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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0. 2. 21. 05:06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정복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후 반세기가 지날 무렵 그리스 전토는 다시 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온 <아테네>는 <테로스>동맹의 맹주로서 차차 횡포해지고 다른 폴리스에 대하여 아테네식 사고방식을 강압적으로 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때문에 그리스 각 폴리스는 은밀하게 <아테네>에 대하여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테네>의 이러한 횡포와 태도에 대하여 질투를 느끼고 있던 <스파르타>는 반 <아테네> 폴리스를 묶어 <페로포네스>동맹을 맺고 <아테네>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마침내 <페로포네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내란은 2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스> 전토는 전쟁으로 인하여 황폐해지고 최후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만연되어서 결국 <아테네>가 패배하여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리스> 각 폴리스는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아테네>에는 침략자 <페르시아>를 패망시킨 당시의 기상은 조금도 없었다. 마치 <그리스>는 폐인처럼 되고 말았다.

그런 <그리스>를 구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 북방의 <마케도니아(Macedonia)>였다.

 

<마케도니아>는 그 무렵 은밀히 금광을 수중에 두고 그 덕분에 급속하게 경제력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 증에는 <마케도니아> 사람을 같은 <그리스>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미개한 야만인으로만 여겼었다.

확실히 <마케도니아> 사람은 다른 <그리스> 사람처럼 남하도 하지 않고 유행에 뒤진 보수적이고 말씨도 야만적이며 행동이 비루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 왕 <필립>은 무력을 써서 반 <마케도니아> 세력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그리스> 전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그리스> 전토를 통일한 <마케도니아>는 <코린토스>에서 평화회의를 소집하고 <마케도니아> 주도하에 동맹을 만들었다.

그 이듬해 최초의 연맹회의가 <코린토스>에서 열려 <페르시아>에 대한 복수를 결의하였다. 그런데 얼마 없어 <필립>은 딸의 결혼식장에서 원한을 품은 자에 의하여 암살되고 말았다.

 

<알렉산더>의 등장

 

<마케도니아>의 <필립(Philip)>이 죽자 왕자 <알렉산더>가 약관 20세로 즉시 왕위에 즉위하게 되었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의 왕자로서 BC356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서 한 번은 부왕이 전선에 나가 있을 때에 <페르시아>의 사신을 영접하게 되었는데 <알렉산더>는 사신들에게 <페르시아>에서 오기까지의 노정이라든지 <페르시아>왕의 전쟁관이라든지, <페르시아>인의 용기라든지 체력 등에 대하여 질문하여 어린이답지 않은 조숙함에 부왕을 능가할 왕자라고 알려졌다.

 

알렉산더상

 

한 번은 부왕 <필립>에게 말 장사가 <부케파루스(Bucephalus)>라는 말을 팔러 왔는데, 매우 훌륭한 말이지만 훈련되지 않은 생마라서 누구 한 사람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은 훌륭하지만 매입하는 것을 단념하려 할 때에 가만히 말을 관찰하고 있던 <알렉산더>가 나타나서 <내가 타 보여드리겠다.>하고 말을 빛이 밝은 쪽으로 돌려 세우고 올라탔다. 그리고서는 말은 시키는 대로 잘 따랐다. <알렉산더>는 말이 제 그림자에 놀라서 사람의 접근을 무서워하고 있음에 착안하여 그림자가 보이지 않도록 밝은 쪽으로 향하게 세우고 올라탄 것이었다. 이에 부왕이 매우 기뻐하여 <너는 이 “마케도니아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너의 왕국을 찾아라.”>하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영특한 왕자를 교육하기 위하여 부왕은 BC343년, <알렉산더>가 13살 때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하여 가정교사를 삼아 3년간 철학, 지리, 역사, 윤리, 정치학 등을 배우게 하였다. <알렉산더>는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를 평생 존경하고 그의 도움을 끝까지 받았다.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더>는 부왕의 뜻을 이어서 <페르시아>원정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 때 <알렉산더>는 원정에 앞서서 <델픽(Delpic)>에 가서 신탁을 받으러 갔다. 그런데 마침 그날은 신탁을 받을 수 없는 날이었으므로 무녀의 모습은 <아폴로(Apollo)> 신전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자를 보내어 무녀를 불러오게 하였는데 무녀는 오늘 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여 단호히 신전에 가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진하여 직접 무녀에게로 가서 무녀를 강제로 신전으로 끌고 왔다.

