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검투사 이야기
-Gladiator의 세계-
원형투기장 건설
기원 80년 로마시내에서 어떤 거대한 건조물이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윽고 콜로세움(Colosseum)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원형투기장은 약 10년의 세월과 로마의 건축 기술을 총결집시켜 만들어진 건조물로서 고대 7대 불가사의라고 추겨지는 것이었다.
완성된 콜로세움은 외벽의 높이가 52미터 직경이 188미터 단경이 156 미터정도 되는 거대한 것으로 타원형이었다.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5만 명 남짓으로 관객석은 4층으로 되어 있어서 외벽에는 80개의 통용문이 설치되었다.
이 거대 경기장은 폭군으로 알려진 5대 네로황제(Nero 54-68)의 황금 궁전 안에 있었던 인공 연못 바닥을 파서 만들어졌다. 공사는 수만 입방미터의 모래가 파내지고 바닥 암벽이 원형투기장의 기반부분이 되고 있다. 다시 그 기초부분에 석회암과 대리석을 써서 4층의 객석이 만들어 질 수 있게 하여 지어졌다. 그리고 황제가 앉는 가장 앞 열의 귀빈석으로부터 4미터 밑에는 아레나(Arena)라 불리는 타원형의 투기장이 펼쳐진다.
원형투기장 아레나 밑의 장치
이 아레나의 지하에는 약 6미터 깊이의 공간이 있고 지상에서 펼쳐지는 피비린내 나는 경기를 재미있기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연출이 행해졌다.
예를 들면 바위산이나 식물 등 여러 가지 무대도구를 넣고 뺄 수 있도록 했고 도르래로 평상을 매달아 올릴 수 있게도 하였다. 관객이 보는 중에 갑자기 맹수가 튀어나오게 하는 장치도 되어 있었다.
원형투기장의 검투
콜로세움은 완성되자마자 로마시민에게 오락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잔혹한 피비린내 나는 오락이었다. 원형투기장에서는 황제와 일반인이 같은 관객으로서 동석하기 때문에 로마시민은 보통은 볼 수 없는 황제의 모습을 우러러 볼 수가 있었다. 그런 때문에 시합 사이에 서로의 반응을 보면서 같은 드라마를 즐길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순간 황제와 백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백성들 중에는 이 잔혹한 쇼를 보기 위하여 길가에 며칠씩 야영을 하면서 기다려야 하기도 하였고 문이 열리자마자 밀려드는 인파로 압사당하는 일도 있었다.
원형투기장주변에서는 오늘 행해질 시합에, 대항 예상이나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붐비는 속에서 유객을 위하여 소리를 지르곤 하였다. 어떤 마음씨 좋은 로마인은 잔학함에 이마를 찌푸리는 사람도 있으나 실업자나 빈민에게는 이 구경거리는 근래의 울분을 떨어버리는 일이 되기도 하고 불만을 털어내는 출구이기도 하였다. 사실 이들 잔학한 행사는 불평불만을 국가에 돌리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황제로서는 인기를 얻기 위한 일환의 효과도 있었다.
원형투기장의 구경거리
구경거리의 내용은 주로 검투사의 시합, 야수끼리의 싸움. 맹수에 의한 공개 처형, 맹수와 검투사의 싸움, 모의 해전 등이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원형 경기장에서 행해진 피투성이의 구경거리를 한 가지 보기로 하자.
오전 중에 보통은 야수끼리의 싸움이 행해졌다. 예를 들면 곰과 들소, 황소와 코뿔소, 코끼리와 코뿔소 등끼리의 싸움이 인기가 있었다. 야수들은 여러 가지 색깔의 헝겊을 던져 흥분시킨 후 조련사가 가진 작살이나 막대나 불로 쫓아서 싸우게 하였다. 로마인은 내용이 이상하면 이상할수록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니 담당자는 생각할 수도 없는 기상천외의 구상을 하려고 머리를 쓴 것이었다.
오후가 되면 더 잔혹한 쇼가 시작된다. 포로와 죄인, 기독교도 등이 굶주린 맹수에게로 던져져서 몸서리치게 살해된 것이다. 어떤 죄인은 산채로 찢기어 한 마리의 굶주린 곰에게 먹히고, 죄인은 산채로 먹히고 몸은 순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고기 덩이가 되어버린다. 때때로 등장하는 거대한 곰은 이윽고 사람들에게 사신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게 되기도 하였다. 이 공개 처형은 야수 형이라고도 불리고 관객에게는 인기가 있고 환성을 받기도 하였다.
