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왕에게 시집간
절세의 미녀 왕소군 이야기
흉노와의 대결과 화친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이 죽고 대 혼란에 빠진 중국을 통일한 한(漢) 나라 고조 유방(劉邦)은 국토는 통일하였으나 북방의 흉노(匈奴)가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흉노를 토벌하려 나섰으나 역으로 평성(平城=大同) 근교에서 대패하여 한나라 고조는 흉노의 선우(單于=왕)를 항상 위로 우러러 받들기로 하여 굴욕적으로 화해를 맺었다. 한나라 무제 때에는 흉노에 대하여 강경책을 써서 현상을 유지 하였으나 후대 원제(元帝) 때에 이르러서는 한나라는 쇠퇴하였고 흉노는 내부 분열로 동서로 갈라졌다.
흉노가 한나라 왕족의 색시를 요구하다.
서 흉노는 여전히 강했으나 동 흉노는 한나라에 항복하여 화해를 청해 왔다. 그리고 기원전 33년에 동 흉노의 선우(왕) 호한사(呼韓邪)는 한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한나라 황제의 피를 받은 자녀를 정처로 맞고 싶다고 청해왔다. 한편 한나라에서도 서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동 흉노를 도와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나라 원제는 만족인 흉노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누군가 흉노에게 시집을 가는 경우에는 그 사람을 황제의 딸을 삼겠다.> 하고 후궁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당시는 흉노족이라 하면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고 여기던 시대라서 누구 하나 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는 3000이나 되는 후궁들 중에서 적당한 사람 곧 가장 추한 얼굴의 후궁을 골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흉노의 왕에 시집가게 되다.
왕소군(王昭君)은 왕씨 호족의 딸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얼굴이 미인이라고 소문이 났었다. 17세 때에 그 미모 때문에 뽑혀서 원제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갔다. 그녀가 모시던 원제는 날마다 상대 후궁을 고르는 데에는 그림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보고 선택하였다. 그런 때문에 궁녀들은 초상화를 그리는 궁정화가인 모연수(毛延壽)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을 사실 이상으로 아름답게 그려주기를 바랐다. 아무튼 아름답게 그려져야 왕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소군은 다른 궁녀들과 달리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애쓰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왕소군 자신이 미모에 대하여 자신이 있기도 하였고 부정한 방법을 싫어하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도도한 왕소군의 태도에 대하여 궁정화가인 모연수는 괘씸하게 여겨
<네가 나를 가볍게 본다면 아무리 제가 예뻐도 내 마음대로 된다는 것을 알게 하리라.>하고 왕소군을 가장 추한 얼굴로 그리고 말았다.
이런 때문에 왕소군은 언제까지라도 황제가 부르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초상화가 추녀로 그려진 때문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 채로 가는 세월만 한탄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황제는 흉노의 왕에게 시집보낼 궁녀를 고르게 되었다. 원제는 언제나 하듯이 초상화를 보고 가장 추녀를 골라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 많은 궁녀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추녀의 초상화를 찾았다. 원제는 <어쩌면 이렇게 추한 얼굴을 가지고 궁에 들어오기를 잘 했구나, 좋아 이 궁녀를 흉노의 왕에게 시집보내자.>하고 이 정도라면 흉노의 왕에게 알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소군
마침내 왕소군은 흉노의 왕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되었다. 왕소군은 흉노의 왕에게 시집가기로 결정되자 후궁으로 허무하게 세월을 보내는 것 보다 또 한나라와 흉노의 두 민족의 화해를 위하여 흉노의 왕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했다.
원제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장안에서 흉노의 왕인 호한사선우와 왕소군의 결혼 피로연을 성대하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흉노의 왕 호한사 선우는 <천자로부터 이렇게 절세의 미인을 하사받아 나에 대하여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를 느껴 사례의 말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흉노의 황후로서 이 이상의 미인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한나라의 유대가 날로 단단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원제에게 말하였다.
원제는 그날 왕소군을 처음으로 보았는데 그 미모에 놀랐다. 그녀는 어떻게 보아도 후궁 제일의 미녀였던 것이다. 원제는 땅을 치며 후회하였으나 이미 끝난 일이었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황녀가 되어서 시집갈 준비를 하였다.
흉노 왕에게 시집가다.
그 후 왕소군은 화려한 옷을 입고 한나라와 흉노의 고관들과 함께 장안을 떠나 말에서 흔들리며 흉노의 땅까지 2천 킬로나 되는 먼 거리를 여행하였다. 그 여행에는 산을 넘고, 사막을 넘고, 초원을 넘어서 장장 2개월 이상이나 걸리는 쓰라린 여행이었다. 그 여행 중에 왕소군은 한 번도 총애를 받지 못하고 끝내는 변경의 먼 나라로 가야하는 한스러움을 노래로 지어 원제에게 보냈다 한다.
흉노의 땅에 닿은 왕소군은 흉노의 땅에서 호한사선우의 황후가 되어서 영호알씨(寧胡閼氏) 라 불리어 흉노의 백성에게서 소중하게 대우를 받았다. 한나라 사절단은 왕소군이 흉노에 시집을 가서는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절단의 자리에서는 왕소군은 양국 간의 우호의 상징이고 가교로서 중요한 입장을 짊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한나라 사절단 중에는 왕소군의 친 형제 등 친족이 동행하는 경우도 있어서 왕소군은 황제의 배려에 감사하고 있었다. 이윽고 왕소군은 호한사선우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으나 시집와서 3년 만에 호한사선우가 죽자 흉노의 관습에 따라 이번에는 신왕의 처가 되어서 다시 딸 둘을 낳았다. 이렇게 하여 왕소군은 흉노에서 일생을 보내며 한나라의 문화를 흉노에 전하였다. 왕소군은 내몽골자치구의 산기슭에 묻혔는데 그 묘 주변에는 언제나 마르지 않는 초목이 무성했다고 한다. 그 푸른 풀은 한나라 땅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왕소군의 향수가 잠들어 있는 것이라 하고 그 묘를 청묘(靑墓)라 했다. 그리고 그 묘에는 그녀의 남편 호한사선우가 함께 말을 타고 활보하고 있는 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묘 자체가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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