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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폭군 네로와 악녀인 그의 어머니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0. 2. 25. 05:38

 

폭군 네로와 악녀인 그의 어머니 이야기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가계와 비극

 

고대 로마의 잔인한 악녀로서 이름 높고 폭군 <네로>의 어머니이기도 한 <아그리피나(Agrippina)(소 아구리피나)는 <아우구스트스제>(로마 초대 황제))의 증손녀이고 제3대 로마 황제 <가리구라>의 누이 동생이다. 서기 15년 11월 6일 아버지 <게루마니구스>(제2대황제 티베리우스의 조카)가 <가리아> 지방 원정 중 동행한 어머니 <아그리피나(대 아그리피나)>가 라인강 하반 <고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라는 고을(현재 게룬)에서 그녀를 낳았다.

아버지 <게루마니구스>는 장래의 황제가 될 사람으로 인정된 인물이었다. 그런데 <아그리피나>가 4세 때인 서기 19년에 그녀의 아버지는 급사했다. <게루마니구스>의 처 곧 <아그리피나>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대 아그리피나)>는 당시 황제 <티베리우스(시저)>를 살해자라 믿고 미워했다.

이윽고 <티베리우스>의 측근의 음모로 <아그리피나>의 어머니나 오빠들이 이어서 국가 반역죄로 유형당하고 투옥되었다가 옥사하였다.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복잡한 결혼 생활

 

<아그리피나>가 13세 때인 서기 28년 예쁜 처녀가 된 <아그리피나>는 첫 번째 결혼을 하였다. 상대는 황제 계승자 1위인 <아헤노바르프스>(어머니는 대 안토니오=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로 그 아들이었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이 결혼을 주선했고 신랑 신부는 축복을 받았다.

 

아그리피나의 흉상

 

<아그리피나>가 22세 때인 서기 37년 <아헤노바르프스>와 <아그리피나> 사이에 아들을 낳았다. 이름은 <루기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프스>(후 5대 황제 네로)였다. <네로> 출산 전후에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사거했다. 그래서 제3대 황제로 <아그리피나>의 오빠 <가리구라>가 즉위했다. 그녀는 결혼을 하고 있었으나 친오빠인 <가리구라>하고는 근친상간 관계였다. 그러나 남편인 <아헤노바르프스> 사후에 <아그리피나>는 <가리구라>제와 소원해져서 한때 음모 간통혐의로 유형당하고 있었다.

<아그리피나>가 26세 때인 서기 41년에 <가리구라>제가 암살당하였다. 그래서 <구라우디우스(아그리피나의 아버지 게루마니구스의 동생)가 제4대 황제로 즉위했다. <아그리피나>는 유형지에서 석방되어 유복한 원로원 의원인 <사루디우스>와 두 번째 혼인을 하였다. 그 남편은 일찍 죽었는데 두 번째 결혼으로 그녀는 남편의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었다.

 

황후가 된 어머니 <아그리피나>

 

<아그리피나>가 34세 때인 서기49년 <아그리피나>는 <구라우디우스>제의 세 번째 아내 <멧사리나>가 방탕하여 자진을 명받아 죽자 황제의 신임이 두터운 해방 노예 <밧라스>의 도움으로 새로운 비로 추천을 받았다. 그리하여 <아그리피나>는 <구라우디우스제(아그리피나의 숙부)>와 결혼하여 황제의 비가 되었다. 당시 숙부와 조카와의 결혼은 로마법으로는 허용되지 않았으나 법률을 개정하여 결혼한 것이었다.

<아그리피나>가 35세 때인 서기 50년 황후가 된 <아그리피나>는 데리고 온 아들 <루기우스 도미티우스 아에노바르프스(네로)를 제4대 황제 <구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모친은 멧사리나)>와 약혼시켜 황제의 양자(황태자)로 하였다. 네로가 12세인 때였다.

