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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콜럼부스 영욕의 실상

간천(澗泉) naganchun 2011. 8. 25. 06:31

 

콜럼부스 영욕의 실상

 

 

 

제노바에 세워진 동상

 

 

험난한 항해

 

1492년 8월 3일 파로스(Paros)항을 출항하여 2개월여 저녁 황혼이 밀려오는 해상을 한 결 같이 서쪽으로 향하여 항해를 계속하는 3척의 범선이 있었다. 선단에는 100명 정도의 선원이 타 있고 기함이라 할 수 있는 대형 범선에는 40명 정도가 타고 있었다. 선두를 달리는 소형 범선은 빈타(La Pinta)호와 니냐(La Nina)호라 부르고 그것보다 조금 뒤에 항해하는 대형 범선은 산타마리아(Santa Maria)호라 불렀다. 선단은 2개월 정도 항해를 했기 때문에 마음과 몸에 피로의 색이 역연했다.

그러나 이 선단이야말로 수일 후에 역사적인 대발견으로 후세에 이름이 남게 되는데 이 순간 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극적인 분위기에 싸인 산타마리아호는 2척의 범선을 이끌고 대해를 한 결 같이 항해할 수밖에 없었다. 가도 가도 망망대해 물 , 물, 물뿐이다. 수평선 어디에도 섬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미 당초의 예정은 지나고 있었다.

건빵은 더 짜지고 좀이 생기고 비스켓은 원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가루처럼 부스러졌다. 물은 탁해지고 냄새가 났다. 어떤 때는 해면 일면에 융단을 깐 것 같은 해초가 무성한 바다를 돌진한 일도 있다. 지금이야말로 사르가쏘(Sargasso=부유성 해조류가 떠있다는 해역)해라고 알려진 그 바다도 누구의 눈에도 괴이하고 무서운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승조원들 누군가가 저주받은 것 같은 운명을 예감하게 되었다. 앞으로 콜럼부스(Columbus 1451~1506. 5. 20)가 지시한 대로 항해를 해도 파멸을 가져올 것 같은 불행한 결과밖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승조원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하고 이 순간이라도 반란이 아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한두 사람 징벌하였다 해도 폭동이 일어날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제야말로 항해 중 최대의 위기가 찾아올 것 같았다. 2일 전 빈타호의 선장 빈손은 그에게 석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이상 부하를 장악하고 있을 수는 없다. 무엇이라도 좋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서 멈추게 할 증거가 필요하다고 전해 왔다. 승조원의 인내심은 한계에 이른 것이었다.

이 시대 중세의 선원들은 기상천외한 전설이나 신화를 믿었다. 바다 저 끝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해역이 있어서 거기에 가면 순간에 삶아진다는 둥 대양의 끝은 폭포처럼 되어있어서 캄캄한 나락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둥 또는 길이가 100미터가 넘는 바다뱀이 기다리고 있어 배를 삼켜버린다고 믿고 있었다. 이처럼 선원들로서는 미지의 항해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전대미문의 무모한 모험으로 비치었다.

결국 폭동을 누르기 위하여서라도 그는 승조원들 앞에서 연극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3일 간 서쪽으로 항해하면 반드시 육지가 보일 것이라고 신에게 맹세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면 그는 그때 참으로 신의 계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신에게 뽑혀서 그 전도자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쓰이고 있는 것이다. 제군들도 신의 가호로 지켜지고 있다. 3일간, 앞으로 3일만 항해하면 반드시 육지에 도달한다. 그때 제군들은 헤아릴 수 없는 명예와 재산을 얻을 수가 있다. 때가 오면 제군들 자자손손 영원히 상찬을 받고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 때는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는 빈타호에 탔었다. 나는 니냐호에 있었다. 나는 산타마리아호에 있었다고--.> 그는 승조원 전원이 갑판에 모이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저녁 하늘을 보자 크게 소리 질렀다.

<바람아 불어라. 자 선수에서 철야하여 망을 본다. 최초로 육지를 발견한 자에게는 생애의 연금을 준다.>

 

이사벨라 1세 여왕의 지원

 

그가 바로 콜럼부스라는 이로서 후에 그 이름을 세계에 알려지는 사나이이다.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1451년에 태어났다. 조금 큰 체격에 균형 잡힌 체격을 하고 있었는데 독수리 코에다 얼굴에는 주름살이 많았다. 아직 40세인데 머리카락은 벌써 하얗다. 그것은 고생한 과거를 말해준다. 그는 마음가짐이 까칠한 표정이었지만 크게 심호흡을 하면 푸른 눈동자를 가늘게 하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개월 전에 궁중에서 이사벨라(Isabel 1/1451~1504)여왕을 앞에 모시고 토한 연설을 머릿속에 반추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신선하게 뇌리에 소생했다.

