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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포에니 전쟁과 한니발 장군

간천(澗泉) naganchun 2011. 7. 21. 12:37

 

포에니 전쟁과 한니발 장군

 

 

카르타고(Carthage)의 번영과 로마와의 숙명적 대결

 

기원전 3세기 중반 헬레니즘 세계의 승자를 정하는 일대결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이 일어났다. 지중해의 패권을 걸고 두 나라가 격돌한 것이다. 그 두 나라란 세계패권을 노리는 로마와 지중해의 여왕이라 일컬어진 카르타고였다.

두 나라는 100년에 걸쳐 세 차례 격돌하였다. 어느 때는 피레네(Pyrenees) 산을 피로 물들였고, 또 한 번은 지중해 해상을 피로 물들였다. 1세기에 걸쳐 벌어진 싸움이 오늘 날 세계문명에 끼친 영향은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의 식민도시의 하나로 기원전 9세기 초에 건국되었다고 전해진다. 인구는 최성기에 70만을 넘었다고 한다. <포에니(Punic)>란 라틴어로 페니키아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다.

페니키아인의 수많은 식민도시들 중에서도 카르타고가 가장 상업 활동이 활발했다. 오늘 날 지중해의 각지의 유적에서는 카르타고제 은제품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6세기경에는 지중해 전역을 완벽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그런데 카르타고는 새로 대두하는 신흥세력과 다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 국가는 매우 지배욕이 강하고 교활하고 치밀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탈리아반도를 재패하고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나라는 로마이다.

로마는 시칠리아 곧 카르타고의 지배권에까지 세력을 펼치려 하였다. 이에 두 나라는 정면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직선거리로 치면 500킬로 정도이다. 바람을 타고 배로 3일이면 닿을 수 있다. 지중해를 향해있는 두 나라는 어느 쪽이 멸망할 때까지 싸우지 않을 수가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해상에서의 결전 (제1차 포에니전쟁)

 

마침내 그 날이 찾아왔다. 기원전 264년 시실리(Sicily)도 내의 카르타고 식민시에 로마가 간섭한 것이 원인이 되어서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카르타고와 로마는 1세기에 걸친 긴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시칠리아는 두 나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결전의 무대로 변한 것이다. 로마도 카르타고도 이 땅에 모든 것을 경주하여 완전한 총력전이 되었다.

싸움은 시실리도와 그 주변해역에서도 일어났다. 그것은 일찍이 없었던 격전이었다. 약 70년 정도 전에 있었던 알렉산더대왕의 원정 때에도 이 정도로 사상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병사가 죽고 많은 시민이 학살당하였다. 또 이때 시칠리아 해변에서 풍파를 만나 로마군 선박이 조난하여 하룻밤 사이에 10만 명 이상이 수장되는 비극도 일어났다.

육전은 로마가 한 수 위였으나 카르타고에는 코끼리 군단이라는 비밀병기가 있었다. 무서운 위력을 가진 이 코끼리군단은 지금으로 말한다면 초중전차부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때는 로마군이 아프리카까지 침공한 일이 있으나 그것을 맞아 친 것은 100두 이상의 코끼리군단이었다. 이 코끼리군단과 조우한 로마군은 코끼리가 내는 체취를 감지하고 군마가 공포에 질려서 놀라 전혀 쓸모가 없게 되었었다고 한다.

또 100두 이상의 코끼리가 집단으로 돌진하는 힘은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이 있고. 적병은 경악하여 패닉 상태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결국 로마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는 일진일퇴로 반복되었다. 그러나 해군력이 강한 카르타고가 조금은 우세였다. 로마는 일찍이 없었던 이 강적에 몇 번이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이대로는 카르타고가 로마군을 시칠리아에서 일소해버릴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중 로마로서 행운이 일어났다. 시칠리아 해안에서 난파한 카르타고 군선을 거의 손상함이 없이 손에 넣은 것이다. 그것은 5단 노가 붙은 최신형 군선으로 카르타고 해군의 주력 군선이었다. 로마는 서둘러서 그리스 조선기사의 도움으로 겨우 3개월에 군선 100 척 이상을 건조하였다.