무녀는 <알렉산더>의 강제에 하는 수 없이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어 그의 얼굴을 보면서 체념하여 말하였다. <당신은 절대로 지지 않을 분이다.--.>

<알렉산더>는 이 말을 듣자 손뼉을 치며 기뻐하여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것으로 신탁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 이 말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말이다. 이제 그 말이 마침 무녀의 입에서 나왔다.>

이 에피소드는 <알렉산더>의 혈기 왕성한 일면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페르시아> 원정 준비

 

이리하여 <페르시아>에 대한 복수라는 구호 아래 원정군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헬라스(Hellas)> 연맹 하에 여러 포리스로부터 병사와 군선 자금이 차출되었다. 그 결과 <알렉산더>에 주어진 것은 3만5천의 보병, 5천의 기병이었다. 그것은 <마케도니아> 병사가 주축이 된 그리스 연합군이었다. 해군은 주로 <헬라스>연맹이 준비한 삼단도선 160척 정도였다. 그러나 연맹이 준비한 자금은 적어서 부채를 져야 하게 되었다. 그가 지휘하는 삼단도선의 노 저을 사람에게 줄 임금만으로도 상당한 금액이 되어서 원정은 처음부터 자금이 부족한 채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병들에게서 불만의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토지,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알렉산더>가 너무나 흔쾌하게 부하에게 주는 것을 본 장군 한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노라면 왕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터인데 그래도 좋습니까.>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에 대하여 <알렉산더>는 <나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으니까 좋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알렉산더>. 지휘하의 원정군은 150년 전에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했던 때의 역순으로 <헬레스폰트(Hellespont)> 해협을 건너서 소아시아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때 그의 군대는 30일분의 식량밖에 없었다고 하니 자금이나 식량은 현지에서 조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군의 형세

 

메소포타미아 지방 입구에 있는 <잇수스(Issus)>라는 곳까지 진격한 <알렉산더>의 군단은 처음으로 <페르시아>의 대군과 상대하게 되었다. <페르시아>군은 60만이라고 했다. <그리스>군을 훨씬 능가하는 대군이었다. 이 거대한 <페르시아>군을 <다리우스 3세>가 출진하여 지휘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페르시아>군은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내의 여러 곳에서 모아졌고 억지로 끌려나온 병사들의 사기는 낮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 중에는 서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이민족이 다수 포함되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에 반감을 가진 그리스의 용병부대가 <다리우스3세>를 호위하고 있었을 정도이다.

그런 이유로 <페르시아>군은 규모는 크지만 하나로 뭉쳐 큰 힘을 낼 수 있는 군대는 아니었다.

<페르시아>군은 150년 전에 그리스를 공격할 때 같은 힘은 없고 하나의 오합지졸이었다.

게다가 <다리우스 3세> 자신도 귀족으로 자라서 우유부단하고 겁쟁이였다고 하니 최고 지휘관으로서 자질이 떨어졌었다. 사실 근래에 호화로운 생활에 물든 <다리우스>는 전장에서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하여 다수의 첩과 왕녀를 비롯하여 모든 호사스러운 가구 등을 가지고 갔었다. 망하기 직전의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페르시아>군과의 접전

 

기원전 333년에 <잇수스>에서 양군은 <비나(Pina)>강을 사이에 두고 대체하는 형국이 되었다. 여기서는 좌측에는 지중해 우측에는 <아마노스(Amanosu)>산지에 끼인 좌우 4 킬로 정도의 평지가 전장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우익의 기병을 인솔하여 도강하고 대안에 포진한 <다리우스 3세>의 본진을 목표로 강한 세력으로 <페르시아>군 중앙부를 집중 공격하였다.

