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성스러운 목적으로 행해진 신의 원정군이 본 것은
미화된 십자군의 검과 방패
십자군 원정 배경과 개시
11세기가 끝나갈 무렵 예루살렘은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동방무역의 독점을 노리는 셀주크 터키(Seljuk Turky)는 성지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 기독교도에게 박해를 가하고 이 땅에서 쫓아낼 계획이었다. 결국 이것으로 사실상 기독교도들의 성지 순례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동로마제국 영토 깊숙이 침공한 셀주크 터키는 단기간 내에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슬람교도의 집요한 공격에 일각도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 동로마제국은 서방 로마교회에 원군을 요청했다. 우려하고 있던 교황청은 그 대책으로서 유럽 제후들 유지를 모아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고 계획했다.
<연대기>에서는 말하기를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Urbanus 1042~1099) 2세는 클레르몽(clermont)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추기경, 사제, 귀족 등 최고 간부급 고위 성직자가 모였다. 그 수는 300명 정도이다. 교회 주위에는 수많은 민중이 둘러싸여 일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교회 행사 후 우르바누스2세 교황은 문밖으로 나와서 모든 사람들이 시선이 집중을 받으며 소리 높여 연설을 하기 시작하였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나는 오늘 하느님의 말씀을 대변하여 성스러운 권고를 하기 위하여 여기에 나왔다. 동방의 터키인들이 우리 성지 예루살렘에 침입하여 무한한 악덕을 행하였다. 많은 교회가 불태워졌고, 사람들은 살해되고, 부인은 능욕당하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이교도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우르바누수2세는 여기까지 한 숨에 말하고 단 위에서 조용히 청중을 바라보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매하며 위풍당당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대단한 웅변가로서 소리는 깊이가 있는 저음이었다. 그런 것만으로도 충분히 청중을 매료시켰다.
우르바누스2세는 하늘을 우러러보고는 소리 높여 다시 연설을 계속하였다.
“나는 제군들에게 하느님의 휴전을 권한다. 이제 곧 모든 기독교도끼리의 사적인 투쟁을 중지하라. 결단의 때가 마침내 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라는 듯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힘을 집결시켜 십자가를 들고 일어나서 동방의 우리들 형제를 구하고 성지 탈환을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싸울 때이다. 짐승 같은 악한 자들에게 복수하고 성스러운 영토를 탈환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사명이다. 하느님의 마음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회장은 박수로 깨질 것 같았다. 청중 가운데는 일어나서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다.”하고 단상으로 달리는 자도 있었다. 전적으로 흥분상태였다. 이윽고 성가로 바뀌었다. 이 이상하다고 할 분위기 속에 제1회원정군이 순간 승인되었다. 이어서 총사령관이나 그 후의 일정 등이 차례차례로 발표되었다. 모든 사람은 외투를 잘라서 기다란 십자 모양을 몸에 붙였다. 성가는 폭풍처럼 울려 퍼졌다. 열광적 흥분상태는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1095년 11월 흐린 날의 일이었다.
이것은 사실로서 유명한 클레르몽 종교회의 모습이다. 이 날을 경계로 서구세계와 이슬람세계는 200년간에 걸친 전면 종교전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곧 다른 두 개의 가치관이 불꽃을 튀기며 부닥치는 것이다. 그 사이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8회의 대원정군이 조직되고 있다.
이 당시 중세 사람들의 마음에는 십자군에 빼앗겨 있었다. 매우 야만적인 이교도로부터 신성한 영토를 해방한다는 시나리오는 낭만과 정열을 날리는 요소였다. 사람들은 이 성전에 마음이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했는가? 이 성전이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실제 십자군은 어떠했는가?
민중 십자군
기록에 의하면 제1회 십자군이 출발하기 이전 1095년에 민중만으로 뛰어든 일부대가 있었다. 곧 정규 십자군의 선발대라고도 할 수 있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민중 십자군이다. 이 민중을 선동한 것은 아미안의 베드로(Peter of Amiens)라는 광신적인 수도사로 제멋대로 뻗은 수염으로 일견 고대의 예언자풍의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입에서 나오는 말은 청산유수인 인물이었다.