동시에 그에 더해서 신병기도 고안하였다. 그것은 적선에 육박하여 박아 넣는 움직이는 잔교였다. 그 잔교에는 철제의 고리가 있고 일단 걸어놓으면 적선 갑판에 박혀서 양방의 군선이 꼼짝 못하게 묶어 놓는 것이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군선에 육박하여 이 움직이는 잔교를 써서 상대의 군산을 끌어당기고 보병을 투입시켜 백병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곧 로마의 자랑인 육전을 해상에서도 전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로마는 해상에서도 카르타고와 맞먹게 되었다.

 

이 총력전은 24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럴싸한 양군도 피로의 기색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제한되는 병력에 대해서는 로마군이 한 수 위였다. 이탈리아 주변의 동맹국에서 뒤를 이어서 보충되는 로마군에 대하여 카르타고의 인적자원은 한정되어 있었다. 결국 카르타고군은 피폐하여 굴욕적인 화평을 맺게 되었다.

잃은 것이 너무나 컸다. 카르타고는 시실리아도, 사르데냐(Sardegna)도 등 두 섬을 내놓게 되고 배상금으로 실로 3천 2백 달란트(1달란트는 금 49킬로=금15만 6800킬로)라는 거액으로 그것을 20년에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카르타고의 재흥과 한니발의 등장(제2차 포에니전쟁)

 

그 후 23년간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무거운 부채를 짊어진 카르타고였지만 배상금을 반제해가면서도 국력을 착실히 회복시켜갔다. 그리고 기원전 219년 복수를 맹세한 카르타고는 다시 로마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이때 카르타고에 위대한 장군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카르타고의 구세주라 칭하고 또는 사자의 아들이라고도 불렀다. 그 장군은 눈 쌓인 피레네(pyrenees)산맥의 산들을 넘어 알프스의 들판을 달리고 여러 사투를 되풀이하면서 로마제국을 멸망 일보 전까지 몰아붙인 사람이다. 그는 명장 한니발(Hannibal Barca, BC247~BC183년)이었다.

 

한니발 동상

 

한니발은 9세 때에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 BC275~229)와 함께 스페인에 건너갔다. 그 이유는 로마 공략의 거점을 만들기 위해서였다거나 아프리카에 세력 대립구도가 형성되고 있어서 그에서 피하기 위해서라거나 스페인 땅에 카르타고의 제2의 고향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카르타고 본국으로서는 득이 되는 여러 요소가 갖추어져있었다. 이 지방에는 금, 은, 주석이 대량 매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카르타고는 이 지방에서 산출되는 자원으로 로마에 대한 배상금을 대는 한편 20년 후에는 다시 강대한 경제력을 가지고 소생하게 되는 것이었다.

 

스페인 안다루샤(Andalucía) 지방을 지배하게 되어 하밀카르는 스페인 지방의 영주와 혼인정책을 행하여 관계를 밀접히 하고 있었다. 하밀카르 자신도 토착 영주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것은 마치 페르시아에서의 알렉산더 대왕 같았다. 다시 수도를 정하자 거기에는 왕궁도 건설하였다. 그 수도는 <신 카르타고>라 이름 붙였다.

로마는 배상금 지불이라는 명목으로 카르타고의 스페인에서의 활동을 묵인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되는 기간에 다시 강대해진 카르타고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로마는 사자를 스페인에 보내어 다음과 같은 조건을 체결하려고 카르타고를 협박하였다.

먼저 조약에는 에브로(Ebro))강에서 동쪽으로 들어오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 다시 이 강 남쪽에 위치한 사군토움(Saguntoumu) 고을을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도 들어있었다. 사군토움이라는 고을은 험한 산 위에 세워진 요새도시로 로마제국의 보호 하에 있었다. 이 고을은 카르타고의 세력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가 다시 상대하게 되면 먼저 공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곧 이 조약은 겨우 6년 후에 파기되게 되었다. 사군토움 고을을 공격한 한니발 대군은 에브로강을 건너서 동진을 계속하여 두 나라가 다시 격돌하기 때문이다.

 

한니발 군단이 알프스를 넘다.

 

사군토움 고을을 함락시킨 카르타고군은 그 수개월 후에는 프랑스 남부 아루루지방까지 도달했다. 한니발의 전력은 보병 3만 6천, 기병 8천 정도로 이에 37두의 코끼리군단이 더해졌다. 다시 로누(Rhone)강을 도하하는 데 성공한 군단은 북쪽으로 로마를 공격하기 위하여 알프스산맥으로 진로를 향한 것이다.