<알렉산더> 자신이 선두에서 적진으로 돌격하는 육탄전이었다. 이때의 모습이 <폼페이>에서 발견된 벽화에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투는 격했고 <알렉산더>는 이 때 대퇴부에 부상을 받았다.

<다리우스 3세>는 좌우에 낫이 달린 전차를 타고 지휘하고 있었는데 <알렉산더>가 이끄는 기병이 아수라처럼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고 갑자기 무서워져서 겁먹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페르시아>군은 도망치는 자가 속출하여 곧 붕괴하고 말았다.

<다리우스 3세>가 도망친 후에는 수많은 전사자, 호사스러운 가구류와 재보, 대량의 식량이 남겨졌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다리우스 3세> 자신의 어머니, 아내. 두 사람의 딸마저 버린 것이다. 이런 사실은 <다리우스 3세>의 인간성을 잘 말해준다. 

당연히 그녀들도 전리품의 하나로서 <알렉산더>의 수중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그 아름다운 왕비들에게 손 하나 대는 일 없고 왕족으로서 정중하게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페르시아>를 통치할 때에 <페르시아>인의 협력이 필요함을 생각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잇수스>의 전투는 겨우 반나절이 되지 않아서 <알렉산더>의 대승리로 끝났다.

그 후 그는 도망친 <다리우스 3세>를 공격하지 않고 군단의 진로를 <이집트>로 향했다. <잇수스>전투에서는 승리했다고 해도 지중해에는 다시 강력한 <페르시아> 함대가 건재하여 <그리스> 병참 기지를 위협하였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인 여러 도시를 함락시키고 다시 <이집트>를 제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페르시아>의 멸망과 수도 입성

 

이리하여 약 32년간에 걸쳐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를 해방하고 후환을 없앤 <알렉산더>는 다시 <다리우스> 3세와 싸우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그는 <시리아>를 북쪽으로 나아가서 <유프라테스> <티크리스> 두 강을 건넜으나 거기서 <페르시아>군의 전초부대를 만났다 그리고 <다리우스 3세>는 <가우가멜라(Gaugamela)>라는 마을에 진을 치고 있음을 알았다.

이곳은 넓은 평야로서 <알렉산더>는 수년간 지형을 잘 조사하여 신중하게 작전을 짰다. 한편 상대하는 <페르시아>군은 5만의 <그리스>군의 배가 되는 대군으로 코끼리 일군을 비롯하여 양쪽에 낫이 달린 전차대까지 있었다.

바야흐로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 양군을 노려보는 채로 하루를 보냈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이 야습해 올 것이라 믿고 전 부대를 완전무장한 채로 철야하여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스> 군 진영은 무서울 정도로 침묵했다.

이에 반하여 <페르시아>군 진영은 몇 백 몇 천이라는 횃불이 밤새 밤하늘을 밝게 하는 이상한 광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횃불이 타는 소리에 섞여 코끼리나 말들이 지르는 소리, 모든 무구, 갑주가 부딪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의 야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군은 야습은 하지 않았다. <페르시아>군은 철야 하였으므로 피곤에 빠져 있는 새벽에 <그리스>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먼저 <그리스>군의 좌익이 진격해 왔다. 이에 호응하여 <페르시아>군의 우익이 접촉하였다. 이것은 <알렉산더>의 양동작전의 일부였는데 <페르시아>군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이윽고 <페르시아>군의 좌익이 이동을 개시할 무렵 중앙에 작은 틈이 생겼다. <알렉산더>는 여기야말로 하고서는 정예 기병대를 그 틈에 쐐기를 박듯이 쳐들어간 것이다. 전력을 집중시켜 중앙을 돌파한다는 작전은 그의 가장 뛰어난 작전이었던 것이다.