청중은 이 카리스마적인 광언에 말려들었다. 농민들은 농구를 버리고 가질 것도 제대로 가지지 않은 채로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그 수는 실로 10만 명이나 되고 그 민중들 속에는 어린 아이나 부인 등 가족을 데리고 있는 자도 있었다. 아무튼 계획도 준비도 규율도 없는 오합지졸의 십자군이었다.
처음에는 정열 하나로 뛰어든 그들도 곧 피폐하고 불쌍한 아이들은 도중에 들르는 소도시마다 여기가 예루살렘인가요? 여기가 성지인가요? 하고 가련한 소리로 부모에게 묻기만 하였다. 소아시아까지 닿을 무렵에는 사기도 떨어지고 굶주림과 병, 피로 등으로 비참한 상태가 되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다. 게다가 터키의 습격으로 다수의 사람들은 살해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이에 이르자 민중 십자군은 거의 전멸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는 뒤에 출발한 정규군과 합류하여 예루살렘 공격까지 참가했는데 너무나 처참한 전투를 보고 모두는 공포에 질려 도망하고 말았다.
그들이 본 것은 성전과는 아득히 먼 처참한 살육이었다. 십자군은 괴물처럼 생각되는 잔학행위를 이르는 곳마다에서 발휘하였다. 공성전에서는 토벌하여 취한 적의 목을 포탄 대신으로 상대편에 쏘아댔다. 포로를 산 채로 포탄에 잡아매어 사출기에서 내던졌다.
양식이 다하면 죽인 상대의 고기를 가늘게 썰어서 요리하여 먹었다.
프랑크(프랑스) 연대 기자 라우르 그라벨(Raol Glaber ?`-1050)의 연대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른의 살은 얇게 오려서 냄비에 넣고 어린이의 살은 곶이에 꽂아 구워서 먹었다. 인육은 공작의 고기에 약맛을 더한 것 같은 맛으로 매우 맛이 좋았다.>
그는 이렇게도 기록하고 있다.
<프랑크왕국에 통하는 자는 누구나 그들을 짐승으로 간주한다. 유럽 사람들은 용기와 싸움의 열의에는 뛰어나지만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동물이 힘과 공격성으로 뛰어난 것과 같다.>
또 프랑스의 어느 성직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지 예루살렘의 대로나 광장에는 아랍 사람의 머리나 팔, 다리가 높이 쌓여 있었다. 마치 피의 바다이다. 그러나 당연한 보복이다. 오랜 동안 마음껏 모독을 하며 아랍 사람들이 더럽힌 성지를 그들의 피로 물들이는 것을 허락한 하느님의 재제는 정당하고 상찬할 만하다.>
이처럼 상대가 이교도라면 이미 인간으로는 보지 않고 이처럼 무서운 행위를 태연히 자행하기도 하였다.
전쟁 경험이 없는 서민이 실전을 알고 무서워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 도망집단 속에 일찍이 재빨리 선두로 달아나는 불쌍한 은자야 말로 이 원인을 만든 장본인 아미안의 베드로였다고 하니 어느 세상에나 선동자에게 이끌린 집단은 최후에는 비참한 운명에 처하는 것 같다.
제1회 십자군 (1096년~1099년) -교황 우르바누스 1세 제창
제후들로 구성된 정규십자군의 발자취는 어떠했는가?
그들은 4대로 나누어 해로로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였다. 그 군세는 5만, 프랑스인, 독일인, 시칠리아인, 노루만인 등 여러 민족으로 성립된 말하자면 다국적군 같은 것이었다.
전사의 전투
십자군은 그 후 약 1년에 걸쳐 소아시아를 전전하고 에데싸(Edessa), 안티오크(Antioch), 트리폴리(Tripoli) 등의
주요도시를 차례차례로 함락하였다.