아기 <네로>는 <발이 먼저 태내에서 나와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에 고명한 점성학자는 <이 아기는 황제가 되어서 어머니를 죽일 것이다.>고 예언을 하였다. 야심가인 <아그리피나>는 <황제가 되기만 하면 죽임을 당하여도 좋다.>(박물학자 브리니우스)하고 소리쳤다 한다. 이 불길한 예언은 이윽고 사실이 되었다. 또 <네로>가 3세 때에 시칠리아의 총독이었던 아버지 <아헤노바르브스>가 현지에서 죽었다. 아버지 <아헤노바르브스>는 <나와 <아그리피나> 사이에 낳은 아들은 한 괴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네로>는 원래 황제가 아니라 시인이거나 예술가가 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제4대 황제 <구라우디우스>는 어둡고 어리석으며 허약하고 술꾼이고 먹보로서 쓸개 빠진 남자였다. 그래도 그에게는 묘한 재능이 있었다. 역사학을 애호하고 <에토리루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황제로서는 유능한 정책가로서 큰 공적을 남겼으나 남편으로서는 그다지 위엄이 없고 다시 아내의 행동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때문에 <아그리피아>는 34세에 황후가 되자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녀는 자진하여 국정에 간섭하고 원로원 회의에도 출석하였다. 그녀의 초상화를 조각한 화폐가 주조되어 각 지방에서는 그녀와 비슷한 모습을 신처럼 숭상하였다. 또 그녀의 질투심과 잔혹성은 남편 <구라우디우스제>의 세 번째 아내 <멧사리나>를 능가하는 비정한 것이었다.

 

네로시대의 동전

 

황제가 어느 날 한 부인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하므로 황후 <아그리피나>는 그 귀부인을 이튿날 궁정에서 추방하였다. 또 황제쟁탈전 상대였던 귀부인이 처형되었을 때 <아그리피나>는 잘린 목을 눈앞에 가져 오도록 하여 본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한편 그녀의 대야심 곧 아들 <네로>를 황제가 되도록 여러 가지로 손을 썼다. 당시 <고르시카>에 유배되었던 고명한 철학자 <세네카>를 로마로 불러 들여서 젊은 <네로>의 측근으로 등용하였다. 또 <브르루스>(후 근위군단장관)을 <네로>의 측근으로 발탁하였다. 이리하여 차기 황제의 어머니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얻은 <아그리피나>였다. 그런데 <구라우디우스제>는 세 번째 아내 <멧사리나> 사이에 일남일녀를 낳고 있었다. 딸 <옥타비아>와 아들 <브리타니구스>로 황제 <구라우디우스>로서는 황후 <아그리피나>의 아들 <네로>는 전혀 타인의 아들이었다. 여기에 그녀의 장래에 대하여 큰 불안이었던 것이다.

이 무렵 황제 <구라우디우스>는 <아그리피나>와 결혼하여 <네로>를 양자(황태자)로 삼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내 <멧사리나>에게서 낳은 아들 <브리타니구스>를 후계자로 지명할 것을 꾀하고 있었다. 이를 안 황후 <아그리피나>는 남편인 황제를 독살하기로 결심하였다.

 

<네로>의 황제 등극과 횡포

 

                                                                                       

                                                                                                네로의 흉상

 

<아그리피나>가 39세 때인 54년 궁중에서 황제의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황제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버섯요리를 먹고 죽었다. <아그리피나>의 계획에 의한 독살이었다.

이리하여 <네로>의 어머니가 기대한 대로 <네로>는 제5대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 16세인 <네로>황제는 즉위 이후 5년간은 근위군단장관 <브르루스>나 철학자 <세네카>의 후견을 얻어서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젊은 <네로>는 경쟁 상대인 전 황제 <구라우디우스>의 친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불신하고 의혹의 눈을 밝혔다. 그리고 황태후인 <아그리피나>의 후견이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네로>는 억센 어머니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윽고 <네로>는 밤놀이에 눈을 뜨고 악우와 함께 술집에서 떠들고 밤거리에서 공갈, 폭행, 절도 등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서 새벽에는 얼굴에 상처를 입은 채로 돌아가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2대 후에 황제가 된 <오도>는 이 무렵의 악우이다. 당시 네로는 해방노예인 <아구데>라는 여자에게 빠져있었다. <구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한 <네로>인데 두 사람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런데 신분이 낮은 노예와 스캔들이 소문이 나서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화를 내었다.

자신의 혈통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고 있던 <아그리피나>는 격하게 <네로>를 비난했다. 그러나 <아구데>에게 빠진 <네로>에게는 어머니의 말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젊은 황제 <네로>가 어머니를 성내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황태후의 총신인 <브르루스>를 추방해버린 것이다. 황태후의 공연한 애인인 <브르루스>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므로 마음먹고 그를 공직에서 추방하였다. 이에 화가 난 <아그리피나>는 젊은 황제 <네로>의 면전에서

<너는 황제의 자격이 없다. <브리타니구스>야말로 정통 황제 계승자이다.>하고 아들을 탄핵하였다. 이에 황제 <네로>는 어머니와 <브리타니구스>와의 연대에 위기감을 느껴서 <아그리피나>와 <브리타니구스>를 죽일 생각을 하게 되었다.

