 행해진 곳이었다.
델피의 신탁의 명성이 절정기였던 무렵 국왕, 정치가, 철학자,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이 그리스 전토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개인적인 질문에서부터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적인 중요한 결정을 행하던 곳이다.
신탁을 행한 장소는 땅속 깊이 판 동굴에 있었다. 속에는 바위가 드러나 있는 부분이 있고 대지가 쪼개진 부분이 보인다.
그 쪼개진 부분 위에는 높이 1미터 정도의 삼각대가 얹어져 있다. 신탁할 때에는 무녀가 그 위에 올라앉아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조금 있다가 무녀가 빙의상태가 되어서 그녀의 입에서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말이 터진다. 신관은 그것을 받아 적어서 질문자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다.
델피의 무녀의 입에서 터지는 신의 알림이 왜 그 정도로 높은 신뢰성을 가졌는지는 전혀 수수께끼이다. 대지가 쪼개진 부분에서 무엇인지 신에 홀리는 영기가 일어난다고 말하지만 추측할 수밖에 없다. 기록에 의하면 신탁 중에 실신해버리거나 발광하는 무녀도 있었다고 한다.
역사가 디오도로스(Diodooros)의 기록서에는 델피의 신탁에 대하여 기록한 부분이 있다. 그에 따르면 그 옛날 파르나수수(Parnassus) 기슭에 산양을 치던 양치기가 어느 날 동물들이 이상한 모습을 보인 것에 놀랐다. 산양들은 미친 듯이 날뛰고 몸을 경련시키거나 하였다.
양치기가 조사한바 과연 거기에는 대지가 쪼개진 부분이 있고 거기서 이상한 기류가 불어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양치기는 몸을 움츠리고 그 쪼개진 부분을 노려보니 그 기류를 흡입하는 순간 기묘한 말이 자연히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달려왔으나 그들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 양치기는 그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예언한 것이다. 이것이 델피의 신탁이 행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델피의 신탁은 기원전 480년에 받은 신탁에 의하여 역사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전토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때에 행해졌다. 그 후 역사를 부정하고 세계사의 흐름도 크게 바꾸어지게 된 운명적인 신탁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초강대국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 전토에 전운이 감돌아 일대 사건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의 반란을 아테네나 그리스 본토가 지원한 것이 이유가 되어서 동쪽의 초강대 국가 페르시아가 그리스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기원전 6세기 바벨탑으로 알려진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아게메네스조 페르시아는 그 때까지의 오리엔트의 역사를 바꾼 초강대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 영토는 이집트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실로 총면적 5백만 평방키로나 되고 지금까지 나타난 세계의 어떤 나라보다도 크고 강력했다.
다리우스(Darius/ BC558~486)대왕 시대가 되어서 영토는 일단 더 확대되고 그 중앙집권제의 오리엔트국가는 사상 최대 무적의 왕자로서 세계에 무서움을 드러내었다. 이 초강대 국가로서 그리스를 정복하는 것쯤은 사소한 일에 불과하였다.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는 6백 척에 이르는 대함대와 완전 장비한 대병단을 보내어 그리스를 침략해 왔다. 대함대는 큐노스우라(Kyunosuura) 반도의 파도가 잔잔한 마라돈(Marathon)만에 입항하자 그 수가 5만 또는 10만이라고 하는 육군의 대병단을 상륙시키고 한편 함대는 그대로 남하하여 반도를 돌고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육지와 바다에서 협공하여 함락시킬 작전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마라돈의 전투에서는 유능하고 판단력이 있는 그리스 장군 마루도니우수(Marudonius BC?~479)에 의하여 대패하였다.
다리우스 대왕은 그리스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BC 486년에 사망하였다. 다음을 이은 아들 구세르구세스(XerXes BC486~465) 대왕은 부왕의 유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BC480년에 그리스를 침공하여 테르모필레(Thermopylae)를 함락하였다.
신탁에 의하여 승리한 살라미스 해전
이미 요새 테르모필레(Thermopylae)를 함락한 페르시아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그리스 연합군은 토의한 결과 아테네 방어를 포기하기로 하고 페르포네소스(Peloponnese)반도의 현관인 코린토(Corinth)지역까지 후퇴하였다. 여기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아테네는 방어선 밖으로 나가게 된다. 실제 페르시아 대군세가 아테네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와서 시민은 패닉상태가 되었다.