출발하여 3년 후 예루살렘까지 도달한 그들은 주도한 준비 후에 공격으로 옮았다. 예루살렘은 약 5주간은 견디었으나 함락되고 십자군 병사는 성벽을 깨고 눈사태처럼 침입하였다. 8만에 이르는 이교도들을 철저히 모두 살해하였다.
이리하여 제1회 십자군은 터키인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최초의 목표를 달성한 것이었다.
이 때 이래 십자군 병사는 상상을 더하여 필요 이상으로 미화되었다. 빛나는 갑주로 몸을 싸고 준마를 탄 기사라든지 빛나는 창끝에 휘날리는 십자의 깃발이라는 기사도의 견본 같은 이미지이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동떨어지다. 빛나는 갑주를 입은 병사는 하나도 없었고 당시의 기사는 아마에 쇠고리를 단 조잡한 갑주이며 거친 도끼에 이빨이 빠진 것 같은 창을 가진 것에 불과하였다. 또 타고 있는 말도 준마이기는커녕 태마들뿐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풀에 집결한 십자군을 본 동로마제국 황제 알렉시오스(Alexios 1048~1118)는 품격도 아무 것도 없는 유랑자가 도둑의 무리 같은 몸차림으로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고 한다.
한편 시골때기인 그들로서는 콘스탄티노풀의 대도시는 보이는 것 모두가 신선하고 호화한 건물, 모자이크와 대리석, 보석으로 장식된 궁전 등 서방에는 없을 것 같은 아름다운 건물에 망연하였다.
예절의 견본에서 아득히 먼 듯이 생각된 그들 십자군은 실제 대도시에 입성하자마자 각지에서 약탈이나 절도 등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마음대로 자행했다.
공포를 느낀 알렉시오스황제는 십자군의 모든 지휘관을 불러 모아 새롭게 동맹을 맹세하는 문서를 작성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원군을 요청한 동로마측도 도착한 십자군에 감사할 뿐 아니라 차차 그들을 이용할 만한 행위가 눈에 띄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십자군 공격으로 함락 직전의 요새에서 은밀하게 터키 측과 이야기를 열어서 자기네 군대를 들여보내어 십자군에는 여기는 좋으니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말하는 처지였다. 곧 공은 그들이 취하고 적은 적으로 난폭한 십자군의 군문에 들어가서 유린당하기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생각한 것일 것이다.
길이 막힌 동로마제국으로서는 성전이라는 생각은 원래 없었던 것이다. 실은 동로마 측의 요청으로서는 소수의 용병을 원군으로 하여 보내주었으면 하는 정도인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수만으로 헤아리는 대규모의 원정부대였으므로 동로마제국으로서는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것도 민간인이 주류인 것도 있고 정규인 것도 있어서 게다가 이 굉장한 원정군은 그 후 장기간에 걸쳐 몇 번이나 파견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없어 동로마제국으로서는 분명히 곤란한 표정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서방에서 대규모의 원정군을 보내주어서 당연히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이것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실은 클레르몽에서 연설한 우르바누스2세가 자신의 주관을 가지지 않고 허풍스럽게 민중을 선동하여 위기감의 쌓이게 하여 성전 분위기를 연출한 결과인 것이었다. 이 무렵 서방세계는 절대적으로 영지가 부족하여 만성적인 식량 위기를 맞고 봉건제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주들은 자기의 영지를 조금이라고 증대시키려고 싸움에 날이 새고 지는 참이었다. 사람들의 생활은 매우 황폐해지고 전쟁이나 대기근이나 역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교회에 헌금액은 매년 계속 감소하였다. 영주도 귀족도 성직자도 시급히 새로운 토지와 부가 필요했다.