<브리타니구스>는 어려서부터 간질을 앓았다. 그래서 자주 의식을 잃는 일이 있었다.

<아그리피나>가 40세 때인 서기 55년 17세인 황제 <네로>는 연회석상에서 독물로 움직일 수 없는 <브리타니구스>에 대하여 <간질병의 발작이겠지. 그는 어려서부터 언제나 이렇단 말이야. 큰일은 없을 것이다.> 하고 돌보지 않고 죽는 대로 내버렸다. <브리타니구스>가 독살 되었다는 소식은 하루 사이에 시중에 퍼졌다. 이에 황태후 <아그리피나>는 아들인 황제 <네로>의 권력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황제가 어머니와 함께 가마를 타고 갈 때에는 언제나 모자상간의 음욕에 빠지고 그 증거로서 옷에는 물이 들었다.>(역사가 수에토니우스)

<아그리피나>는 이렇게 하여 황제 <네로>를 회유하여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17세인 황제 <네로>는 어머니의 중압을 피하기 위하여 그녀를 <파라디누스> 언덕의 궁전에서 멀리 내쫓고 말았다.

정치 무대에서 퇴출당한 황태후 <아그리피나>의 집에는 황제 <네로>의 지배체제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불평분자들의 집회소가 되었다. 황제 <네로>에게서 냉대를 받고 있던 <네로>의 비이고 전 황제 <구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도 항상 이집에 있었다.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살해

 

황제로서 독립심이 싹트기 시작한 21세의 황제 <네로>이지만 병적으로 겁쟁이였던 그는 어머니를 살해할 만큼의 결심은 서지 않았다. 그런데 황제 <네로>의 측근 중에는 꽤 강경한 의견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 한 사람은 <네로>의 학문상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세네카>로 온후한 철학자에게는 야심가인 <아그리피나>의 하는 행동이 미워졌다. 또 한 사람은 황제 <네로>의 후처가 된 <포바에아>였다. 요염한 미녀 <포바에아>에게는 아무튼 황후의 지위에 앉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런 때문에 황태후 <아그리피나>의 존재가 무엇보다도 방해가 되었다. 이래서 황제 <네로>는 어머니를 살해하기로 발을 내디뎠다.

<아그리피나>가 44세 때인 서기 59년 황제 <네로>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함께 <나포리>에 여행을 하여 근교의 <바이에아> 별장에서 어머니를 대접했다. 그러고 귀로에 <아그리피나>는 황제가 준비한 호화선으로 돌아오기로 하였는데 그 호화선이 도중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황제 <네로>는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익사시키려 하였는데 <아그리피나>는 수영을 잘 했기 때문에 살아나서 살해 계획은 실패했다. <아그리피나>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사자를 황제<네로>에게 파견하였다. 그런데 황제 <네로>는 사자가 단검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황태후가 자객을 보낸 것이라고 죄를 뒤집어씌워서 황제 암살 용의로 황태후는 황제가 모낸 근위병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살해될 때에 근위병을 향하여 황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는 <배를 찌르는 것이 좋다. 황제는 여기서 태어났으니까.> 하고 소리 질렀다 한다. 고대 로마의 악녀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아들에 의하여 4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어머니 살해 후의 <네로>황제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지배에서 해방된 <네로>는 점차 잔학 흉포해져서 그 아내 <옥타비아>와의 부부관계는 좋지 않았다. 그런 때문에 어릴 때부터의 친구인 <오도>(후 로마 황제)의 아내인 <포바에아>와 애인관계였다.