그러나 알프스를 넘는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특히 37두의 코끼리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행군이었다. 8월이라고는 하지만 2천 미터가 넘는 높은 곳이라서 밤은 냉기가 심했다.

굳은 만년설 위에 눈이 내리고 살갗을 에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추위가 그들을 엄습하고 피로와 공복으로 많은 병사가 탈락해 갔다. 행군 중 좁은 산길을 벗어나 많은 병사가 말과 함께 단말마의 절규를 남기고 떨어지기도 하였다.

게다가 적대하는 산악부대의 습격이 거기에 더해졌다. 그들은 산정에서 거석을 내던져서 한니발의 군세에 다대한 손상을 입혔다.

결국 이 가혹한 행군은 15일이나 걸렸고, 알프스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은 2만의 보병과 6천의 기병뿐이었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의 군단, 멀리는 코끼리가 발을 헛디뎌서 떨어지는 것도 보였다. 

당초 출발할 때에 비하면 4할이 넘게 잃어버린 것이다. 코끼리 군단에 관해서는 반수 정도가 알프스를 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괴로운 환경을 넘은 그들의 마음에는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꽉 찼다. 게다가 한니발의 행군 중 의연한 태도는 병사들의 확고한 신뢰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그는 카르타고 장병의 마음을 굳게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알프스산을 보기 좋게 돌파한 한니발의 대군은 9월이 되자 마침내 이탈리아평원에 그 웅자를 드러냈다. 지금이야말로 백전연마로 화한 강군인 군단은 다시 진격을 개시하였다. 목표는 숙적 로마의 심장부이다.

로마는 한니발의 의외의 작전에 놀랐다. 로마 원로원에 동요의 빛이 역연했다. 바다로부터의 적에게만 마음을 빼앗겼던 로마는 생각하지도 못한 방향에서의 기습에 동요했다. 참으로 단애절벽인 일프스산맥을 넘어 가혹한 환경을 대단치 않게 대군단이 쳐들어올 줄은 예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 로마의 뱃속을 뚫어본 것일까 한니발 군이 배후로 공격해 온 것이었다. 게다가 그 신출귀몰하는 군단은 16년간이나 칸파니아(Campania)(중부 이탈리아) 땅에 머무르면서 로마제국에 대하여 계속적인 위협이 되었다.

12월이 끝나갈 무렵 한니발의 군세는 포오(Po)강을 건너서 토레비아(Torebia)호반까지 진격하고 있었다.

한편 로마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시실리에서 원군을 불러들이자 착착 반격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지금은 로마군은 보병, 기병 합해서 4만 정도에까지 불어났다. 양군의 병력은 거의 같은 수준으로 토레비아강을 끼고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토레비아(Torebia)의 전투

 

눈발이 내리는 새벽에 한니발이 행동을 개시하였다. 기병 일부를 도하시킨 것이다. 이것은 로마군을 유인할 계획이었다. 그들 로마군으로 하여금 찬 강물을 건너서 기병이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넓은 평야로 유인하려는 것이다.

생각한 대로 로마군은 이에 달려들었다. 한니발의 기병은 일부러 싸우지 않고 후퇴한다. 로마군은 그 세를 타서 강을 건넜다. 서둘러 강을 건넌 로마군이었으나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니발의 보병이 검으로 습격해오는 것이었다. 의표를 찔린 로마군은 후퇴하여 대안의 본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결국 로마 전군이 얼음장 같은 토레비아강을 건너게 되었다. 이에 한니발의 유도전술이 적중한 것이다.

처음에는 로마군이 우세했다. 한니발의 보병은 차차 눌리어 전열이 흐트러졌다. 그 때 로마군의 배후의 어둠 속에서 기병이 달려들었다. 이것이야말로 한니발의 바라던 순간이었다.

 

BC218년 12월 그는 그 전야에 2천 명의 정예부대를 야음을 타서 남쪽 봉우리에 매복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군은 돌연 배후로부터의 공격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윽고 양익의 기병도 로마군을 포위하는 형국이 되어 삼 방면으로 에워싸인 로마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안개가 끼어서 눈발이 점점 세지는 가운데 마침내 로마군은 패주하였다.

