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의 해저궁전 이야기
세기의 발견
1995년 프랑스와 이집트 합동조사단이 알렉산드리아 앞 6킬로미터 밖의 해저에서 온전한 모습 그대로의 고대도시의 유적을 발견하고 1996년 11월에 이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 소식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 앞 바다 8미터의 해저에서 약 2천 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고대 이집트 프토레마이오스조의 왕궁 터를 발견했다.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궁전이 아닐까?>하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20세기 최대의 발견이라는 대 뉴스였다.
그 후 여기서는 소형의 스핑크스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화강암의 석주, 도자기, 반지 등 금제품 등 약 1천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경제 문화 중심의 국제도시 알렉산드리아
약 2천 년 전 알렉산더 대왕의 건설했다는 고대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중계무역의 거점으로서 발전하여 알렉산드리아에는 없는 것이 없고 단 없는 것이라면 눈 정도일 것이라고까지 할 만큼 번영했던 도시였다. 인도나 중국 같은 동양에서 멀리 운반된 향신료나 보석. 실크, 미술품 등 진기한 물품들은 여기서부터 바다를 건너 로마로 가져갔다. 당시 일획천금을 노리는 상인들은 매일 같이 이곳으로 모여들어서 알렉산드리아는 국제도시이면서 여러 민족이 섞여 살던 곳으로 그 인구는 백만이나 되었다 한다.
알렉산드리아 시내에는 시내의 4분의 1을 점유할 정도의 왕궁을 비롯하여 거대한 신전, 학술연구소 등이 있었다. 도시 일각에 세워졌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수십만 권의 문헌이 소장되어 있어서 고대 세계의 두뇌를 집약하고 있었다고 해도 괴언이 아니었다. 사실 의학, 문학, 천문학 등 모든 학문이 이 장소에 모여졌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저명한 건축가의 설계에 따라 그리스 양식을 본받아서 폭 넓은 도로가 바둑판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동쪽 태양문을 들어서면 동서로 달리는 도로의 폭은 30미터의 대도로가 달리고 시내 중앙에는 아고라라 하는 광장을 비롯하여 원형투기장 등이 있었다. 도시의 북쪽에는 왕궁과 묘당이 있고, 남쪽에는 신전이나 공공건물이 배치되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세계의 가장 세련된 대도시였다.
알렉산드리아 내항의 해저 궁전
다시 알렉산드리아 내항에는 안티로도스도라는 작은 섬이 있고 시내에 있던 광대한 왕궁의 이궁인 소궁전이 있었다 한다. 그 작은 섬의 이름의 유래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헤리오스의 청동상이 있던 로도스도를 의식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보다 20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옛날 에게해의 동쪽 끝에 있는 로도스도에는 헤리오스라는 청동 거인의 상이 서있었다.
기원전 3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 거상은 고대 7대 불가사의로 헤아려진다. 그리스문명의 상징적 존재였다.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은 에게해의 로도스도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만내에 뜬 이 자그만 섬에 안티로도스도(로도스에 대항한다는 의미)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만의 앞바다 수백 미터에 뜬 이 자그만 섬 안티로도스도--거기에 서있던 궁전은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휴식을 취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수중에서 인양된 화강암 석주의 단편 등에서 복원된 궁전 이미지는 직선을 주체로 한 중앙 정원을 둘러싼 내향의 소궁전이었다.
거기에는 전통적인 좌우 대칭성으로 일관한 중후한 종교적 색채는 없다. 엄격한 기단도 없는 그 궁전은 휴식과 편안함을 주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궁전 안에는 그녀를 사랑한 로마의 무장 시저와 안토니우스가 애용하던 방도 있을 것이 분명하다.
사라진 파로스의 대등대
클레오파트라가 죽고 수년이 지날 무렵 지리학자였던 스트라본(Strabon BC63~AD23 =고대 로마시대의 그리스계 지리학자. 역사가)은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는데 그 때의 상세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파로스의 대등대 상상도
<지중해로부터 만 입구에 다가가면 우측에 파로스의 대등대가 보인다. 그 높이는 130미터 이상 된다. 그 빛은 50킬로 앞에서도 우러러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더 가까이가면 그 거대한 등대의 모습이 분명해진다.> <등대는 3층의 흰 대리석제의 구조물로 이루어졌는데, 일변이 36미터나 되는 정방형 건물로 바닥에는 무수한 조각상과 기둥이 촘촘히 서 있다.><그리고 그 위에는 34미터나 되는 팔각형이 솟아있다. 좌측에는 로기아스 곳이 보인다.> <거기에는 궁전과 신전 여러 가지의 작은 건물이 임립하고 있다. 그리고 만내로 들어가면 안티로도스도라는 작은 섬이 있고, 이 작은 섬에도 궁전과 작은 선착장을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만은 동쪽으로는 로기아스 곳이 뻗어있고, 서쪽으로는 파로스도가 서있는 듯한 지형에 돌출하고 그 만 입구는 겨우 300미터밖에 안 된다. 게다가 주변에는 암초가 가는 곳마다 있어서 만내로 드나드는 선박으로서는 위험하기 끝이 없는 상태였다.
밤이라도 되면 입항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그 주변의 해저로부터는 좌초하여 침몰한 고대 선박의 잔해라든지 연기에 그은 도자기가 이르는 곳마다 발견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대등대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페르시아를 제압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온 알렉산더대왕은 동서양의 일 중계 기지로서 항구를 알렉산드리아에 건설할 것을 생각하여 약1.3킬로에 있던 파로스도에 제방을 구축하여 본토와 연결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대등대를 건설할 것을 명하였던 것이다. 건설은 대왕이 죽은 후에도 계속되어서 십 수 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완성했다고 전한다.
스트라본이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을 때는 안티로도스도도 아직 바다에 모습을 보이고 파로스의 등대도 알렉산드리아 해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날은 안티로도스섬도 파로스의 대등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티로도스도는 4세기에 일어난 대지진과 대쓰나미로 해저에 잠겨버리고, 파로스의 대등대는 8세기 후반에 일어난 대지진에 의하여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50킬로 밖 해상까지 비추던 대등대의 광원의 비밀은 무엇일까? 또 문헌에 기술된 투명한 돌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여 360도 회전시킬 수 있었던가는 지금도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 대등대의 유적은 클레오파트라의 궁전이 발견되는 1년 정도 전에 파로스도 주변의 해저에서 발견되고 있다. 대등대의 일부라고 보는 거석, 장식품이나 석상 등이 차례차례로 발견된 것이다. 아마도 8세기의 대지진으로 파괴된 일부일 것이다. 그 중에는 40톤이 넘는 거석도 있어서 전설로 전해지는 파로스의 대등대가 얼마나 거대한 건조물이었던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유적 발견의 장애 요소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트라본의 기록이나 고대의 문헌 등에서 알렉산드리아 만내에는 이들 유적이 잠겨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동안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첫째 이유는 만내의 투명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곧 만내는 나일강이 상류로부터 실어오는 토사로 항상 흐린 상태이다. 게다가 풍향이 바뀌면 조류가 변하기 쉽고 바다는 순식간에 거칠어져서 잠수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억지로 잠수한다 해도 해저에는 무수한 부유물이 떠돌아서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두운 바다 속은 강력한 조도의 전등을 비추어도 멀리 비출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이 지금까지 2천여 년 동안 발견을 막아온 것이다.
오늘 날은 하이테크 기기의 사용으로 곤란한 조건 하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는 미라로 하여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무덤은 어디 있는지 아직 모른다. 언제인가 알렉산드리아의 해저에서 그녀의 무덤이 모습을 나타낼 때가 올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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