<네로>가 24세 때인 서기 62년에 황제 <네로>는 황후 <옥타비아>와 불임을 이유로 이혼했다. 그리고 새로 불윤, 간통(<포바에아>의 모략에 의함)죄로 그녀를 처형하고 말았다. 그 후 애인 관계였던 <포바에아>를 그 남편인 <오도>와 이혼하게 하여 <포바에아>와 결혼했다. 그래서 <브리타니구스>, 어머니 <아그리피나>. 비 <옥타비아> 등을 살해한 황제 <네로>의 모습을 보고 측근에서 황제를 보좌하던 철학자 <세네카>는 위험을 느껴 은퇴하고, 다시 황제를 측근에서 보좌하던 근위군단장관 <브르루스>는 죽었다. 그리하여 <네로>황제의 좋은 보좌진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네로> 황제는 악신인 근위군단장관 <디게리누스>를 중용하게 되어 로마의 국정은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가운데 <네로>가 26세 때인 서기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시의 절반이 소실되었다. 황제 <네로>는 진두지휘하여 민가나 도로 등 급속한 재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겸해서 황금궁전의 건축을 시작했다. 화재로부터 겨우 2년 만에 이전보다도 더 아름다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황금궁전의 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황제가 방화하였다는 소문이 떠돌자 이 소문을 부정하기 위하여 당시 왕성해지기 시작하던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죄를 전가시켰다. 이 시대의 황제는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하는 관념이 중시되었었다.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자는 모반의 죄를 씌워졌기 때문에 기독교도는 모반자로 간주되어 미증유의 처형이 이루어졌다.<처형은 마치 스포츠처럼 행해졌다. 신자는 야수의 가죽을 뒤집어씌우고 맹견에게 물어 뜯기었다.>(다티도우스). 예수의 12제자 중 베드로나 12제자가 아니지만 전도에 힘을 쓴 바울은 이 박해로 순교하였다.

<네로>가 27세 때인 서기 65년 황후 <포바에아>는 제2자를 임신 중이었는데 <네로>의 방탕함에 격하게 말다툼을 하게 되었는데 화가 난 <네로>의 발에 복부를 차이어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죽고 말았다. 황제는 <포바에아>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 황후 <포바에아>가 죽은 후 <포바에아>와 매우 닮은 해방 남성 노예 <스보루스, 사비나>를 거세하고 여장시켜 <스부르누, 사비나>와 장엄한 결혼식을 올려 그를 여왕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네로>의 성격파탄은 날로 현저해져서 원로원 의원들에 의한 <네로> 황제의 암살 계획이 발각되고 이에 가담한 다수의 인물을 처형하였다. 일찍이 황제를 보좌했던 철학자 <세네카>도 사건에 관여하였다는 이유로 자진시켰다. 이 사건으로 <네로>의 공포정치는 일층 더해져서 속주에 대하여 중세를 가하고 부유층으로부터 재산을 약탈하고 거부하는 자는 처형하였다. 다음 황제 후보자도 차례차례로 살해하였다.

한편 네로의 취미는 스스로 예술가라고 하듯이 시작, 하프, 노래, 그리고 전차의 기수 등 폭넓은 재능을 피로하였다. 단지 실제로는 황제라는 특권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네로가 하프를 연주할 때 박수를 치지 않는 관객을 채찍질하는 병사가 있어서 박수를 강요했다. 그리스 체육제에서는 <황제가 노래를 부를 때에는 어떤 이유로든지 자리를 떠서는 안 되었다. 그런 결과 출입구가 막혀서 객석에서 출산하는 일도 있었고, 벽을 타서 뛰어넘어서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혹은 죽은 채하고 관에 눕혀서 밖으로 나가는 일도 있었다.>(수에토니우스)

<네로>가 그리스에 장기간 체류하다가 로마로 돌아오자 오락에 굶주린 민중이 대환영을 했다고 한다. 원로원 의원들은 인내에 한계가 왔을 때에도 민중에게는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반란과 <네로>의 죽음

 

<네로>가 30세 때인 서기 68년 <가리아>(현 프랑스 지방)의 총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히스파니아.(현 스페인 지방)>로 파급되어 그곳의 <가르바> 총독이 거병하여 로마로 진군하였다. 그리하여 <가르바>는 황제로 즉위하고 원로원은 이를 승인하고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단정하였다. 그리고 <네로> 본인이 없는 가운데에서 사형을 선고하였다.

어느 날 황제 <네로>는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서 다음과 같은 신탁을 받았다. <그대의 존재 그 자체가 그대의 신을 더럽히는 것이다. 물러가거라.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여. 73이라는 숫자가 그대의 몰락할 때를 알린다.> 황제 <네로>는 73이라는 숫자가 자신의 나이라고 생각했으나(당시 그는 29세) 무녀의 말에 격노하여 신관의 수족을 자르고 신관과 함께 생매장하고 말았다. <네로>의 후계자로 선정된 <가르바>가 즉위하였을 때 그의 나이가 73세였다.

버림을 받은 <네로>는 도망쳐 나와서 서기 68년 6월 8일 <세계는 위대한 예술가를 죽여서 잃었다> 하고 울면서 자살하였다. 향년 30세였다. 그의 사후 <네로>의 묘역을 참배하는 사람은 오랜 동안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 그리스를 비롯하여 속주에서는 <네로>는 인망이 좋아서 <네로>를 사칭하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