그리하여 토레비아전투는 한니발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로마군을 격퇴한 한니발은 다시 남하를 계속하였다. 한편 로마는 이 시점에서는 패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침통한 분위기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패인을 눈과 안개 때문이라고 분석한 것도 그 하나였다. 다시 스페인에서는 로마군이 카르타고의 수비군을 패퇴시키고 있었고 시실리연안에서는 로마함대가 카르타고 함대를 격퇴시키고 있다는 길보가 들어오자 이 패전을 지워버린 때문이었다.

 

토라시메누스(Torashimenusu) 호반의 전투

 

반년 후 아펜닌산지에서 남하를 계속하던 한니발군은 중부 이탈리아부근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곳은 로마로부터 백 수십 킬로 떨어진 곳으로 말하자면 로마의 현관 앞이 된다. 토레비아에서 패한 로마는 군단을 재편성하여 이곳에서 한니발군을 맞아 반격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은 토라시메누스(Torashimenusu)호반에서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여기는 북안의 협곡의 길이가 9킬로 정도로 길이 하나 있다. 배후에는 산이 다가서 있다. 주위는 숲으로 울창한 장소이다. 전투는 6월 어느 날 새벽 전에 시작되었다. 그 날은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했다.

카르타고의 뒤라고 생각한 로마군은 그들을 추격하듯이 협곡을 따라 있는 길로 들어온 것이다. 로마는 다시 한니발의 양동전술에 걸려들었다. 공격명령이 내려진다. 카르타고군은 높은 곳에서 습격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다음에 보병이 검을 휘두르며 돌진해왔다. 로마군은 당황했다. 좁은 길에 길게 늘어진 그들은 전투대형을 취할 수도 없었다.

 

BC217년 6월 짙은 안개 때문에 로마군은 우군의 위치조차 모르고 어느 쪽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결국 전투는 수 시간으로 결정이 났다. 안개가 걷힐 무렵 호반은 로마군 시체로 매워져 있었다. 호수에 빠져 죽은 병사도 많았다. 죽은 병사는 1만 5천 남짓이고 전사자 중에는 원로원 의원의 시체 30구를 비롯하여 최고 지후관인 듯한 시체도 섞여 있었다. 한니발 측의 손해는 극히 적었다.

이 도라시메누스 호반의 패배는 로마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로마에 참패의 소식이 전해지자 민중의 절규 소리와 남편을 잃은 아내의 통곡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이윽고 원로원의 통지를 듣기 위하여 민중이 속속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단상에 올라 선 집정관의 한 사람은 소리 높여 민중에게 말하였다. 적은 비열한 수단으로 우리 방어망을 돌파했다. 그러나 우리의 방어는 철벽과 같다. 그러나 위세 당당한 내용에 비하여 그 소리는 침통하고 무거운 울림으로 가득 찼다.

7월 후반 한니발은 마침내 로마 깊숙이 남 이탈리아까지 진을 진군시키고 있었다. 여기서 1년 가까이 서로 겨누기를 계속하였다.

 

칸나에(Kannae)의 결전(BC216년 8월 2일)

 

존망의 위기에 처하고 있다고 느낀 로마는 그 사이에 전력을 재정비하는 데에 필사적이었다. 로마 원로원은 총력으로 최정예 군단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모든 인원과 물자가 모여졌다. 그들은 여기서 한니발 군세를 멈추게 하지 않으면 다시는 재기할 수 없다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한니발 측도 다가올 결전을 위하여 로마군의 물자 저장지였던 칸나에(Kannae)를 함락하기 위하여 진을 쳤다. 이윽고 그것을 쫓듯이 로마군이 도착했다.

이리하여 칸나에는 양군이 자웅을 가리는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양 진영의 거리는 5킬로 정도이다. 한니발군은 5만 명 정도였다. 상대하는 로마군은 8개 사단 약 8만이 넘었다. 그 중에서 6천의 기병도 포함되었다.

