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포레온’ 이야기
이야기 1, 정권을 잡기까지
1 나포레온의 등장
나포레온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의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가 어떻게 해서 프랑스황제가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에 대한 내력을 알아보자
나포레온 보나파르트는 1769년 코르시카(Corsica)섬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코르시카란 이탈리아 반도의 서쪽에 두 개의 섬이 있는데 북쪽의 작은 섬이 코르시카섬이다.
지금은 프랑스 영토로 되어 있으나 이전에는 이탈리아의 비자나 제노바의 영토였던 때도 있었다. 나포레온이 태어나기 직전에 제노바(Genova)영에서 프랑스영이 되었다.
코르시카 사람들은 프랑스 영이 되어서도 독립운동을 했을 만큼 나포레온이 살았던 시대는 프랑스인으로서의 자각이 별로 없었다.
나포레온 자신도 프랑스인으로서의 자각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인물이 후에 프랑스 황제가 되었으니 역사란 재미가 있는 것이다.
나포레온은 어쩌다가 코르시카가 프랑스영이 되어서 법률상으로는 프랑스인이 된 것이다. 가난한 귀족이 출세하는 길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년 나포레온은 수도 파리에 나가서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군대란 두 종류의 인간으로 구성되었다. 무기를 가지고 적군의 정면에서 싸우는 병(兵)과 그 병을 지휘하고 작전을 세우고 명령을 내리는 장교, 사관이 있다.
병은 명령을 받아서 움직일 뿐이니까 체력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장교는 전술, 용병 등 지식이나 기능, 경험을 몸에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전문교육이 필요하다. 그런 교육기관이 사관학교이다. 나포레온은 이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이 일어나기 전이다. 앙시엔 레짐(Ancien régime=구체제, 프랑스혁명 이전의 브루봉조기. 특히 16~18세기의 프랑스 사회, 정치체제)의 프랑스였다. 장교가 될 수 있는 신분은 귀족뿐이다. 따라서 사관학교에 입학 할 수 있는 사람도 귀족의 자녀뿐이다. 나포레온은 코르시카섬에서 태어났으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2. 사관학교에서의 생활
학교에서의 나포레온은 어둡고 눈에 띄지 않은 소년이었다. 말이 없고 친구도 없었다. 말이 없었던 것은 나포레온의 오만한 성격으로 급우들을 업신여겼다든지 사투리가 심해서 말을 하면 급우들이 놀렸다든지 양쪽 모두였을 것이다.
성적도 사관학교 졸업 시에는 58명 중에 42번째였다고 하니 전혀 우수한 성적은 아니다. 학교 성적이 사회의 성적이 아니라는 표본이 되는 예이다.
당시 사관학교에는 3과가 있었다. 기병과, 보병과, 포병과이다. 가장 인기가 높았던 과는 기병과이고 다음이 보명과이며 가장 인기가 없었던 과는 포명과였다.
포병과는 생겨서 얼마 안 되는 학과로서 무거운 대포를 전장에서 끌고 탄환을 장전하는 것이 그리 보기에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포레온은 이 포병과였다. 후에 나포레온은 이 대포를 전술에 잘 활용하여서 거듭 승리하였다.
3, 소년 장교로 출발
1784년 나포레온은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프랑스왕국의 장교로서 출발했다. 이 때 나이가 16세였다. 귀족출신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데에서 16세에도 부대를 지휘할 자격이 주어어진 것이었다. 앙시엔 레짐(Ancien régime=구체제, 프랑스혁명 이전의 브루봉조기. 특히 16~18세기의 프랑스 사회, 정치체제)의 귀족의 특권이라고 생각 된다.
나포레온이 군인이 되어서 6년째 1789년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었다.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국외로 망명하는 귀족이 증가하였다.
군 장교는 모두 귀족출신이니까 망명자 중에는 군 장교도 있었다. 또 혁명에 비협력적인 지휘관은 군에서 퇴출되어 처형되었다. 장교가 극히 감소하였다. 혁명정부에 충실하고 부지런한 장교는 출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자고방〔Jacobins=프랑스혁명시대에 파리의 자고방수도원을 본부로 한 정치결사로서, 단동( Danton.1759년~1794년),마라(Marat、1743년~1793년),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1758년~1794년)중심, 독재정치시행〕독재 시기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본위로 장교를 발탁하였다.