기원전 480년 그리스는 이 대 국난에 처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델피 신탁을 하기로 서둘러 사자가 파견되었다.
그와 병행하여 황급히 시민의 소개가 시작되었다. 부녀자는 살라미스도 아에기나(Aegina)지방으로 피난시키고 전력이 될 수 있는 남자는 전원 해군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전력이 없는 노인들은 무자비하게 버렸다.
델피에서 사자가 가지고 온 신탁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제우스는 아테네를 위하여 <나무 벽>을 유일한 함락 당하지 않는 보루로 하고 너희들을 구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라.---”
아테네 사람은 이 불가사의한 신탁에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나무 벽>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사람은 <나무 벽>이란 고래로부터 아크로폴리스(Acropolis)의 둘레를 둘러 친 가시 생울타리를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페르시아군이 쳐들어오면 완고하게 아크로폴리스 안에서 농성하여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집정관이면서 장군인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는 <나무 벽>이란 배를 말하는 것으로 페르시아함대를 해상에서 맞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견은 둘로 나뉘어서 평행선을 달렸으나 차차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이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신탁의 최후의 상스러운 살라미스라는 말이 나온 때문이다. 이리하여 신탁의 말에 끌리듯이 테미스토클레스의 해전안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자신의 주장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신탁의 알림을 이용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는 실로 치밀하고 계산이 높고 어디까지나 정보조작을 잘 하는 성격을 갖추어 가지고 있었다. 원래 구름처럼 떼를 짓기 좋아하는 페르시아 대군에 이기기 위해서는 육전이 아니고 해전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는 델피의 신관, 무녀에게 압력을 가해서 신탁의 내용을 조작한 것이라고도 한다.
실제 테미스토클레스는 반년 전에도 강경하게 해전을 민회에 호소하고 있는데 반대파를 누르지 못하여 각하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통과시키려면 신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인지 아닌지 지금은 추측하는 수밖에 없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날을 위하여 독자적으로 해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움직이기 둔한 대형함을 다수 가지고 있는 페르시아함대를 할 수 있는 한 살라미스(Salamis)도와 그리스본도의 좁은 해역으로 유인하여 쭉 뻗은 곳에서 한꺼번에 격멸해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물자공급 루트가 단절된 육군도 자동적으로 총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페르시아함대를 좁은 살라미스 수로로 유인할 것인가?
여기서 그는 장기인 첩보전술을 행했다. 심복인 노예에게 명하여 적측에 침투해서 그들 편에 붙은 듯이 위장하였다. 그리고 그 노예는 그리스군은 페르시아의 대함대를 두려워하여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다. 지금 살라미스만에 돌입하면 그리스군은 모두 항복할 것이다. 하고 유언비어를 유포시켰다.
살라미스해전도
구세르구세스는 원래는 넓은 수역에서 그리스군과 대결할 생각이었으나 이 거짓 정보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야음을 타서 페르시아함대의 선두가 살라미스만으로 진입하고 그리스함대를 확인했다. 그리스군은 간밤에 페르시아 진영에서 탈주한 테노수(Tenosu)선의 정보에 따라 페르시아함대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이미 요격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작전이 자신이 생각한 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리스 함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리스군의 요격작전은 아테네함대를 선두로 개시된다.
한편 페르시아함대는 함대 군선 척수로 봐서 그리스함대의 배가 넘으므로 그리스함대를 외양의 넓은 곳으로 내몰아서 유리하게 전투를 이끌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먼저 푸슈츠레일라(Pushutsuleila)도에 병사를 상륙시켜서 이 섬을 확보하였다. 만내에서는 페르시아함대의 선두인 페니키아함대가 아티카(Attica)본토와 게오르기오스(Georgios)도 사이를 봉쇄하여 그리스함대를 외양으로 내몰려고 하였다.
이 단계에서도 구세르구세스는 승리의 확신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 육지의 전망이 좋은 자리에 왕좌를 설치하고 페르시아군이 압도적 승리로 끝 날 것으로 믿고 대해전을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스함대를 쫓는 페르시아함대는 후퇴하는 그리스함대를 추격하기에 열중한 나머지 봉쇄 예정지를 넘어 좁은 곳으로 깊이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스함대는 후퇴하는 듯이 페르시아함대의 태반을 살라미스 수로로 유인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페르시아함대는 횡대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해협이 좁기 때문에 횡대로 전개할 수가 없고 이웃 선박끼리 부닥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스함대는 공격 나팔이 울리자 대열을 갖추어 싸웠다. 페르시아군은 흩어지고 부딪쳐서 패닉상태가 되고 말았다. 동서 7킬로 남북 2킬로의 살라미스 수로 남측의 좁은 해면에서는 800 여척이 모여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함대의 대다수는 과밀상태이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싸울 수가 없고 자기편 군선의 충각에 맞아 침몰하는 배도 생겼다.
