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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요염한 왕비 ‘메사리나’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0. 4. 12. 15:44

 

 

요염한 왕비 ‘메사리나’ 이야기

 

 

메사리나와 아들의 조상 

 

출신가문과 결혼

 

고대 로마에서 요염한 악처로서 이름 높은 <와레리아 메사리나>는 아버지 <마르구스 와레리우스 멧사라 바루바드수>와 어머니 <도미디아 레비다>의 사이에서 고명딸로 태어났다. 가계로서는 부모 양가 모두 유서 깊은 가계로 특히 어머니 <도미디아. 레비다>는 <아우구스투스>(로마 초대 황제)의 조카였다. <메사리나>는 서기 38년 15세 때에 <구라우디우스>(제3대 황제 가라구리의 숙부)와 결혼하였다.

<구라우디우스>는 고귀하게 태어나서 보기에는 당당한 풍모를 지녔으나 어려서부터의 병으로 말할 때에는 침을 흘리고 말을 심히 더듬어 동작에도 어색하였다.

그 어머니는 그를 <사람의 모습을 한 괴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다.

<구라우디우스>는 부하한테나 원로원 의원한테나 시민한테나 가족들한테나 바보 취급을 당하여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역사 연구나 저작에 몰두하였고, <이도루리아>나 <카르타고>사 등 수 십 권이나 낸 역사학자이기도 하였다.

세상에서 멀리하였던 <구라우디우스>의 세 번째 아내가 된 것은 젊고 아름다운 <메사리나>였다. 그 때 <메사리나>는 아직 15세였는데 대하여 남편인 <구라우디우스>는 50세였다. 젊은 아내와 <구라우디우스>의 나이 차이는 30세가 넘었다.

 

 

왕비가 되다

 

서기 41년 <메사리나> 18세 때 로마 제국의 3대 황제 <가리구라>가 암살당하자 그 소식을 듣고 <구라우디우스>(황제 <가리구라>의 숙부)는 숨어서 떨고 있었는데 친위대에 발견되어 <유리우스 그리우디우스>가 (고대 로마 초대의 세습왕조)의 일원이라는 의미에서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가 제4대 황제가 되고 <메사리나>는 황후가 되었다.

<구라우디우스>는 원로원에서 황제로서 훌륭히 연설도 하고 처음으로 국세조사를 행하고 우편제도를 확립하며 <구라우디우스>항을 정비하는 등 큰 공적을 남겼다. 단지 걸을 때는 오른 발을 끌고 긴장해지면 말을 더듬으며 복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때문에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로마 시민이나 여성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특히나 당시는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육체에 깃든다.>고 하던 시대라서 로마시민은 황제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았다.<구라우디우스>와 <메사리나>사이에는 두 자녀가 있었다. 첫째는 딸로서 <옥타비아>이고 둘째는 아들로서 <브리타니구스>였다. <메사리나>는 <구라우디우스>황제의 첫 아들을 낳은 아내이며 차기 황제의 어머니가 된 자신감에서 폭주를 하게 하였다. 남편이 황제가 된 후 언젠가는 암살당할 것이 아닌가 하고 긴장하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과거에 적대시하고 있던 인물에 대하여 누명을 씌우거나 경쟁상대를 함정에 빠뜨리게 하는 등 차차 처형했다. 그 가운데에는 3대 황제 <가리구라>의 누이도 포함되었다. 또 황후 <메사리나>는 궁중의 미인들에게는 두루 질투하였으므로 젊은 미망인으로서 절세의 미인인 <아그리피나>(구라우디우스제의 조카딸)는 <메사리나>의 마수에서 피해있었다.

어느 날 황후 <메사리나>는 장차 자기 아들과 경쟁상대가 될 수 있는 <아그리피나>의 아들 <네로>의 침실에 자객을 보내어 도모하려 했으나 실패하는 사건이 있었다.

 

음란한 생활과 종말

 

한편 황후 <메사리나>의 음란함은 그치지 않았다. 매일 밤 회식에서 술을 마시고 음행의 상대를 물색하여 귀족의 남자에서 배우나 원로원 의원까지 애인을 삼았다. 이윽고 음탕함은 도를 넘어서 밤이 되면 황제를 잠재우고서 금발의 가발을 쓰고 치장하여 사창가에 나가서 창부로서 손님을 받기에 까지 이르렀다. 밤새 몇 사람을 상대 하고서 새벽에 궁전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하였다. 음탕한 황후는 지쳐있기는 하여도 만족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음탕함과 불륜에 바쁜 황후에 대하여 남편인 황제 <구라우디우스>는 눈치를 채지 못하고 모른 척하였다.

서기 48년 <메사리나> 25세 때에 그녀는 치명적인 실책을 하였다. 황제 <구라우디우스>가 출타 중에 씩씩한 미남 청년으로 애인이었던 귀족 청년 <가이우스 시리우스>.와 정식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녀는 원로원 의원의 태반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행동은 사실 중혼죄이고 황제의 제위 찬탈을 꾀하는 반역이라 하여 체포되었다. 그녀의 애인은 황제의 앞에 끌려 나와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황제로부터 자살을 명받았으나 스스로 죽지 못하여 처형되었다. 향년 25세였다. 이것은 황제의 측근인 <나루기스스>는 만일 황제가 <메사리니>가 황제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하게 되면 마음 악한 황제는 그 죄를 사면해버릴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황제와 면회도 시키지 않고 단행하고 말았다.

<메사리니>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을 때 마침 황제는 저녁 식사 중이었는데 그는 와인을 더 달라고 할 뿐이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