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왕비 앙트와네트 이야기
오스트리아 왕녀로서
마리 앙트와네트는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서 1755년 11월 2일에 태어났다. 여제 마리아가 낳은 16명의 자식 중에서 15번째의 아이였다.
마리아는 매우 애정이 깊은 어머니였다고 하는데, 앙트와네트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그것은 앙트와네트가 막내라는 점도 있지만 그녀가 가진 성향에 따른 것도 많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앙트와네트는 쾌활하고 사교적이며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반면 기분이 변하기 쉽고 하나에 장시간 집착하지 못하는 일면도 있었다. 앙트와네트는 어른이 되어서도 한 권의 책도 최후까지 독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무사기하고 사랑스러운 그 반면에 기분이 가벼운 면을 합하여 가진 막내인 앙트와네트에게 어머니로서의 본능을 느꼈는지 모른다.
앙트와네트
마리아의 앙트와네트에 대한 애정은 그녀의 시집가는 곳인 유럽에서도 가장 강국의 하나인 프랑스왕비의 지위를 확보해준 사실을 보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오스트리아 하브스브르크가로서도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수 세기 동안 적대관계였다. 특히 앙트와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23세에 오스트리아 왕위에 즉위했을 때 여자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는 프로시아는 교환조건으로 중요한 영토 시레지아를 요구하고 그것을 거부당하자 프랑스, 스페인 등과 동맹을 맺고 전쟁을 시작하였다. 마리아는 스스로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이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대에 각국은 식민지를 만들어 이해관계로 동맹을 맺거나 대립하거나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전쟁은 십 수 년 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런 결과 외교수완에 따라 어떻게 이 괴로운 전쟁을 끝내기는 하였으나 결국 오스트리아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공업지 시레지아를 프로시아에 뺏기고 말았다. 시레지아를 빼앗긴 오스트리아는 전적으로 약소국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었다.
정략결혼과 베르사이유의 분위기
오스트리아가 시레지아를 빼앗긴 일은 남자 못지않은 여제 마리아의 성격으로 보면 허용할 수 없는 굴욕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여제와 국민은 미운 프로시아로부터 시레지아를 탈환할 것을 목표로 그 후 분투노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로시아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오랜 동안의 적이었던 프랑스의 힘을 빌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프랑스의 존재야말로 복잡한 국가 간의 힘의 밸런스를 좌우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정략결혼이었어도 앙트와네트가 프랑스 왕비로 나간다는 것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의 유대를 든든히 하고 다시 유럽의 강국이 되기 위한 절대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국가 간의 이해의 목적으로 자신이 관계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마리 앙트와네트는 오스트리아의 하브스브르크가에서 프랑스의 브르봉가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1770년 5월 16일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 때 그녀는 아직 14세의 소녀였다. 갑자기 가정적인 분위기인 오스트리아에서 화려하고 쾌락적인 베르사이유 궁전에 내버려지게 된 것이다. 이 일은 사춘기의 소녀였던 앙트와네트의 마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원래 사교적이고 쾌활하고 호기심이 강한 그녀는 이 베르사이유 궁전이 가진 화려한 분위기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성격은 도 넘치는 놀이나 호사스러운 것을 좋아하게 되어 갔다.
이 무렵의 프랑스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중심으로 로고고주의 문화의 절정기이기도 하였다. 로고고문화란 표면적으로는 섬세하고 우아하고 화려함을 특징으로 하는 귀족문화라 하지만 실제로 그 배경에 있는 것은 한 때의 쾌락을 즐기는 퇴폐적 정신밖에 보여주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지루한 가운데 있어서 이제부터 도래할 지도 모르는 커다란 절망과 붕괴를 잠시라도 잊어버리려는 찰나적 쾌락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구태여 현실에서 눈을 피하여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면서도 파멸형의 향락으로 몸을 내던지고 춤추며 미쳐가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경제 위기와 민중의 분노
프랑스 왕실의 현실은 재정의 핍박상태였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영국의 압정에 참을 수 없어서 식민지측이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국왕 루이15세는 라이발인 영국에 타격을 주기 위하여 미국의 독립 전쟁 군 측에 20억 리블이라는 막대한 원조를 하였는데,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왕정은 항상적인 재정난으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프랑스의 연간 수입은 5억 리블이라고 하니 국왕이 반란군에 원조한 액수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왕 루이15세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강한 국왕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앞일을 생각하는 통찰력과 결단력이 결여된 인물이기도 하였다.