이런 시대배경이 유명한 클레르몽 명연설로 이어진 것이었다. 거짓말도 하나의 방편이 되어서 봉건영주끼리의 무의미한 투쟁을 이교도에게로 돌릴 수 있고 정의를 위한 해방전쟁이라는 대의명분도 되었다. 광대한 토지와 부를 획득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성직자들은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십자군 총사령관은 교황의 대리라고 정해지고 원정에 참가하는 것도 교회의 허가가 필요하고 무엇을 하거나 교회의 권위가 우선된 것이었다.
물론 정복한 토지는 로마교회 것이 된다. 로마 교회로서는 분파한 동측의 그리스정교의 영역까지 자기의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서방의 의도가 보였기 때문에 동로마로서는 쾌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향은 그 후 십자군 행동에 단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제1회 십자군이 가장 좋았고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목적도 이루었고 사기도 높았었다. 그러나 이후 차출된 십자군은 하느님의 원정군이라 하기에는 거리가 멀고 그 질도 저하되었다. 결국 십자군은 당초의 목적마저 이룰 수가 없었다. 일시적으로 성지를 탈환하여도 곧 이슬람교의 지배 하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런 때문에 몇 번이나 십자군을 편성하여 파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같았다.
제1회 십자군에 의하여 예루살렘은 당분간은 기독교도의 손에 있었다. 그러나 50년 정도가 지나면 그 때 만든 기독교의 전진 기지의 하나인 에데싸(Edessa)가 터키인의 공격으로 함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이 지방 이슬람교의 영주 센지가 분열하여 원기가 없는 이슬람교도들에게 화를 내어 사기를 고무하려고 하여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기독교도 입장에서는 가까운 시기에 이슬람교도의 침공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으로 발전하여 심각한 위협으로 비치었다.
제2회십자군(1147년~1148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 주창
성직자 베르나르(Bernard)는 재차 이슬람교도 토벌을 호소하여 이에 제2회 십자군이 편성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십자군은 인수가 모이기는 하여도 복수의 지휘관이 이끄는 부대는 통일 행동을 취할 수가 없어서 소아시아까지 가기는 하여도 함락당한 에데싸를 탈환하지는 못하였다. 거꾸로 다마스카스공략에서는 비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결국 이 십자군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2년이 채 되지 않아서 해산하는 운명이었다.
제3회 십자군(1189년~119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8세 주창
제3회의 십자군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Saladin)이 성전이라고 주장하여 예루살렘을 공략하여 함락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서 행해졌다. 3인의 유력한 지도자가 나서서 이 십자군을 지휘하기로 되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Fridrich 1123~1190)1세, 프랑스의 필립(Philippe 1165~1223))2세 그리고 잉글랜드의 리차드(Richard 1157~1199)이다.
상당한 왕들에게 이끌린 십자군이라고 생각되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대단한 성과도 내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총사령관이었던 프리드리히1세는 소아시아의 산간부의 강에서 목욕을 하다가 익사하였고 필립은 리차드와 사이가 좋지 않아 병을 이유로 일찍이 프랑스로 귀국하고 말았다.
결국 남은 리차드는 살라딘과의 대화에서 거래를 하였는데 그 결과 기독교도의 영토는 해안선을 따라 좁고 긴 지대만 차지하게 되었고 대폭 줄었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 앞에 나타날 수도 없이 적당히 다루어지고 말았다.
제4회 십자군(1202년~1204년) -교황 인노겐티우스 3세 주창
심한 이야기로 성지 탈환에 향한다는 것이라기보다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하고 동로마의 수도는 함락되고 성스러운 원정군에게는 있을 수 없는 나쁜 일을 저질렀다.
그것은 동로마측이 용병으로서의 약속한 보수를 지불하지 않은데서 화를 냈다는 이유에 의한 것으로 십자군 병사는 화가 난 채로 콘스탄티노플에 난입하여 사람을 학살하고 그 안에 있는 것을 파괴하고 약탈하였다.
이러고서는 신성한 십자군이라고 하기보다 산적이나 악당 집단이라고 말하는 것이 알맞다.