이 해전의 승리를 믿고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있던 구세르구세스 대왕이 본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페르시아함대가 대침몰하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새벽과 함께 시작된 대해전은 그리스군이 한 판 승부로서 페르시아군은 도살되는 양떼의 무리처럼 망설이고 있을 뿐으로 결국에는 서로 부닥치고 옅은 물에 좌초되어 전혀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한편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군은 이 좁은 수로를 자기 집 앞마당처럼 종횡무진으로 돌아다녔다. 그들은 어디에 암초가 있는지 또 해류의 흐름과 방향의 변화하는 시간 등을 숙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리스군의 비밀병기라고 할 수 있는 신형 삼단도선은 속력이나 힘이 페루시아 함선을 능가하고 있어 좁은 구역에서도 민첩하게 빙빙 돌 수 있는 군함이었다.
삼단도선은 안정성을 가지고 속도를 중시하여 설계된 매우 가늘고 긴 배였다.
삼단도선모형
그리스 테미스토클레스장군
페르시아왕 쿠세르쿠세스1세
노를 삼단으로 하여 노군을 모두 채워 태우면 통상의 배보다 배의 속력을 낸 것으로 생각된다. 추정하기로는 약 11.5노트로 현대의 레이스용 8인승 보트를 능가하는 고속도를 낼 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선단의 선수에는 적함과 충돌하여 구멍을 내어 침몰시키기 위한 충각(衝角)이라는 철제의 덩어리가 붙어있었다. 이 삼단도선이 대열을 짜서 매우 빠른 속도로 물보라를 치며 돌진하는 모습은 마치 해면을 자르며 나가는 거대한 칼날의 무리와 같은 광경이었음에 틀림없다. 당연히 그 충각이 적함에 충돌했을 때는 충격은 굉장한 것이었다.
통제 불능 상태가 된 페르시아함대는 허둥댈 뿐으로 그리스함대의 먹잇감이 되었다.
오후부터 바람이 불어 바다가 거칠어졌는데 그 무렵에는 승패가 분명해졌다.
부근 해상은 격파된 선박의 잔해와 수많은 페르시아군 병사의 시체가 떠돌았다. 해안에는 셀 수 없는 병사의 시체가 떠올라서 산처럼 쌓였다.
아침부터 이 대량 살육의 실황을 눈으로 보고 있던 구세르구세스는 테르모필레 때처럼 분노로 망연자실하여 옥좌에서 앉았다 섰다 하여 억울해 하였다. 그러나 최후에는 기력조차 잃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망연히 페르시아군이 도살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역사에 남을 살라미스 만에서의 해전은 그리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리스군은 3배 이상의 페르시아함대를 따돌리고 보기 좋게 승리한 것이다. 실로 압도적인 승리였다.
10년 전에 행해진 마라돈(Marathon) 전투의 해전판에 의한 재현인 것 같았다.
기원전 480년 9월 말 그 날은 아침부터 맑고 고요하여 바람도 없이 시작했는데 오후부터 돌풍이 거칠게 불고 바다에는 파도가 높이 이는 변화가 심한 하루였다. 바다에는 수많은 페르시아군 시체가 떠돌았다.
이리하여 기상조건도 그리스 편에 행운을 주었다. 삼단도선은 외양과 같은 파고가 거친 곳에서는 안정성이 없고 속도를 살린 공격을 할 수 없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좁고 파도가 잔잔한 수역에서의 전투였기 때문에 그 가치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델피의 신탁에 의한 <나무 벽>이라는 불가사의한 말이 한 사람의 천재 장군의 번뜩이는 예지와 맺어져서 이 위대한 기적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만일 이 때 페르시아군이 그리스 전토를 정복하였다면 그 후의 세계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세계사의 운명을 크게 바꾼 델피의 유적은 2천 수백 년이 지난 오늘도 정적 속에 신비스러운 영기를 풍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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