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지 않는 왕비 ‘포사’ 이야기
기원전 8세기 중국 고대 주(周)나라 12대 유왕(幽王)은 한 사람의 절세미인의 기분을 맞추려고 나라를 망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절세미인이 포사(褒姒)라는 왕비였다.
서주의 유왕(幽王)은 걸주(桀紂)에 못지않은 폭군이라서 포(褒)나라의 제후 포향(褒珦)이 유왕을 알현하고 간언을 올렸다가 투옥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를 구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포홍덕(褒洪德)이 포나라의 미녀를 모아 기원전 780년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鎬京)의 유왕에게로 보내었는데, 이때에 미녀들 중에 끼인 미녀가 포사(褒姒)이다. 유왕은 선녀처럼 아름다운 포사의 용모를 보고 더없이 흡족해 하고 바로 포향을 석방하였다.
“그 입술은 산호와 같고, 그 치아는 진주와 같고, 그 손가락은 끌로 조각한 경옥과 같다.” 고 할 만큼 그녀는 여러 문헌이나 전하는 설화에 그 아름다움이 표현될 정도였다.
유왕은 이 절세의 미녀를 사랑한 나머지 정비 신후(申后)와 정비에서 태어난 아들 의구(宜臼)을 폐하여 그들을 신(申)나라로 추방하고 포사를 정비로 맞아들이고 그 아들 백복(伯服)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녀는 유왕에게로 와서는 단 한 번도 웃는 일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유왕은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냉정한 표정을 부드럽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왕은 우리 왕비 포사를 웃기는 자에게는 큰 상을 준다는 포고를 전국에 통달했다.
어떤 측근의 한 사람이 아이디어를 진언했다. 곧 침입해오는 적군은 없지만 봉화를 올려 각지에서 서둘러 참례하는 제후의 낭패하는 표정을 보면 다소 유쾌해질 것이라고 했다.
당시 황하 북원에는 사납고 호전적인 유목민족이 다수 있어서 중국 역대 왕조는 그들을 야수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여 경멸할 뿐 아니라 한 편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만리장성이 없던 이 시기는 수도에 위기가 닥치면 봉화를 올리고 각지의 제후를 긴급 소집하였던 것이다.
유왕은 이 엉뚱한 아이디어는 쓸모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봉화를 올리기로 하였다.
봉화에도 몇 개의 단계가 있었는데 가장 중대한 의미의 봉화가 올려졌다.
그 봉화를 본 제후들은 조국이 위기에 처해있음을 알고 내가 먼저라는 생각에서 모여들었다. 숨 가쁘게 달려온 그들이 수도 호경(鎬京)에 도착했는데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하므로 그들은 서로 얼굴을 보면서 당혹함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멍청한 표정으로 태연히 있는 유왕과 포사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에 맛을 들인 유왕은 종종 이유도 없는데 봉화를 올려서 각지에서 제후들을 소집하고서는 포사의 기분을 끌려고 하였다. 그러나 몇 번이나 회를 거듭함으로써 신용이 떨어져 제후들은 봉화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기원전 771년 유왕은 신(申)나라로 추방했던 의구(宜臼)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신나라의 제후는 원래 유왕의 장인이자 의구의 외조부였다. 그는 차마 자기의 외손자를 죽일 수가 없어서 유왕에게 그 일의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 격분한 유왕은 신후를 폐하고 공격하여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신나라 제후인 신후(申侯)는 호경 부근의 만족인 견융(犬戎)의 추장과 동맹을 맺고 자기의 외손자가 왕위를 찬탈하기만 하면 호경의 모든 금은보화와 많은 남녀를 노예로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에 견융의 추장은 즉시 1만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호경을 공격하였으며, 신나라의 군대도 그와 동시에 호경으로 향했다.
신나라와 견융이 연합한 군대가 호경에 이르렀을 때 유왕은 봉화를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삽시간에 봉화의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 전국으로 퍼졌다. 그러나 밤새워 달려와야 할 제후국들의 구원병은 끝내 오지 않았다. 봉화의 불길을 본 제후들은 지난번에 유왕과 포사에게 속았던 경험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그들의 노리개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야 유왕은 포사를 데리고 근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여산으로 탈출하였지만, 뒤따라온 견융의 군사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은 견융에게 붙잡혀 여산(驪山)에서 참수 당했다. 포사는 이민족의 노예가 되기 직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서주(西周)는 망하였다.
신후는 원래 태자였던 의구(宜臼)를 평왕(平王)으로 옹립하고 동쪽 낙음(洛邑)으로 천도하여 동주(東周)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771년의 일이었다.
사기에 적힌 이 이야기는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리 미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미소를 보기 위하여 행한 왕의 어리석음을 반복한 결과 나라를 멸망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현실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왕의 측근이 봉화라는 국가의 긴급수단을 그렇게 쓰려고 진언했다는 것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한편 포사가 웃음이 없었던 이유로서는 그녀는 원래는 주나라의 속국인 포(褒) 나라의 왕이 죽음의 죄를 짓고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그 대신에 포사(褒姒)와 견포 3백반과 함께 헌상된 몸이었기 때문에 웃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유왕이 요염한 포사의 매력에 매혹되어서 정치를 돌보지 않고 백성의 반발을 불러와서 나라를 망쳤음에는 틀림이 없다.
“아름다운 미녀에게는 악한 점도 숨겨져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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