<앞으로 2400마일(1마일은 약 6킬로미터) 그만큼만 서쪽으로 나가면 황금의 나라 지팡구(Zipangu/일본)에 도착합니다.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새로운 항로는 반드시 발견되겠지요. 그 때 광대한 토지가 스페인영토가 되고 금후 발견되는 막대한 향신료와 황금 모두가 스페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복음은 대양을 건너 넓혀지고 신의 마음 아래 카수치라(Kasuchira)와 아라곤(Aragon)의 지배하에 놓일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백성이 폐하의 발밑에 엎드릴 것입니다. 우리 스페인의 위광은 세계의 끝까지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것은 대연설이었다. 이사벨라 1세(Isabel 1/1451~1504)여왕의 마음 깊이 감명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명연설이었다. 그는 그때의 광경을 떠올리면서 항해에 이르기까지의 우여곡절에 찬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그것은 주마등처럼 새로워졌다.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그의 동방으로의 대담한 항해에 찬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시대의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의 생각을 실현 불가능한 공염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구의 태반은 물이고 서쪽으로는 끝없는 바다만 이어져 다다를 육지란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 정도이니 서쪽으로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도 믿었던 시대이다.

콜럼부스(Columbus)의 생각은 동시대의 피렌체(Firence)의 철학자 토스카넬리(Toscanelli 1397~1482)의 지구구체설(地球球體說)과 대학교수이기도 한 다이추기경 이 두 사람의 설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그에 의하면 유럽과 동양 사이에는 4 천마일 정도의 바다로 떨어져 있어서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면 아시아의 어딘가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3세기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포로(Marco Polo 1254~1324)의 기상천외한 이야기에도 강한 자극을 받았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매우 웅대하고 이국적이었다.

<중국의 황제나 인도의 왕의 의복은 금실로 장식되고 수많은 보석을 붙이고 있다. 아마도 그 의복 한 벌이면 유럽의 도시 하나에 상당할 것이다. 다시 중국에서 1500마일 정도 떨어진 해상에는 지팡구(Zipangu=Japan의 어원/일본)라 부르는 큰 섬이 있고 국왕의 궁전은 모두 황금으로 덮여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에 의하면 이 섬에는 황금, 진주, 보석 등이 대량이 있고 허리만 굽히면 얼마든지 주울 수 있다. 게다가 지팡구(일본)의 주민은 모두 예절이 바르고 여성은 매력적이라서 사랑스럽다. 한 번 맛을 들이면 포로가 되고 만다.>

그는 중국과 일본은 1500마일 떨어져 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100마일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줄도 모르는 콜럼부수는 토스카넬리의 이론과 마르코포로의 이야기에서 2500마일 정도면 황금의 나라 지팡구에 도착할 수 있다고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당시의 배의 속도로 봐서 1개월 정도의 거리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유럽과 동양은 하나의 바다로 떨어져서 약간의 거리로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유럽에서 일본까지는 그 4배 이상 곧 1만 2천 마일이나 된다.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대양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그들의 진로 상에는 남북으로 뻗은 아메리카대륙이 가로 놓여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곧 콜럼부스의 머릿속에는 아메리카대륙은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동양 항로에로의 뜨거운 생각을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 나라에서 재정지원을 받으려 했다. 포르트칼에서도 대연설을 하여 권했으나 설득되지 않았다. 국왕인 요한2세(Johan)는 그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콜럼부스의 계획은 황당무계하다고 일축 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내가 죽자 포르투갈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 향한 곳은 파로스(Paros)라는 도시이다. 거기서도 설득공작에 나섰다. 그러나 많은 곳에서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카수치라(Kasuchira)왕국의 이사벨라여왕만은 그의 연설에 어느 정도 이해를 해주는 정도였다. 단지 그때 카수치라는 이슬람교도와의 분쟁으로 국고는 비어있어서 도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수치라(Kasuchira)왕국과 아라곤(Aragon)왕국이 연합하여 강력한 스페인왕국이 탄생하자 한꺼번에 정복자는 최종국면을 향하고 있었다. 수년 후 그라나다(Granada)는 이미 함락하고 8백년 간 이어온 이슬람교도의 지배에서 이베리아 남부의 땅을 도로 찾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스페인왕국의 오랜 숙원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이 국토회복이 이루어져서 좋은 기회를 타서 이사벨라여왕에게 연설을 하여 스페인 왕국으로부터 재정지원에 성공한 콜럼부스는 자기 계획을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신대륙 상륙

 

1492년 8월 3일 그는 3척의 카라벨선(caravel=3개의 마스트 평탄한 선미루, 선폭은 좁고 일층 갑판을 특징으로 한 쾌속선)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출항한 것이다. 목표는 황금의 나라 지팡구(일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바다로의 대항해였다.