재정의 적자는 은행에서 차용을 하여 불어나기만 하고 이윽고 왕은 평민에게 중세를 과하게 되었다. 빚을 떠맡게 된 평민의 분노는 각지에서 폭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대 한발이 이어져서 1787년에는 대홍수가 일고 이어서 우박이 내렸다. 이 이상 기상으로 인한 혹서와 건조로 가축은 죽어갔고 작물은 괴멸상태가 되었다. 농민은 살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굶주려서 죽어가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많은 농민이 부랑자가 되어 도시로 몰려들었으나 일자리는 있을 이가 없다. 그래서 실업자뿐으로 구걸하는 사람이 넘쳐났다. 도시의 치안은 열악해지고 하루 끼니를 얻는 것이 어려워졌다. 빵 값은 터무니없이 오르고 밤부터 빵집 앞에는 열을 서도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왕비의 결혼 생활과 민중의 원망
1774년 5월 10일 이 경제공황을 만든 장본인으로서 루이 15세는 앙트와네트가 프랑스에 온 4년째에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774년 5월 10일 마침내 앙트와네트는 루이 15세의 손자로서 황태자였던 남편이 루이 16세로서 왕위에 즉위하자 왕비가 된 것이다.
당초의 목적이 이렇게 빨리 달성된 것은 행운이었는지 모르나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선왕 루이 15세가 만든 막대한 부채로 인한 경제공황뿐이었다.
루이 16세
이 때 즉위한 루이 16세는 겨우 19세로 정치에 대해서는 기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기가 약하고 둔감하여 무슨 일에도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
곧 섬세하고 민감함을 가진 타입이 아니었다. 그리고 루이 16세의 도락이란 사냥과 전용 대장간에 틀어박혀 묵묵히 망치를 두들겨 열쇠나 만드는 정도였다.
이처럼 루이16세는 처인 앙트와네트와는 취미도 기질도 전혀 정반대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일종의 성적 불능자이어서 결혼 후 7년간이나 그녀를 처녀인 채로 방치해두었다는 사실도 있다. 이런 일은 그녀의 정신 구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앙트와네트는 결혼 후 도에 넘치는 놀이나 호사에 빠져서 스캔들이나 소문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런 것은 밤마다의 초조함이나 침실에서의 굴욕을 맛보게 한 반동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한 번도 만족해 보지 못한 그녀로서 지루하고 허무함에서 해방되는 순간은 이러한 향락적인 놀이에 빠져 버리는 시간 바로 그것이었을는지 모른다.
이윽고 앙트와네트는 베르사이유 궁전 한 쪽에 있던 건물에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4개의 코린토식 기둥을 가지고 섬세하고 정치한 기공으로 만들어진 사치스러운 건물이다.
그녀는 이곳을 개축하여 매일 가면무도회나 연극을 공연하도록 하여 자신이 마음에 드는 귀족들과 마음껏 매일 놀며 지내게 되었다.
궁전 곁에는 작은 농원이나 농가를 만들었다. 농원에는 인공 냇물이 흐르고 수초가 둘레에 심겨지고 스위스산 암소가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다시 뜰에는 마음에 드는 허브가 많이 심겨져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동화에 나오는 세계와 같았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한가해지면 앙트와네트는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마차로 밤에 파리로 나가서 도박이나 극장 등에서 밤새도록 놀았다.
그런 때문에 앙트와네트가 의상, 장신구, 도박 등의 밤놀이에 드는 비용은 막대한 것이 되고 그것은 누적되어서 엄청난 액수로 부풀어 올랐다.
그녀가 국고를 물 쓰듯이 쓰고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는 데에 반해서 민중은 기아로 고통을 당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하루를 살기 위하여 죽을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앙트와네트가 알 까닭이 없었다.