이것은 미증유의 대규모의 강대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이 번 로마군은 중앙의 주력 공격력을 높이기 위하여 12명의 병사의 두께로 진격시키는 작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12명이라 하면 통상의 2배의 밀도이다. 정면의 폭을 줄이고 우세한 병력으로 카르타고군의 중앙부에 들어가서 큰 구멍을 내고 일거에 분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적 기병이 배후로 돌아오는 시간까지에는 결판이 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떻든 로마군으로서는 토레비아의 전철은 밟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한편 한니발은 5킬로 전방에 집결하는 로마군의 대 진영을 보고 그 노리는 바를 깨쳤다. 보병 대집단으로 중앙 돌파를 꾀한다는 전술은 로마군의 장기로서 전통적 전술이다. 그에 대하여 그가 취할 전투 계획은 이미 되어 있었다. 능선진이라는 전법을 취할 것으로 결의한 것이다. 곧 양익에 주력을 두고 두 개의 강력한 날개로 상대를 포위하고 섬멸한다는 작전이다. 그러기 위하여 양익에는 각각 대량의 기병과 중장보병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상당한 위험도 수반한다. 만일 중앙부가 포위하기 전에 분쇄된다면? 그리고 만일 양익이 예정한 대로 적의 배후로 돌아 들어가지 못한다면? 아마도 전군은 흩어질 것이다. 그래서 분쇄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전력으로 봐서 열세인 카르타고로서는 이 작전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수 시간 후에는 틀림없이 비참한 패배인지 승리인지 그 어느 쪽이 결판 날 것이다.

8월 2일 새벽 마침내 결전의 날은 왔다. 여름으로 물이 적어진 아우피도우스(Aufidousu)강을 로마군이 건너왔다. 드디어 검과 방패를 가진 로마의 중장보병이 다가왔다. 양군의 거리가 수 미터까지 가까워진 때 양군의 화살이 일제히 쏟아진다.

동시에 로마군이 돌격해 온다. 카르타고군은 이것을 받는 형국이 되었다. 다음 순간 엄청난 검과 검이 부닥치는 금속성이 났다. 병사들의 성낸 목소리와 창과 방패가 부닥치는 둔한 소리가 나고 먼지가 공간에 날렸다. 전장은 무서운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로마군의 맹공 앞에 카르타고군의 중앙부는 차차 깨진다. 무수의 병사가 단말마의 소리를 내면서 지면에 쓰러진다. 일찍이 없었던 로마군의 격한 공격에 중앙부의 카르타고 병사는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많은 병사들이 검이나 방패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하였다. 카르타고의 중앙부가 붕괴되기 시작할 징조가 보였다.

한니발은 지금이야말로 조일 때라고 생각하여 무서움에 떠는 병사들을 향하여 열심히 격려하였다. 위축되지 마라. 힘내라. 조금만 더 힘내라! 한니발의 필사의 격려에 병사들은 다시 검을 들고 사력을 다하여 이에 보답하려 했다. 일단 붕괴 직전의 전선은 다시 바로 잡혔다. 오래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때 로마군의 배후에 날카로운 화살이 꽂혔다. 많은 로마군이 절규하며 넘어졌다. 카르타고의 기병이 마침내 로마군 배후로 돌아와 가세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 순간 입장은 완전히 역전하였다. 수세에 섰던 것은 로마군이 된 것이다. 후방의 카르타고의 기병에 포위된 로마군은 순간 패닉 상태에 빠졌다.

화살이 사정없이 로마군의 등을 찔렀다. 단말마의 절규가 울리고 검과 방패를 버리고 로마군은 지면에 쓰러졌다. 다음은 승리를 확신한 카르타고군에 의한 살육이 이어졌다.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고 한여름의 더위도 누그러지는 무렵 싸움은 끝나고 있었다.

전장을 매운 것은 로마군의 시체의 산이었다. 그 수는 실로 5만 이상이다. 쌓이고 쌓인 시체더미에는 원로원 의원의 시체도 80구(원로원 의원은 600명이 정원)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로마군 진영의 수천의 병사들도 항복하였다. 로마군 최고지휘관 파로(Faro)는 50기 정도의 기병에 호위되어 전장을 이탈하였다. 한편 카르타고군의 전사자는 5천이 넘지 않았다.

로마는 이 싸움에서 8개의 정규군단을 잃었다.(로마제국에는 약 30개의 정규군단이 있음) 로마 중에서도 최정예임을 자부하는 최강의 군단이 하나도 남지 않고 괴멸하고 말았다. 지금은 한니발은 마침내 로마를 이긴 것이다. 그는 대담한 도박에서 이긴 것이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야전에서의 포위섬멸전의 전형으로서 몇 세기나 칭찬할 정도로 완벽한 승리였다.

어둠이 밀려오는 높은 누대에 서서 그는 멀리 안개 낀 아펜닌(Appennini)산맥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끝없는 도로를 보는 기분이었다. 벌써 연도에 적병의 모습은 없었다. 그는 일거에 로마의 심장부로 진격하여 이를 멈추게 하는 것으로 좋았던 것이다.