철야하여 피곤해진 <페르시아>병들은 분단되고 혼란 상태에 빠졌다. 그에 비하여 <그리스>군은 대단한 공격을 가했다. 전진은 솟아오르고 시계는 막혔다. 중앙에서 지휘하던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의 격한 공격에 두려움을 느껴 전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큰 낫이 달린 전차를 타고 있었으므로 전사자의 시체에 걸려서 마음대로 도주할 수도 없었다. 공포에 질린 <다리우스 3세>는 지휘해야 할 일마저 잊고 전차를 버리고 말을 타고 도주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결전으로 여겼던 <가우가멜라(Gaugamela)> 회전은 승리하였다. 그는 다시 <페르시아> 대군을 상대로 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교활한 <다리우스 3세>는 수 시간의 전투에서 패하고 사실상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한 것이다. 기원전 331년 10월 1일의 일이었다.

그 후 <바빌론> <수사>에로 진군 했으나 도시의 저항은 일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알렉산더> 군을 환영하였다. 그래서 그는 무혈 입성하게 되었다. 모든 막대한 재보가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것은 몇 천 몇 만이라는 수의 가축과 낙타 그리고 거액에 달하는 금화와 재보였다 한다.

기원전 331년 1월 중순 마침내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제국의 수도 <페르세포리스>에 입성했다.

 

<페르시아> 왕궁 <페르세포리스> 방화 소진

 

페르세포리스 유적지

 

<페르시아>의 수도에 입성한 후 그는 의외에도 이 도시를 점령한 직후에 부하인 <마케도니아>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가했다. 약탈은 하루 온종일 행해졌는데, <마케도니아> 병사들끼리 약탈한 물건을 서로 빼앗으려고 하다가 목숨을 잃는 일까지 벌어졌다. 약탈은 점점 고조되어 고가의 공예품이나 조상은 부서지고 각자가 그 파편을 가져가는 형편이었다. 주민들은 만나는 대로 살해당하고 여성은 장식품을 몸에 달고 있는 채로 끌려가서 노예가 되었다.

<알렉산더>는 왜 여기서 약탈행위를 허가했는가. 그는 <바빌론(Babilon)> <수사(Susa)>라는 대도시를 점령하고도 약탈을 허용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 <알렉산더>의 행위는 장병에게 점차 불만과 스트레스를 축적시키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이 시대에 군대는 적의 도시를 함락했을 때 병사들에 의한 약탈은 병사들의 당연한 권리로 여겼다. 그는 이런 병사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욕망을 확장시켜 새로운 원정에서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에는 약탈을 허용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약탈이 끝나고 4개월이 지날 무렵 <알렉산더>는 도망친 <다리우스 3세>를 추격하여 새로운 원정을 개시하게 되어서 그 전날 <페르세포리스>에서 화려한 연회를 베풀었다. 장병들은 환락과 통음으로 다들 만취하였다. 이때 동석하고 있던 <아테네> 출신 유녀 <타이스(Tice)>가 일어나서 대연설을 하였다.

<만일 ‘알렉산더’ 대왕님이 우리들과 함께 행렬을 짜고 왕궁에 불을 질러 <페르시아>인의 영광을 일순에 지워버린다면 옛날 <아테네>를 불태워버린 <구세르구세스(Xerxes)>에게 원수를 갚게 됩니다. 반드시 훌륭한 일이라고 대왕의 이름은 후대에까지 전해질 것이다.>

이 유녀의 말에 술로 이성을 잃은 장병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누군가는 <그리스>인에게 행한 모독행위에 복수를 하자고 부르짖자 이에 선동되어 지금이야말로 승리의 행렬을 짜지 않겠느냐 하고 사람마다 소리 지르는 것이었다.

순간 많은 횃불이 당겨지고 행렬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 행렬의 선두에는 술에 취한 <알렉산더>였다.

그는 <나를 따르라!>하고 소리 지르며 횃불을 들고 궁전 내의 복도를 나아갔다. 그의 뒤를 횃불을 가진 유녀 <타이스>와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따랐다. 그리고 노래와 피리, 북을 울리며 왕궁의 벽을 시작으로 모든 것에 불이 붙여졌다. 

이렇게 불이 붙은 왕궁은 불길에 휩싸이고 번져서 하늘을 태울 것 같은 기세로 밤하늘에 불똥이 날리곤 하였다.