그녀의 이러한 제 마음 대로의 호사스러운 행위는 소문이 되어 어느 새 그녀를 <적자부인>이라든지 <비천한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험담을 하고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목걸이 사건>이 그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사건은 직접 앙트와네트와는 무관하지만 왕비의 이름을 걸고 행해진 사기사건이었다. 160만 리블이라는 엄청난 고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입한다는 말 자체가 전해져서 지금까지의 낭비가라는 데에다가 음탕한 오스트리아 여자란 이미지를 민중에게 불을 붙이에 되었다.
문제의 이 목걸이는 황금 500킬로의 값에 상당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한다. 160만 리블이라 하면 너무나 엄청난 돈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프랑스 전국으로 퍼지고 앙트와네트는 비방 중상으로 파묻히게 되었다. 이에 이르자 앙트와네트는 프랑스 안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증오의 대상으로 정착되고 말았다.
경제 위기 극복책과 삼부회
한편 왕실 측은 이 경제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려고 삼부회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삼부회는 1789년 5월 5일, 실로 170년 만에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모처럼 열린 이 집회도 특권신분에 대한 과세 문제로 진척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제일신분인 성직자 약 14만 명, 제이신분인 귀족 40만 명, 최후의 제삼신분인 평민 2600만 명 정도이다. 제일신분과 제이신분인 성직자와 귀족을 합해서 54만 명으로 전체의 2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대표자에 필적하는 인수를 의회로 보내고 있었다. 곧 나라의 수입 5억 리블은 평민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었다.
집회는 다수결방식을 주장하는 평민 측과 일신분 일표를 주장하는 성직자와 귀족의 대립으로 시종하였다. 곧 다수결이라면 평민 측의 주장이 통하게 되고 일신분 일표라면 성직자, 귀족의 주장이 인정되어 특권계급에 대한 과세는 부정되게 된다.
그런 사이에 평민 측은 삼부회를 국민의회라 이름을 바꾸고 이것을 인정해주도록 왕에게 요구하였다. 왕 측에서는 평민의 요구를 인정하기는 하였지만 평민의 힘이 증대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5만5천의 군대를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투입할 계획을 가지고 왕은 평민주도의 국민의회를 해산시키려 하였다.
혁명의 전조
군대가 동원되어 이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것을 안 평민 측은 군대에 대항하기 위하여 시민군을 급거 편성하고 무장할 필요가 있어서 무기 탄약고가 있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이 바스티유 감옥은 노후했고 수인은 7명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비대가 100명 정도 있어서 잊어버린 감옥이라 해도 좋았었다.
전투는 1시간 정도로 끝났는데 이 사건을 시작으로 혁명의 서곡은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파도가 일게 된 혁명의 파도는 멈출 수가 없었다. 엄청난 세로 정세는 시시각각 변하고 이윽고 무서운 사태로 진전되어 갔는데 아직도 이때까지는 앙트와네트는 사태의 중대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된 소식이 알려지자 민중의 미움을 사고 있다고 자각한 많은 귀족들은 망명하기 위하여 국경 근처로 몰려들었다. 앙트와네트도 루이 16세에게 자기 조국 가까운 것으로 떠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윽고 민중들에 의하여 베르사이유 궁전으로부터 파리로 국왕 일가를 연행하여 그 동안 버려두었던 두이루리 궁전으로 이사시켰다. 국왕 일가는 수 개월간 이 궁전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파리 탈출 실패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시작으로 프랑스에서는 왕정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여 프랑스혁명이 시작 되었다. 그녀의 은혜를 입은 많은 귀족들은 미리 망명하고 겨우 곁에는 왕의 누이 에리사베트와 비서격인 란바르공비인 마리 루이스(1792년에 왕당파라 하여 살해됨)뿐이었다
국왕 일가는 파리의 듀이루리 궁전으로 옮겨졌는데 여기서 마리 앙트와네트는 그 애인인 스웨덴 귀족 패르센의 힘을 빌어서 파리를 탈출하여 오스트리아에 있는 오빠 레오폴드 2세에게 도움을 구하기로 계획하였다.