 

한니발의 숙고와 스키피오의 등장

 

그날 밤 장군들에게서 <한꺼번에 로마를 쳐야 한다.>고 하는 소리가 나왔으나 한니발은 어디까지나 신중했다. 그것은 무슨 때문인가? 그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기습하기에는 로마는 의연히 거대하고 포위한다 해도 함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으로 포위한 카르타고군의 보급이 끊길 위험성이 있다. 동맹시의 이반을 유도하고 반로마 세력의 힘을 빌리고 스페인에서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 결국 로마의 요소요소에 쐐기를 박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면 로마는 썩은 나무처럼 붕괴할 것이다. 

 

스키피오상

 

그러나 생각에 반하여 로마의 동맹시의 연계는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로마군에게 타격을 줄 수가 없어서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하여 출격한 카르타고의 함대는 거꾸로 로마함대에 패배를 당하였다. 확실히 어느 지방에서는 반기를 들고 한니발의 군에 가담한 부족도 있었다. 헬레니즘의 강국 마게토니아가 한니발 진영에 가담하여 물자면에서 원조를 약속한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국지적인 것이었다. 대세를 움직일 만큼은 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자 한니발은 헷갈리게 되었다.

반로마 감정이 강한 게르트인들마저 신중하게 한니발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카르타고의 군단이 언제까지나 이길 수 있을까? 그들은 한니발에 가담함으로써 후에 로마의 분노를 불러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도 한니발의 군단을 이길 수는 없다. 서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승부를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겨누기는 15년이라는 오랜 기간 이어졌다.

 

이때 로마 장군인 스키피오(Scipio Africanus Major, BC236년 -183년) 한 꾀를 생각하였다. 우세한 로마의 해군력을 가지고 지금이야말로 카르타고 본국을 치는 것이다. 그러면 약한 수비대는 어쩔 수 없이 화평에 응해 올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204년 은밀히 3만 3천의 병력으로 출항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북부에 병력을 상륙시키고 카르타고 본국을 급습하였다.

로마군은 주변지역을 불태우고 도시를 약탈하였다. 이런 행위는 1년이나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카르타고의 수비군과의 사이에 몇 차례의 전투가 있었으나 아무래도 스키피오가 지휘하는 로마군에 이길 수 없다.

 

한니발의 귀국과 자마(Zama)의 전투(BC202년 봄)

 

전투에 지처 버린 카르타고의 시민으로부터 한니발을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자는 소리가 높아졌다. 이리하여 한니발은 1만 5천의 병사를 배에 태우고 조국의 위기를 구하기 위하여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병자나 말, 그리고 부상자는 남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9세 때에 조국을 떠나서 실로 36년 만의 귀국이었다.

최후의 결전이 행해진 것은 기원전 202년의 봄이었다. 근교의 자마(Zama)평원에서 양측 대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쌍방의 4만의 병력은 보기에는 백중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 질로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한니발군단은 벌써 이탈리아에서 연전연승을 계속한 천군만마의 병단은 아니었다.

군단의 반수 이상은 임시 소집된 자들이거나 용병으로 모아 짜낸 군단이었다. 그들은 전투 경험도 모자라고 사기도 꽤 떨어졌다. 따라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이탈리아에서 데리고 온 노련한 정병 1만 5천뿐이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승리의 계기를 만든 기병의 정예부대도 없고 지금 있는 것은 보기에만 기병이었다. 함께 알프스를 넘어 고락을 함께 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부하는 아니었다. 적에게 이기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80두의 코끼리군단이 참가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한니발군단은 신구를 섞어 놓은 불균형의 구성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작전은 취할 수 없고 새로운 전술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니발은 정예의 보병 1만 5천을 후방에 배치하고 온존시키기로 하였다. 전선에 2만 5천의 용병과 징집한 병력을 두고 그들이 로마군과 승부를 다투는 사이에 적의 틈을 노리고 거기에 정예부대를 투입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술에는 몇 가지의 걱정이 있었다. 먼저 정예부대를 온존시키는 행위가 용병들의 사기를 약화시키지는 않을까? 불신을 품은 그들이 배반하지는 않을까? 그리고 로마군의 가혹한 공격에 얼마만큼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한니발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