항해도 2개월이 지나자 그토록 사기왕성했던 승조원들의 마음에 공포와 불안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강한 연설로 일단 승조원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은 콜럼부스였지만 실제로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그 자신도 전망할 수가 없었다. 약속한 3일간 사이에 참으로 육지가 보일 것인가? 철벽같은 그의 마음에도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다.

당초에 예정한 2,400마일은 이미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도 육지는 보이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 3일 후에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게 되면 배는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패배자의 오명을 쓰게 될 것이다.

운명의 여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역시 그는 신으로부터 선택 받은 사람인 지 모른다. 꽃과 열매가 맺힌 나무 가지가 흘러왔다. 또 철새의 큰 무리가 몇 번이나 그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 중에는 육지로부터 떨어지지 않는 종류의 새들도 끼어 있었다. 모두가 육지가 가깝다는 증거이다. 그의 영감은 역시 옳았다. 그의 인생 중에서도 최고의 순간이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그 삼 일째 그것은 혈실로 나타났다. 수평선 저쪽으로 육지가 보인 것이다. 발견한 빈타호로부터 육지 발견이란 신호와 함께 축포가 몇 번 울렸다. 아침 해가 비다 위로 얼굴을 내밀 무렵 하얀 연무가 걷히자 녹음이 풍부한 해안이 확실히 보였다. 승조원은 전원 콜럼부스의 둘레에 모여들었다. 무릎을 꿇기도 하고 하늘을 우러러 양손을 비비기도 하고 서로 껴안기도 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492년 10월 12일의 일이었다.

콜럼부스는 카수치라(Kasuchira)왕국 깃발과 십자가를 들고 부하들과 함께 상륙하였다. 그는 이 땅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성스러운 구세주)라 명명하였다. 이 섬은 바하마제도의 하나였는데 콜럼부스는 지팡구 사이에 있는 섬의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상륙하자 어디선가 원주민이 나타났다. 그들은 온화한 성격으로 모두가 나체이고 금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쾌히 마중한 것은 콜럼부스 일행이 하늘에서 온 신의 사자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섬에는 유럽에서는 본 일이 없는 식물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배만큼 큰 아름다운 과실을 한 입 먹은 사람이 있었는데 먹자마자 곧 혀가 붓고 무서운 고열로 시달렸다고 한다.

다시 유럽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원주민을 본 것도 이때이다. 콜럼부스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것은 풀을 건조시켜 어떤 잎으로 만 것으로 한 쪽에 불을 붙여서 한 쪽에서 숨과 함께 연기를 체내로 마시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담배라 하고 연기가 체내로 들어가면 취한다. 스페인인 몇 사람이 이 관습에 물들었는데 내가 그치라 해도 그치려 해도 그치지 못한다고 답하였다.

탐험은 그 후에도 이어져서 그는 큐바 본토 에스파뇰라(Espanola)(스페인과 닮았다는 뜻) 도 등을 차례로 발견하였다. 그러나 3개월이나 되려는 무렵 기함인 산타마리아호가 밤중에 좌초하여 잃어버렸다. 이 때 콜럼부스는 한 번 스페인에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39명이 스페인인이 지원하여 남아서 요새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쓸모없게 된 산타마리아호는 해체하기로 하였다. 그 화물이나 목재 등은 요새 건축의 재료로 쓰기로 하였다. 그들은 다시 콜럼부스가 다시 여기로 돌아올 때에는 훌륭한 요새를 지어 있을 터였다. 남은 스페인인은 모두 죄인이었다. 그들은 은사를 기대하고 이 항해에 참가한 자들이었다.

그런 정도로 일반인들을 모집하기는 어렵고 아무에게도 위험한 탐험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이 남기로 한 이유는 본국에 돌아가면 다시 죄인 취급을 당할 것이니 부자유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고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이 신천지에 남아서 개척자가 되면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여기에는 온순한 인디오들이 있어서 식료에 부자유는 없었다. 그리고 제1의 이유는 여자에게 부자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운명에 되돌아오게 되었다.