나포레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출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먼저 자고방파의 독재를 지지하는 내용의 책을 자비로 출판하였다. 그것으로 자고방파에 접근하여 로베스피에르의 동생과 잘 알게 되어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다시 투론(Toulon)이라는 항구 도시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군과 왕당파의 반란을 격퇴하는 공적을 세웠다. 그래서 25세에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혁명기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승진이었다.
4, 좌천과 조세핀과의 만남
출세가도를 달리는 나포레온에게 하나의 함정이 있었다. 테루미도르(Therumidor)의 쿠데타였다. 이 쿠데타로 자고방파의 독재가 끝났다. 그뿐 아니라 나포레온 자신도 자고방파라는 이유로 체포당하였다. 곧 석방은 되었으나 좌천당하였다.
이 불우한 시기에 나포레온은 부활의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유력자인 사론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교계를 드나들었다. 이때에 그의 눈에 든 여자가 조세핀이었다.
조세핀(Joséphine de Beauharnais, 1763년 6월 23일 ~ 1814년 5월 29일)은 귀족 출신의 미망인으로 나포레온보다 6세 위였다. 그녀의 남편은 자고방파 독재로 처형된 신분이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나포레온과 알게 된 당시에는 바라스( Barras, 1755년~1829년) 라는 애인이 있었다.
나포레온은 그런 것은 일체 생각하지 않고 그녀에게 반하고 말았다. 조세핀의 애인인 바라스라는 사람은 대물 정치가로서 후에 독재정권의 총재가 되는 실력자였다. 이 바라스가 나포레온의 투론 반란 진압의 역할을 잘 기억하고 있어서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5, 반데미에르 반란 진압
1795년 10월 반데미에르 반란(Vendémiaire=1975년 10월 20일에 발생한 왕당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세력의 봉기인데 무력 진압되었다. 그 시기는 프랑스 혁명기였다.)이라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왕당파가 파리의 중심부에서 일으킨 무장봉기로 시가의 중심에서 일어난 반란인 만큼 정부도 진압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이때에 바라스는 나포레온에게 그 진압을 명하였다.
이 공적으로 나포레온은 군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이때 나이는 26세였다. 군사령관이 된 나포레온은 바라스에게 대포를 써도 되는지를 물었다. 도시 중심에서 대포를 쓴다면 무고한 시민이 희생될 것인데도 결국 사용 허가를 받았다. 나포레온은 대포를 사용해서 보기 좋게 반란을 진압하였다.
1795년 10월 총재정부가 성립되었다. 나포레온이 반데미에르반란을 진압한 직후였다. 바라스가 이때에 5인의 총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6, 조세핀과의 결혼과 이탈리아 원정
1976년 나포레온은 이탈리아방면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제1회 대불대동맹과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경유하여 프랑스로 향해서 오는 오스트리아군을 치는 것이 나포레온의 임무였다.
나포레온은 이탈리아의 봉건제도를 부수고 이탈리아 민중에게 프랑스처럼 <자유> <펑등>을 주자 고 말하였다.
나포레온의 대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탈리아 원정 출발 직전에 나포레온은 조세핀에게 구혼했다. 조세펜은 애인인 바라스의 권유에 따라 결혼을 승낙하고 결국 결혼하였다.
나포레온군은 이탈리아에서 연전연승하였다.
나포레온군이 연전연승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포레온은 원정군에게 이렇게 연설하였다.
“공세로 나가자. 무기도 식량도 적지에 있다. 적지의 민중을 압정에서 해방하자. 우리들은 혁명군이다.”
그 당시에는 유럽에서 프랑스만이 혁명에 의하여 봉건제도, 신분제도가 없어지고 시민에 의한 정부가 세워졌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포함한 그 이외의 지역은 봉건제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평민계급 곧 농민이나 시민은 귀족, 영주에 의하여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억압당하고 있었다.