날이 밝아오는 새벽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연기와 먼지 속에서 호른과 같은 소리를 내면서 코끼리군단이 돌진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돌진은 헛되이 끝났다. 코끼리군단의 돌진을 계산하고 있던 로마는 각 진영을 하나로 뭉치지 않고 각 부대 사이에 간격을 취하는 진형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로마의 중장보병이 달려들었다. 엄청난 금속이 부닥치는 소리가 났다. 전군이 뒤섞여서 백병전이 되었다. 얼마 없이 카르타고군 전선은 밀리었다. 그것은 예상보다 빠른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한니발은 호랑이 새끼인 정예부대를 투입하기로 결의하였다. 다시 카르타고군이 뒤엎어 로마군을 밀어내었다. 과연 역전의 용사들이 갖추어진 만큼 이대로 로마진영을 괴멸시킬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때 배후에 로마의 기병이 습격해왔다. 한니발의 기병이 패한 것이다. 모든 것이 칸나에와는 거꾸로 되었다. 이제야 카르타고군은 포위당하고 만 것이다. 정예부대는 최후까지 선전하고 전멸하였다. 나머지 2만도 항복하였다. 한니발은 겨우 목숨을 건저서 전장을 이탈하였다. 한니발의 군단을 격파한 로마군은 한 숨에 카르타고로 진격하였다. 카르타고는 희망이 없었다. 로마군이 성내에 돌입하여 대 약탈을 시작하기 전에 정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전 조건은 전적으로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었다. 이후로 카르타고는 코끼리군단을 보유할 수 없다. 아프리카 이외의 어떤 영토도 포기하여야 한다. 배상금에 관해서는 실로 50년에 걸쳐 1만 달란트였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거부한다면 카르타고는 멸망하고 마는 것이다. 얼마 없어 항구에서는 로마군에 의하여 5백 척 이상의 군선이 불태워졌다.

 

망명 후의 한니발

 

한편 한니발은 망명하여 그 후 20년간 반로마세력을 이끌고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시리아군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재상륙할 계획도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반대로 로마에 대한 음모가 발각되어 도망칠 곳을 잃었다. 스스로 독을 마시고 자진했다. 그 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있다.

“(로마가)늙은 한 사람이 죽기를 바라고 기다렸지만 이룰 수 없으니 내가 로마인의 걱정을 끊고 그들의 소망을 채워주려고 하는 것이다.”

확실히 로마제국을 감동시킨 한니발다운 말이다. 오늘 날 한니발을 상찬하는 소리가 많다. 그의 삶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강대하고 오만한 권력에 겁내지 않고 최후의 최후까지 굴하지 않는 감투정신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강대한 로마제국을 저쪽으로 돌리고 전지중해 규모의 작전을 취하여 모든 작전에 항상 승리한 것이었다. 마치 알렉산더대왕과 나란히 일컬어지는 사상 희유의 천재군략가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가지고 있어도 운명은 거역하지 못하였다.

한니발이 죽어서 반세기 후 로마는 조약 불이행을 구실로 카르타고에 세 번 전쟁을 걸었다. 그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는 일이었다. 뒤에 닥칠 우려를 없애기 위해서는 카르타고를 지상에서 말살해버리고자 한 것이었다.

로마인의 카르타고에 대한 미움은 그칠 줄을 몰랐다. 잔학한 악마로 변한 로마는 카르타고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도시는 완전히 폐허화하고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서 연행했다.

그뿐 아니라 미래에 영원히 초목 한 포기도 나지 않도록 토지에는 소금을 파묻었다.

이리하여 로마는 최대의 강적인 카르타고를 지상에서 말살하였다.

 

* 참고=동서양의 역사와 인물의 연대를 비교하기 위하여 제시한다.

1) 알렉산더 3세(Aleksandros ho Megas、BC356~ BC323 재위 BC336~323)

마케토니아왕 이집트 파라오를 겸함. 대제국 정복자.

2) 피루스(Pyrrhus)(BC319~272)

(BC319~272) 고대 그리스의 에피로스국왕. 전술의 천재라 칭해진다. 알렉산더 전술의 후계자이다.

3) 진시황(秦始皇)(BC259~210)

중국 진나라 황제

4)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BC247년~183)

카르타고의 장군, 전술가.

5)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 Major, BC236년 -183년)

로마의 군인, 원로원 의원. 한니발을 패퇴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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