검투 장면 재현(영화의 장면)
황제 네로는 잔학한 처형을 많이 행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중에도 기독교도를 횃불처럼 태워 죽인 것은 몸서리치는 형이었다. 그들이 입은 옷을 기름에 적시어 찢고 투기장 가운데서 태운 것이었다. 불에 타는 기독교도들은 죽을 때까지 절규하였고 마치 이런 지옥 같은 광경을 보고도 백성들은 환성을 질렀다고 하니 이미 광기에 미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 늦게는 검투사의 시합이 행해지게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모의전이 행해지고 검이 잘 드는 지를 시험한다. 이어서 튜바의 소리가 울리면 진검승부가 펼쳐진다. 가지가지의 무기를 가진 검투사가 마침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시합이 시작되면 그 사이에 관객은 큰 소리나 환성을 지르고 악단은 전의를 고취시키려고 나팔이나 호른 피리 소리가 높이 울려 퍼지는 것이다.
이윽고 한편의 검투사가 상처를 입고 쓰러지면 승부는 결정된다. 그 때 패배한 검투사는 왼손가락을 높이 들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구걸하나 승자인 검투사는 패배자의 몸을 짓밟아서 관객이나 황제에게 보이고 살리느냐 죽이느냐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관객이 헝겊을 휘두르면 살리라는 의사 표시이고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하면 찌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황제 자신도 이런 경우에는 관객의 의사표시에 따르는 편이 많았다.
이 황제의 사인이 죄종적인 결정이 된다. 그 결과 관객의 인기가 있는 검투사나 선전한 자는 살려지고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검투사에게는 목을 잘라버려라 하는 무자비한 관객의 매도가 있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승리한 검투사에게는 환성과 꽃이 주어진다. 얼마 동안은 승리의 미주에 취할 수 있게 하였으나 그리 오래 가진 못하였다. 얼마 없어 행해지는 신참 검투사와 두 번째의 시합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힘이 다해서 죽게 되는 신세였다.
싸움에 패하여 죽은 검투사의 시체는 장례의 여신이라는 이름이 붙은 문으로 재빨리 운반되고 피투성이가 된 바닥에는 다음 시합을 위하여 새 모래가 깔린다. 쇼가 정체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였었다. 13대 트라야누스황제(Trajanus 98-117)가 주최한 때에는 약 120일 간 사이에 1만 1천명의 검투사와 1만 필의 맹수가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니 하루 평균 90명 정도의 사람과 동물이 피에 굶주린 관중 앞에서 도살된 것이다.
원형경기장 모래 위에서는 검투사는 여러 가지의 무기를 가지고 싸웠다.
주된 것을 들면 투망사라고 불리는 검투사는 반나체의 경장으로 세 가닥의 창이나 단검으로 무장했다.
이 검투사와 잘 싸운 것은 물고기 모양의 투구를 쓰고 타원형의 방패와 단검을 가진 검투사였다. 기타 가면으로 깃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장방형의 큰 방패와 검을 가진 자라든지 궁형의 검과 자그만 사각형의 방패를 가진 자가 있었다. 추격투사라고 불리는 검투사는 투구와 정강이 갑옷을 입고 긴 창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 검투사가 존재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관중에게 인기가 있는 쇼였다. 여성 검투사의 경우는 관중의 호색 취미의 시선을 붙잡기 위하여 검과 방패 이외에 의복은 최소한으로 입고 싸웠다.
검투사의 시합은 1대 1이 기본이었는데, 그중에는 다수의 검투사가 집단으로 싸우는 경우도 있어 이런 경우에는 전차경기용의 큰 경기장을 사용하였다.
원형 투기장의 바닥을 물로 채우고 대규모의 모의해전도 몇 번인가 행해졌었다. 이 경우 수면에는 적과 아군으로 나누어진 군선 몇 척을 띄워서 과거의 이름 높은 해전을 재현시켰다고 한다.
검투사의 길
검투사 출신의 다수는 로마군에게 포로가 된 전쟁포로나 죄인들이었는데, 그 중에는 로마 시민이나 지배계층에 속하는 사람도 있었다.
