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지색 ‘서시’ 이야기
오나라와 월나라의 쟁투
춘추시대 말기에 이르자 주왕조의 전통문화로부터 떨어져 나간 세력인 여러 나라가 강대해져서 중원으로의 진출을 노리게 되었다.
그 나라란 만족이라 하여 경멸당하던 오(吳)와 월(越)나라로서 이들 나라가 춘추시대 말기의 패권 다툼의 주역이 되었다.
오나라는 장강 하류, 월나라는 그 동남쪽의 회계(會稽)에 위치하는 나라로 이들 나라는 진초(晉楚)의 싸움에 말려들어간 것이 원인이 되어 사이가 나빠졌다. 이 무렵 남쪽의 초(楚)나라가 강해서 북쪽을 침범하게 되자 초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한 진나라가 오나라에 초나라의 측면 공격을 요청하므로 이를 수락하였다. 북쪽의 진(晉)나라군과 동쪽의 오(吳)나라군으로 초나라를 협공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동의한 오나라 왕 합려(闔閭)는 기원전 506년 손무(孫武)를 장군으로 하여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하였다. 초나라의 소왕(昭王)은 탈출하여 진(秦)나라의 도움으로 멸망만은 면하였다.
거기에 초나라는 월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오나라의 배후를 쳐달라고 청했다. 기원전 495년 월나라왕 구천(句踐)은 오나라를 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출병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오나라는 먼저 월나라를 침공하였으나 결과는 오나라가 패하고 왕 합려는 이듬해에 죽고 말았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월나라 왕 구천(句踐)을 원망하고 복수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오나라와 월나라는 싸움을 계속하게 되었다.
복수를 노린 와신상담
오나라 왕이 된 부차(夫差)는 가신에게 부왕의 유언을 자주 말하도록 하였다.
“부차야, 너의 아버지의 원한을 잊지 마라.”
“결코 잊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왕의 원수를 갚는다고 맹세하고 병력을 강화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부차는 섶 위에서 잠을 자면서 고통을 참고 부왕의 원한을 잊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노력하였다. 이를 <와신(臥薪)>이라 한다.
기원전 494년 부차는 정예군을 이끌고 부초(夫椒)의 싸움에서 대승하여 월나라가 오나라의 속국이 되는 조건으로 화해하였다. 대신에 월나라 왕 구천(句踐)과 그 참모 범려((范蠡)는 부차의 노예로서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이 때 구천이 노예가 되면서도 살아남으려 한 것은 오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고자하는 마음에서였다.
수년 후에 마음이 갈아 앉아서인지 부차는 구천과 범려를 월나라로 돌려보내주었다. 다시 재기의 힘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방안에 짐승의 간을 달아매어 놓고 간을 핥아 쓴맛을 보며 곧 <상담(嘗膽)> 함으로써 부차에 대한 복수심을 잊지 않으려 하였다.
2년 동안 월나라는 겉으로는 오나라의 속국으로서 아첨하면서도 속으로는 국내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군비를 강화하여 국력을 키웠다. 한편 신하인 대부 종(種)이 구천에게 오나라를 약체화하게 하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의 묘책을 권했다.
1) 금품을 뿌려서 측근에 간신을 기른다.
2) 오나라의 곡물을 비싸게 사서 오나라 창고를 비게 한다.
3) 다수의 미녀를 보내어 음란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큰 뜻을 흔들리게 한다.
4) 궁전 조영으로 호사함을 조장하여 재정을 낭비시킨다.
5) 오나라 조정의 신하를 매수하여 적의 모략을 알아낸다.
6) 모함으로써 양신을 몰락하게 하고 인재를 죽인다.
7) 이상으로 오나라의 혼란을 틈타서 정예부대를 투입하여 단번에 멸망시킨다.
이 방법을 쓰면 반드시 복수할 수 있다고 하여 헌책했다.
책략으로 뽑힌 서시
구천은 헌책의 몇 가지를 받아들여 먼저 미녀를 찾아내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월나라 국내를 샅샅이 뒤져서 찾았으나 자신의 딸이 무리하게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부모가 숨기는 바람에 결국 미녀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관상을 보는 사람들을 모아 다시 현상을 거는 등 하여 미녀를 찾은 바 50명의 미녀가 궁전에 모이게 되었다.
이 50명 중에서 구천이 고른 자가 이 서시(西施)였다.
서시(西施)의 본명은 시이광(施夷光)으로 기원전 5세기 춘추시대 말기에 절강성소흥시제기현(浙江省紹興市諸曁縣)(현재의 諸曁市)출신이라 한다.
현재 전해지는 서시라는 이름은 그녀가 살던 마을 저라촌(苧蘿村)에 시(施)라는 성을 가진 가족이 동서 두 마을에 살았는데 서시는 서쪽 마을에서 살았다 하여 서시라 하게 되었다 한다.
서시는 단순한 시골 나무장수의 딸이었는데 강가에서 빨래하다가 들켜서 궁전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물고기가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 서시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겨 헤엄칠 것을 잊고 물속으로 잠겨버렸다고 해서 침어(沈魚)라는 말이 생겼다 할 만큼 미모였던 것이다.
그 모습은 시골 처녀라기보다 얼굴이 잘 생기고 체격도 좋았다. 그러나 과연 왕후 귀족에게 헌상하려면 여러 가지 예법을 습득시키고 기품을 몸에 베이게 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든 부차의 눈에 들어야 했다.