 

콜럼부스의 일시 귀국과 영예

 

콜럼부스는 귀국할 때는 갈 때는 왔던 길과 다른 북쪽으로 진로를 취하였다. 그것은 그의 계산착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연히도 가장 빠른 귀국길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거기서는 유럽 쪽으로 향하여 강한 편서풍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풍파를 만나기도 하였지만 3월 15일에는 파로스(Paros)항에 돌아올 수가 있었다. 8월 3일에 출항하여 7개월 반 만이었다.

콜럼부스의 신항로 발견 뉴스는 유럽을 뒤흔들었다, 파로스항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를 한눈이라도 보려고 산처럼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온 고을이 모두 나서서 마중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궁정이 있는 바르셀로나(Barcelona)까지 수 킬로의 길을 개선 행진한 것이다. 길 양쪽에 서있는 사람들로부터 축복과 대환성이 울려 퍼진다. 길에는 꽃비가 내렸다. 이것은 전대미문의 화려한 파레이드였다. 그리고 카수치라와 아라곤의 왕과 여왕 앞에서 알현을 허락받은 그는 거기서 귀족 칭호와 대양 제독의 칭호를 받은 것이었다. 그 순간 이 모험가는 일약 국민적 영웅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그는 궁정 만찬회 석상에서 원주민으로부터 받은 황금의 가면과 약간의 장신구를 내놓고 신세계가 얼마나 풍부하고 눈부시게 하는 아름다운 땅이라는 것을 싫건 어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림도 없는 과장이었다. 사실은 황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향신료 등은 거의 전무였다. 그런데 섬은 울창한 정글로 덮여있어서 한 발 내디디면 독사와 독충이 그 속에서 우글우글하였다.

콜럼부스가 이처럼 사실과 동떨어지게 과장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항해할 때에도 의식적으로 거리를 작게 하여 승조원에게 거짓 항행거리를 신고하고 있는데 그것은 미지의 해역에 들어갔으므로 승조원이 패닉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는 꿈과 낭만을 쫓는 듯하면서도 현실가이기도 하였다. 거짓말도 방편이라고 하지만 사실을 그대로 알리고 있으면 재정 지원 등은 받을 수 없고 또 항해에는 옛날에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대탐험대 파견과 원주민 학살

 

그의 공적에 따라 스페인의 전도에는 신대륙의 거만의 부를 혼자서 차지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것을 완전한 것으로 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탐험대를 보낼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막대한 비용을 들인 제2차 탐험대는 17척의 선단, 다수의 가축, 병사, 목수, 농민 등 2천 명이 넘는 큰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반년 후 1543년 9월 25일 서둘러서 출항하였다. 그들은 1개월 정도 항해한 후 에스파뇰라도에 도착한다. 제1회와는 달리 편한 항해였다. 여기에는 요새를 건설하기 위하여 39명이 남아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바닷가에 상륙하여도 축복의 종소리도 축포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파도소리만 허무하게 드릴 뿐이었다.

이윽고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39명의 스페인인 전부는 원주민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콜럼부스가 본국으로 향해서 출항한 3개월째에 일어난 일이었다. 스페인인들은 욕망으로 원주민 여성에 손을 대었다. 이 일로 화가 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려할 것은 섬에는 세상에서 무서워하는 식인종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 만난 온화한 원주민과는 달리 그들은 카니바(Canniba)족이라 불리는 무서운 족속이었다. 콜럼부스는 카니바족의 한 집에서 남자의 생머리를 냄비에 넣어서 삶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몸서리치는 기록을 상세히 남기고 있다.

<그들에게 말하자면 인간처럼 맛좋은 것은 이 세상에는 없다. 붙잡혀 온 인간은 산 채로 고기 집에 넘겨지는데 사체인 경우는 그 현장에서 먹어버린다. 그들은 포로인 여성에게 아이를 낳게 하고 아이는 낳자마자 거세하여 노예로 쓴다. 또 살리는 하나의 이유는 자라면 잡아서 먹기 위해서이다. 곧 그들은 식용 인간으로 살려두고 있는 것이다.

<카니바족은 그 때가 올 것을 즐거움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인육은 매우 맛이 좋아서 그 증거로서 다듬어 남은 인골이 구르고 있다. 아이들도 여성도 열중하여 인육이나 내장을 먹는 광경을 보면 토기가 난다.>

카니바족이란 가리브에 사는 식인종인데, 오늘 날 카니바리즘(Cannibalism/人肉嗜食)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다.