처음에는 미친 듯이 바라보고 있던 <알렉산더>였는데 이에 이르자 갑자기 술이 깨어서 자신이 한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아 서둘러 불을 끄려 하였으나 이미 끝난 일이 되고 말았다.

 

<페르세포리스(Persepolis)>는 <페르시아>제국의 영광의 서울로서 그 왕궁 건설에는 <다리우스><구세르구세스> 부자 2대에 걸쳐 수십 년을 들여 건설했다고 한다. 그런데 기원전 331년 한 사람의 독재자 <알렉산더>의 주정으로 그 장려한 서울은 하룻밤 사이에 소진하여 재가 되고 말았다. 사실 현재에도 <페르세포리스> 유적에서는 당시 불탄 자취인 재가 대량 나온다고 한다.

분명히 그로서는 역사적이라 할 만한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알렉산더>와 술

 

역사가들 중에는 이 사건이야말로 그의 인격적 타락의 시작이라고 단정하는 자가 적지 않다. 확실히 <알렉산더>는 군사적으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용기, 신속성, 포로에 대한 관대함 등 모든 것이 일급이었다. 그러나 도가 넘치는 술을 좋아하는 성격은 모든 미덕을 지워버릴 정도였다.

보통은 유쾌함과 선의로 결점이 없는 <알렉산더> 대왕이었지만, 술을 마시면 사람이 달라져서 자기 자랑과 남을 불쾌하게 하고 만다. 칭찬을 하면 그에 놀아나서 그의 표변함에 당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신 후에는 입욕을 하고 낮까지 잠을 자고 때로는 하루 종일 잠을 자는 일도 있었다. 행군 중에도 숙취로 지휘관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은 정도였다.

 

 

알렉산더가 정복한 영역

 

<페르시아>가 멸망한 후 동방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고참 장병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마침내 어느 날 밤 주석에서 동방정책을 둘러싸고 무장인 <크레이토스(kratos)>와 격하게 논쟁하다가 충동적으로 <크레이토스>를 찔러 죽여버린 일이 있었다. 술이 깨고 나서 <알렉산더>는 매우 슬퍼했다 한다.

그로부터 1년 후에는 <알렉산더> 암살 미수 사건이 있었고, 체포된 10대의 젊은이는 재판에서 그가 술에 취하여 행한 횡포에 견디지 못한다고 죽음을 각오하여 동기를 밝히기도 하였다.

다시 그가 원정 중에는 열병으로 쓰러진 것도 술을 과음해서 체력이 쇠약해졌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기원전 323년 6월 11일 <알렉산더>는 죽었다. 그가 동방 원정을 개시하여 11년 후의 일이었다.

 

<알렉산더>의 역사적 공과

 

<알렉산더>는 <그리스>를 정복한 아버지 <필립>의 뒤를 이어 <그리스> 제국을 평정하였다. 그 후 동방원정 사업을 개시하여 <페르시아>로 진격하여 <다리우스 3세>의 대군을 격파하고 다시 동방원정으로 중앙아시아, 북서인도에 이르는 세계제국을 실현하였다. 정복지마다에서 그 제도와 관행을 존중하고 동방민족주체의 신제국을 편성하여 <그리스> 용병의 식민지 정주정책 등으로 동서의 융합을 목표로 하는 동방 융합정책을 취하였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수사>에서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수 천 명을 집단 결혼식을 올렸고, 스스로도 죽은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3세>의 장녀와 결혼하여 동방융합정책을 추진하려 하였다. 이로써 동서교류가 활발해지고 헬레니즘문화라는 풍요로운 세계문화가 개화하게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를 낳게 한 <알렉산더>이지만 <페르세포리스>를 불태운 대파괴의 사실을 볼 때 그의 인간성의 약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의 숨겨진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가 죽은 후에 그 <다리우스 3세>의 딸인 왕비는 <박로리아>에서 결혼하였었는데, <알렉산더>의 정처인 <로쿠사네(Rokusane)>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Olympia)>는 살아남았으나 얼마 없어 그리스의 권력을 노린 <가산드라>에 의하여 암살되고 그 때 <로쿠사네>와 <알렉산더>의 아들도 암살당하여 그의 혈육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