1791년 6월 20일 계획은 실행으로 옮겨졌다. 루이 일가는 서민으로 변장하여 파리를 탈출하려 하였다. 앙트와네트도 가정교사로 변장하고 루이 16세와 앙트와네트는 별도로 가기로 권했으나 앙트와네트는 동행을 고집하였다. 그리고 마차에는 은식기, 의상 상자, 식료품 등 일용품이나 목을 축일 수 있는 와인 등을 실었다. 그런 때문에 원래도 느린 마차인데 더 속력은 느렸다. 결국 국경 가까운 바렌느에서 신원이 발각되어 6월 25일 파리로 되돌아왔다. 이 파리 탈출 기도사건이 있어서 민중은 이번이야말로 완전히 국왕일가로부터 떨어지고 말았다. 파리로 돌아온 국왕일가였지만 누구하나 탈모하는 자는 없었다.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리 민중의 분노와 모욕 섞인 냉랭한 시선뿐이었다. 이 사건으로 친국왕파 사람들도 멀리하게 되었다.
유폐
1792년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자 마리 앙트와네트가 적군에게 프랑스군의 작전계획을 누설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서 8월 10일 시민 의용병이 듀이루리 궁전을 습격하여 왕족 일가를 단브르탑으로 이송 유폐시켰다.
그 후 국왕 일가는 루이 16세와 아내 앙트와네트와 자녀 2명, 국왕의 누이는 음참한 요새 단브르탑에 감금되게 되었다.
이 단브르탑은 13세기 성당기사단에 의하여 건설되어 그 후 수도원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이 음참한 건물이 국왕 일가의 마지막 주거지가 되었다.
자녀들 장녀 아들
여기로 이송되는 사이에 앙트와네트는 시민군 병사들로부터 듣기 거북한 매도와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단브르에서는 유폐라고는 하지만 가족들끼리 체스놀이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며 아이들 공부도 돌보아줄 수 있었다 한다.
공포정치
이 무렵 혁명은 자고방당이라는 일파가 혁명을 주도하게 되어서 몸서리치는 무서운 것으로 변질해갔다. 자고방 수도원을 점거한 데서 이 이름이 붙여진 이 일파는 하층 민중의 지지를 받고 급격한 개혁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후에 로페스피에로 등에 의하여 주도된 단독 독재를 행하게 되어서는 반대세력을 차례차례로 단두대로 보내어 약 2년 사이에 4천명 이상의 목을 베는 공포정치를 출현시켰다.
그리고 혁명 전부터 민중의 미움을 샀던 귀족에게는 증오와 분노의 창끝이 겨누어져서 대다수는 실로 처참한 취급을 당해야 하는 운명을 맞았다.
앙트와네트의 친구였던 람바르부인 등은 폭민들에 의하여 가슴에서부터 하복부까지 잘리고 찢기어 심장을 도려내어 죽음을 당하였다. 시체는 나체인 상태로 시중에 돌려지고 피투성이인 목은 잘리어 창끝에 꿰어져서 행진의 선두에 내걸렸다.
단브르탑까지 행진한 폭민들은 이것을 보라는 듯이 창끝에 꿰인 부인의 목을 앙트와네트가 있는 방의 창에 꽂았다.
또 일찍이 루이 15세를 매혹시켜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듀바리부인은 어리석게도 망명지 영국에서 감추어둔 보석, 귀금속을 가지러 들어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심문을 받은 그녀는 살아나고 싶은 심정에서 보석을 감추어둔 장소를 자백하였으나
그런 때문에 처형을 연기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졸도했다.
단두대가 있는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도중 그녀는 목숨을 살려달라고 울었다. 이윽고 처형인이 그녀를 억지로 잡아넣으려 하는 순간 50대 여자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힘으로 세 남자를 털어내고 좁은 형장을 비명을 지르며 돌아다녔다. 처형인은 수천 명 관중 앞에서 그녀의 손가락이나 손을 하나하나 조개껍질을 벗기듯이 하여 엎드리게 하였다. 간신히 이 부인의 목을 떨어뜨릴 수가 있었는데 목과 몸통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도 울러대는 그 지옥 같은 광경에 관중은 그 후의 인생관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처럼 무서운 결말은 금후의 국왕 일가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혁명재판과 처형
혁명 재판이 시작되어 먼저 국왕 루이 16세가 탑에서 끌려나왔다. 심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형식만이 재결로서 1표 차로 유죄로 판결되고 1개월 후인 1793년 1월 21일에 처형되었다.