이 십자군 파견을 억지로 설득한 교황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1161~1216)3세는 이 폭주를 막지 못하고 완전히 면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에 이르러 서방 로마교회는 동방 그리스 정교회의 별로 신통치 않은 신뢰마저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었다.
어린이 십자군
이 십자군이 일으킨 파렴치한 소란도 가라앉지 않은 무렵 이번에는 어린이 십자군이라 불리는 소년 소녀만의 십자군이 일어났다. 어른들이 거듭되는 추태에 실망한 소년들 마음이 이런 소박하고 순수한 모양이 된 것이다. 주창한 것은 12세의 목동으로 이 소년은 어느 날 양을 돌보고 있었는데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의 주창으로 프랑스 전토에서 많은 소년소녀가 모여들었다. 그 수는 3만 남짓이다. 그들의 대다수는 신앙심 때문에 집을 나온 자가 많았다. 2 개월에 걸쳐서 그들은 해안부의 도시를 목표로 여행을 하였다. 도중의 숙박과 식사는 어른들이 베풀어주었다.
그러나 이 순수한 소년소녀들에게는 이 이상이 없는 비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세이유에 모인 그들은 모세가 홍해를 건너듯이 지중해를 건널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바람도 잔잔하고 바다가 거칠어지는 일도 없었고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은 낙심하여 해산했으나 그 때 소년들을 운반해주겠다는 친절한 선주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선주는 부정한 생각을 가진 노예상인이었다. 그들은 소년들을 속여서 배에 태우자 좁고 어두운 선창에 유폐시키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이집트에 도착하자 모두 노예로서 팔아버렸다.
이 해에 독일에서도 2만 명 정도의 소년소녀만의 십자군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이탈리아까지 간 것은 좋았으나 거기서부터 2진 3진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웃음거리가 되고 해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소년들에게 베풀어 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 후에도 몇 회인가 십자군이 조직되고 있는데 이름만 십자군이지 그 실체는 이익에 눈이 어두운 도적 무리와 같은 것이었다.(제5~9회 십자군=제 5회 십자군 1218년 1221년까지, 제6회 십자군 1228년~1229년까지, 제 7회 십자군 1248년~1249년까지, 제8회 1270년에, 제9회 1271년~1272년까지 십자군 활동이 있었다.)
십자군의 영향
최후의 십자군이 끝났을 때 사람들의 입에서는 낭만이란 하나도 없고 중세의 봉건제도 그 자체도 종언의 시대를 만나게 되었다. 십자군이 가져온 것은 봉건제도의 붕괴를 촉진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환멸과 혼란 피로감을 심을 뿐이었다. 결국 십자군이 중세 사회에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십자군 원정으로 자산이 감축된 제후들은 자유를 부여한다는 교환조건으로 농민으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었다. 자유를 얻은 농민들은 도시로 유입되어 도시는 거대화하였다. 이리하여 노동과 물물교환을 주류로 하는 장원은 성립되지 않고 화폐중심의 경제로 변화하여갔다. 그것은 르네상스로 이행하는 준비단계라고도 할 수 있다.
우르바누스2세의 명연설로 민중의 감정에 불이 붙어서 일어난 십자군은 사람들의 신앙심과 집단 히스테리가 결합한 것 같은 일이었다. 이런 현상은 세계사 중에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과거의 역사는 이런 인간의 음적 부분이 유발되어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사란 싫은 일들이 쌓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십자가는 기독교도로서는 신성의 싱징이지만 이슬람교도로서는 약탈과 학살의 피비린내 나는 상징으로밖에 비쳐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나 기독교도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이런 당시 전 세계가 십자군에 정신이 팔리고 있는 사이에 그들의 아득히 먼 변경에서는 역사의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세계사를 바꾸는 공전의 민족 대학살의 시나리오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징기스칸이 이끄는 군단이 눈사태처럼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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