원로원 의원의 아들이 검투사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들은 보수를 받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한꺼번에 받는 보수는 막대한 것이었다.
어느 인기 검투사의 은퇴시합에 나온 보수는 10만 세스테르티우스(Sestertius)였다는 것이 기록될 정도이다.
로마시대에는 사람의 값어치는 재산의 양에 의해서 평가되는 사회였다. 곧 그가 사회적으로 신용을 인정받으려면 그 신분에 맞게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면 로마 기사계급(부유한 중류시민)이 보유해야 할 재산은 40만 세스테르티우스라고 정해져 있었고, 지방도시의 참사회원 정도가 되면 10만 세스테르티우스였다.
제정시대 전기의 로마에서는 연봉 2만 세스테르티우스가 있으면 어떻게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니 오늘 날의 가치로 고쳐 본다면 연수 6천 5백만 원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계산으로 본다면 인기검투사가 받은 10만 세스테르티우스란 보수는 3억 원 정도가 될 것이다. 확실히 거액이다.
이러한 고가의 보수에 눈이 어두워서 노예가 아닌 자유인에게서도 지원이 쇄도했다고 한다.
검투시가 되고자하는 로마시민은 예를 들면 시합을 하여 검으로 죽임을 당하여도 좋다는 서약을 하고서 합법적인 검투사가 되었다고 한다.
시합에 나가는 검투사는 그 능력에 맞추어 5계급으로 나눈다. 물론 보수도 다르다. 예를 들면 최고급은 1만 2천~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 정도이고 최저는 1천 ~2천 세스테르티우스로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최고급 검투사의 보수는 거액이었다.
원형경기장의 잔혹한 쇼는 그 후 3세기나 이어졌는데, 노예의 공급원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이 없어지자 대량의 검투사를 확보할 수가 없어지고, 또 경기장에서는 많은 수의 야수가 죽임을 당하였다. 경기용 야수를 잡기 위하여 사냥꾼들은 혈안이 되어서 아프리카를 휘졌고 다녀야 했다.
겨우 하루에 5천두의 동물이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므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자가 없어지고 북아프리카에서 코끼리가 사라졌다.
검투사 노예의 반란
검노라 일컬어지는 노예들을 취급하는 것도 실로 심해서 시간이 갈수록 불만이 쌓여서 반란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기원전 70년에 일어난 검노의 반란에서는 거의 2년에 걸쳐 약탈과 살인이 이탈리아 반도를 휩쓸었다.
그 주모자 스파르타쿠스(Spartacus BC 107~71)는 원래는 트라키아(Thracia)의 병사였다고 하는데, 포로가 되어서 검투사가 되었다고 한다.
스파르타크스 상
그는 검투사양성소애서 탈출하여 70여명의 동조자와 함께 베스비오스산의 분화구로 도망쳐서 반란을 일으키자 주변의 노예들이 동조하여 모여져서 잠간 사이에 7만의 군단이 되었다 한다.
반란군은 남이탈리아를 약탈하고 로마정규군단을 상대로 두세 차례 격파할 수 있었다. 오합지졸인 노예들을 잘 이끌어 정규군을 혁파할 정도였으니 스파르타쿠스는 인망이 두텁고 지휘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다.
그러나 3년에 걸쳐 로마를 괴롭힌 스파르타쿠스군도 내부분열로 붕괴하여 최후에는 로마군에게 진압 당하였다. 약 6천명의 노예가 포로가 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산채로 신체를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하고 거리에 전시되었다 한다.
전시된 십자가는 카푸아(Capua)에서 로마로 향하는 200킬로미터의 아피아(Appia)가도 변에 즐비하게 전시되었다. 노예의 반란을 평정한 장군이면서 로마 제일의 자산가인 크라쑤스(Marcus Licinius Crassus BC 115~53)는 결코 그들의 시체를 정리하여서는 안 된다고 명한 때문에 이 길을 다니는 사람은 몇 년 간 섞어가는 시체들을 보고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다.
이 반란을 교훈 삼아 로마는 그 후 엄한 법률을 만들었다. 노예 한 사람이 그 주인을 죽이면 그 가정에 있는 노예 전원을 수백 명이 되더라도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법률은 효력을 발휘하여 그 후로는 이러한 노예의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대로서 생각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이나 권리 등 티끌만치도 없었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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