그래서 범려(范蠡)에게 명하여 후궁으로서의 예법, 가무, 음곡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훌륭한 기품을 지닌 미녀로서 변신해 간 것이었다.
부차에게 보내어지다
부처의 마음을 붙잡을 후궁으로서의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구천은
“좋아! 서시를 부차에게로 보내자.” 하고 범려에게 명하였다.
이튿날 범려는 월나라를 출발하여 오나라의 부차에게로 갔다. 오나라에 도착하여 부차를 알현하고 서시를 헌상했다. 부차는 서시를 보고 한 눈에 반하여 그 미모에 감탄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이 정도의 미녀를 본 일이 없다. 구천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한다.”하고 범려에게 말하였다.
2년간이나 부차의 노예로서 고역을 참으며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구천은 부차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구천의 눈에 뜨인 서시는 곧 부차의 마음에 들고 그 미소에 볼이 늘어지고 그 묘기에 연일 취하여 어느새 오나라 왕 부차 곁에는 반드시 서시가 있어야 하게 되었다.
그런 만큼 다른 애첩들에게는 눈도 주지 않게 되자 바람처럼 나타난 요염한 미녀 서시에 당연히 질투와 선망의 눈초리가 향하게 되었다.
그런 서시에 대하여 이런 일화가 있다. 서시에게는 지병인 가슴이 아파서 미간을 찡그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평상시에도 아픈 가슴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찡그려 걷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서시의 모습이 또 아름다워서 보는 사람을 매료시켰다. 구천이 그 중 한 사람이다. 서시의 그런 모습이 부차의 마음을 끄는 것이라는 말이 퍼져서 궁내의 궁녀들에게는 모두 미간을 찡그리며 걷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다시 이런 소문이 널리 퍼져서 시골 처녀들마저 서시를 닮으려고 다투어 그 흉내를 내었다 한다.
국력을 쇠잔시키게 하다
자기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부차를 사로잡은 서시는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훈련되었으므로 자연히 오나라를 약체화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부차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다.
먼저 고소산(姑蘇山)에 화려한 이궁을 짓게 하여 부차와 서시의 환락의 휴게소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우물물에 얼굴을 비추어 화장을 하였다는 우물이 있는데 이것을 <서시정(西施井)>이라고 불렀다.
부차는 이렇게 서시에게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정무는 착실히 행하여 과연 명군이었다. 그런데 이 이궁을 지으면서 오나라의 재정은 소모되고 또 서시는 밤마다 품에 안기어
“아아 지금 나를 안고 있는 사람이 패권을 잡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속삭이고 이에 놀아난 부차는 패권을 잡으려고 제(齊)나라나 노(魯)나라에 원정하여 국력을 소모시켰다.
한편 충실한 신하의 간언은 받아들이지 않고, 오나라의 공신인 손무(孫武)나 오자서(伍子胥) 같은 충신이 떠나고 오나라의 인재는 약체화하였다.
부차는 변함없이 패권을 다투어 기원전 482년에는 제나라를 패하고 진(晉), 노(魯), 주(周)가 황지(黃池)에서 회맹을 함으로써 중원의 패권을 잡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출병으로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게 되고 백성의 원성은 높아졌다.
서시의 첩보와 오나라의 멸망
부차가 회맹에 나간 후 혼자서 이궁에 남은 서시는 웃으며 한 통의 서간을 구천에게로 보냈다. 첩보였다.
월나라에서는 부차가 황지의 회맹으로 대군을 끌고 출발했다는 첩보를 받은 구천은 오나라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나라에는 수년 전에 월나라를 이긴 그런 힘은 없었다.
오나라의 왕자 지(地)는 농성을 꾀하였으나 성에 불이 나자 간단히 함락되고 말았다.
한편 회맹에서 맹주의 자리를 진(晉)나라와 경쟁하던 부차는 급히 달려온 사자의 보고를 듣고 월나라가 급습 당하였음을 알고 놀랐다. 중요한 시기에 진나라가 이 소식을 알면 맹주의 자리는 잃게 된다는 생각에서 사자를 베고 말았다. 번번이 오는 사자를 베었다. 그러나 최후로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는 하는 수 없이 맹주의 자리를 진나라에 양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하는 부차의 뇌리에는 서시의 안부로 가득 찼다. 다행히 성내에 침략군이 침입한 흔적은 없고 이궁에 있는 서시는 무사하였다. 이궁에서 서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부차를 맞았다. 그로부터 부차는 이궁에 틀어박혀서 황음에 빠지게 되었다. 성내나 이궁이 무사하고 서시 또한 무사하였고 패전으로 낙심한 부차를 따뜻이 감싸고 재기의 힘을 뺀 것은 구천과 범려의 책략이었다.
그 후 월나라는 부국강병에 힘쓰고 오나라에서는 부차가 서시와 놀아난 때문에 국력은 날로 쇠해갔다.
기원전 475년 마침내 월나라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부차는 체포 직전에 자결하였다. 이리하여 오나라는 114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한 사람의 미녀가 나라를 기울게 하여 오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것이었다.
서시처럼 미모를 가지고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미인을 일컬어 경국지새(傾國之色)이라 한다. 곧 나라를 망하게 한 미모라는 말이다.
이후 서시는 범려와 만나서 행복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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