그러나 본격적 식민이라고 생각했던 이번에도 잘 나아가지 않았다. 처음에 온화하여 다루기 좋을 것으로 생각했던 원주민도 힘으로 지배해야 하고 원주민은 원주민으로 인해전술인 스페인인에게 대항하려 하였다.

 

결과는 수개월 안에 10만 명 이상이 살해당하였다. 게다가 섬들을 돌며 탐색하여도 황금이나 향신료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고서는 스페인 본국에서 가져온 막대한 식료에 대한 구실도 되지 않는다. 뿐 아니라 식민지를 운영할 경비 곧 급료마저 낼 수 없게 되었다.

 

콜럼부스의 강제 송환과 몰락

 

결국 4년간의 통치의 결과를 내지 못한 콜럼부스는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로 본국으로 송환 당하게 되었다. 항해의 위험에 더해서 식민지 운영의 실패 황금이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초조함 때문인지 스페인에 닿을 무렵에는 병자처럼 되어버렸다. 하루만 늦었어도 살릴 수 없었는데 다행히 반년 가까이 해서 병은 나았다.

그 후 그때까지 얻은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한 그는 자신이 고생해서 발견한 섬에 다시 가서는 안 된다는 조건으로 최후의 항해에 나섰다. 생각해 보면 산타마리아호에 타서 출항한 이래 10년이 경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콜럼부스는 최후의 항해에서 중앙아메리카를 발견한다. 그는 그곳을 최후까지 동양의 말레이반도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이윽고 원주민으로부터 대서양보다 넓은 바다가 곧 태평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콜럼부스의 신항로 발견은 이후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신항로가 발견되어 신대륙의 존재가 밝혀지자 구대륙에서 입식자가 몰리게 되었다. 성서를 가진 선교사, 농민, 여러 종류의 직업을 가진 자 무기를 가진 군인 등 그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져서 수많은 인간이 살해되고 노예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멕시코 반도에 3천 명 정도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겨우 20년도 되지 않아서 10분의 1로 감소했다. 작은 섬에서는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유럽에서 들어온 천연두와 스페인인에 의한 학살이 원인이다. 원주민은 붙잡히면 노예로서 가혹한 중노동에 사역되었고 금이나 보석을 파내기 위하여 광산에서 일한 노예들은 겨우 2년 정도로 사망했다고 한다.

농원에서 일한 사람은 행운이었으나 그것도 7년 이상은 살지 못하였다. 반세기가 되지 못한 사이에 마야(Maya), 아스테카(Azteca), 잉카(Inca) 등의 고도의 문명이 모르는 새에 멸망하고 주민은 학살된 것이다.

결국 콜럼부스가 신세계에 가져온 것은 무서운 전염병과 대학살이었다. 한편 유럽에도 무서운 전염병이 신대륙에서 유입되었다 매독이나 페스트는 큰 재앙을 가져왔다.

이리하여 콜럼부스를 잔인한 제국주의의 첨병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콜럼부스의 신항로 발견이 아니더라도 신대륙의 발견은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콜럼부스처럼 영광과 나락을 동시에 맛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절정기에는 대제독이라고도 했고 명성과 부를 마음대로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되고 수년 후에는 급전직하로 반역죄로 쇠고랑을 차는 수인이 되기도 하였다.

 

콜럼부스의 죽음

 

콜럼부스가 죽기 직전에 자리에 누워있는 상태일 때에 모르는 젊은이가 가까이 다가갔다고 하는 일화가 남아있다. 그 젊은이는 콜럼부스 곁에 가자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고 말하였다.

<아무쪼록 이 나에게 당신의 손을 만지게 해주세요. 크리스토퍼 콜럼부스여--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분 그리고 대양의 참 제독, 당신의 손을 나는 만지고 싶어요.>

젊은이는 울면서 콜럼부스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그는 젊은이에게 눈을 돌리고 그리고 무엇인가 말을 속삭였다. 콜럼부스가 이 젊은이에게 무엇이라고 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그는 1506년 5월 20일 스페인의 발라돌리드(Valladolid)에서 사망했다. 그 유골은 세비리아(Sevilla)의 수도원에 묻혔으나 1542년에 센트 도미닝고(Santo Domingo) 대성당으로 옮겼다. 센트 도미닝고 대성당 지하에 있는 콜럼부스의 묘비명에는 <빛나는 유명한 신사. 돈 크리스토파 콜럼부스>라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