대 듀마는 처형 당일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침 겹겹으로 사람의 담을 쌓은 길을 국왕을 태운 마차가 나아갔다. 혁명광장은 2만의 군중으로 매워졌으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없었다. 10시에 왕은 단두대 밑에 이르렀다. 왕은 스스로 상의를 벗고 손이 묶인 다음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왕은 군중 쪽을 향하여 소리 질렀다,
“백성들이여,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 북소리가 이를 가렸다. 왕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나를 죽게 한 자들을 용서한다. 나의 피가 다시는 프랑스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신에게 기도하고 싶다.”유체는 공동묘지인 마드레느사원에 묻혀졌다가 제일제정시대에 나폴레온의 명에 의하여 22회 명일인 1815년 1월 21일 역대 프랑스 국왕이 잠든 산토니 대성당에 왕비 앙트와네트와 함께 개장되었다.
남편이 처형된 후 앙트와네트는 날마다 수척해져갔다. 그러나 얼마 없어 사랑하는 7세인 아들이 끌려 나가는 운명을 맞았다.
그때 앙트와네트는 비명을 지르고 아들을 품에 안고 한 시간 동안 허무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장래 루이 17세가 될 소년은 자고방파의 구두공집에서 맡았는데 학대당하였다 한다. 후에 왕당파에서는 루이 17세로 왕위를 인정했으나 본인은 모른 일이며 결국 2년간 유폐된 단브르 탑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10세였다. 그 후 역사의 암흑 속에 감추어져서 존재 자체도 사라지고 말았다.
단브르탑에는 앙트와네트와 14세인 딸 마리 테레스와 국왕의 누이 에리사베트 세 사람만이 남겨졌다.
1개월쯤 후에 앙트와네트는 콘세르주리 감옥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녀를 재판하기 위한 특별법정이 개설된 것이었다.
특별 법정에 끌려나온 앙트와네트는 38세의 나이인데도 몸은 매우 쇠약해졌고 그토록 풍부했던 금발도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얼굴에서는 거의 표정이 없고 단지 죽음만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미 잃었고 그때 그녀의 마음속에는 왕비다운 명예로운 최후를 맞는 일만 남아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녀의 재판은 10월 14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앙트와네트는 혁명재판소가 제시한 죄목에 대해서는 전부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재판은 난항을 거쳤으나 2일 반에 걸친 변론과 심문도 형식뿐으로 사형판결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처형 전날 앙트와네트는 루이 16세의 누이에게 유서를 썼다. 내용은 <범죄자로서 사형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무고한 죄로 단두대로 보내진다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이유서는 1861년에야 공개되었다.
유서를 쓰고 난 그녀는 아침 식사에 대한 희망을 묻자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모두 끝났습니다.> 라고 말했다 한다. 그리고 흰옷에 흰 모자를 쓰고 감옥에서 나오자 머리를 짧게 깎고 두 손은 뒤로 포승에 묶이었다. 최후의 말은 사형 집행인의 발을 밟아버렸는데 그 때 <미안합니다. 일부러 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두가 더러워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라는 말이었다 한다.
1793년 10월 16일 12시 15분에 참형이 집행되고 유체는 루이 16세와 함께 마드레느사원에 묻혔다가 22년 후 나폴레온 1세에 의하여 왕실 묘지인 산토니대성당으로 개장하여 루이 16세와 함께 묻혔다.
평가
마리 앙트와네트의 명예회복은 30년 이상 걸려서 이루어졌다. 현재로서는 그녀에 대한 악평은 거의가 중상이나 날조였다는 것이 판명되고 있다. 단지 그녀가 일부 총신만 편애하고 베르사이유의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것 또 낭비가로서 도박 등에 빠진 것은 사실이고 왕비 개인이나 왕권 그 자체의 반대자에 의해서 과장 되어서 파리에 의도적으로 유포시켜 왕비나 왕권에 대한 증오가 새롭게 생겨났다. 그러나 마리 앙트와네트의 낭비만으로 프랑스 국가의 재정이 기울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마리 앙트와네트가 소유했다는 60만 리블의 드레스나 50만 리블의 귀걸이 등의 호화품은 현재로서는 과장이 섞여서 신빙성이 의문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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