프랑스처럼 이탈리아의 평민도 봉건제도는 싫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봉건영주 계급의 힘은 아직도 강하였다. 다시 그 배후에는 오스트리아군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혁명을 일으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에 나포레온군이 와서 오스트리아군과 싸워준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봉건제도를 없애준다고 했다. 곧 프랑스혁명을 이탈리아에서도 일으켜준다는 셈이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 민중은 프랑스군을 환영하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탈리아는 적지가 아니다. 거꾸로 이탈리아를 누르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인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다. 지역의 이로움은 프랑스 나포레온에게 있다. 원정지의 주민의 협력이 있으므로 병사의 식량이나 말의 사료도 간단히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었다.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으므로 부대의 짐은 오스트리아군에 비하여 가벼웠다. 짐이 가볍다는 것은 이동속도가 빠르다는 뜻이다. 나포레온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부대를 집결시켜 타격을 줄 수가 있었다.
최종적으로 나포레온의 원정군에 패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화약을 맺고 제1회대불대동맹(First Coalition,=1793년- 1797년간의 프랑스혁명을 위협으로 느낀 유럽 제국이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하여 결성한 동맹)은 붕괴하였다.
프랑스에서 나포레온의 인기는 급상승하였다. 나포레온 자신도 자신의 군사적, 정치적 재능에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7, 이집트 원정
프랑스로 돌아온 나포레온은 이번에는 스스로 새로운 군사작전을 제안하였다. 그것은 이집트 원정이었다.
프랑스 국경 가까이 쳐들어오는 외국군과 전쟁을 한다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왜 이집트인가?
프랑스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닌가. 총재정부의 지도자들도 어째서 이집트를 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하여 나포레온은 말하였다.
“프랑스의 적은 항상 영국이다. 제1회대불대동맹도 영국이 주도하여 결성되었다. 영국에 타격을 주지 않으면 프랑스의 안정과 발전은 없다. 그 영국은 영국의 식민지 인도와의 무역으로 이익을 올리고 있다. 이집트는 영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중계지이다. 따라서 이집트를 프랑스의 지배하에 둠으로써 영국에 타격을 가할 수가 있다.”
결국 나포레온은 현실적으로 이집트를 누른다고 해도 영국에 얼마나 타격을 가할 수 있을는지 의문을 가진 반대파를 누르고 이집트 원정을 인정받았다. 병력은 5만 8천명이었다.
나포레온의 주장은 하나의 구실로서 이집트를 원정함으로써 나포레온의 명예욕 공명심에서 계획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무렵에 그는 자신을 영웅이라고 믿고 고대 그리스의 영웅 알렉산더대왕과 자신을 오버랩시킨 듯하였다. 알렉산더도 동방원정을 함으로써 이집트를 정복하고 있다. 그것을 그 자신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알렉산더는 동방원정 때에 학자를 많이 데리고 갔었는데 나포레온도 그것을 본받아서 고고학자 등 165명을 데리고 갔다. 당시 유럽은 오리엔트 붐으로 이집트에 대하여 관심이 높았던 것 같다.
나포레온이 데리고 간 학자들이 이집트에서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을 발견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로제타스톤의 비문에서 고대 이집트의 신성문자가 해독된 것이다.
프랑스군은 이집트에서도 피라미드 전투라는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이 전투 전에 나포레온은 병사들에게 연설하였다.
“피라미드 위에서 4천년의 역사가 제군을 내려다보고 있다.”
요소요소에서 정해진 세리프로 병사들의 마음을 불태우는 재주에 뛰어났다.
그런데 영국은 육군의 싸움에서는 프랑스군을 이길 수 없으나 해군은 강하였다. 이집트의 아부키르 만(Aboukir Bay)에 있던 프랑스해군을 공격하여 이것을 격멸시켰다. 배가 없으면 이들이 프랑스로 돌아갈 수가 없다. 나포레온군은 이집트에서 고립되었다.
8, 이집트 탈출과 정권을 잡음
다시 영국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제국 등과 제2회대불대동맹을 결성하였다.
그 결과 다시 제외국의 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쳐들어가서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에게 패하였다. 이런 위기 속에 총재정부는 강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빈번히 정변이 일어났다. 그래서 강한 지도력을 가진 지도자를 구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이집트에서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싸우고 있는 나포레온에게 프랑스 국내의 정세가 알려졌다. 그는 몇 사람의 측근만을 데리고 몰래 이집트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향하였다. 정부가 나포레온에게 귀국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나포레온 제 마음대로의 행동이었다. 이는 분명히 군기 위반이었다.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를 두고 간 것이었으므로 군인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포레온은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정치가로서 행동한 것이었다. 이 기회에 자신이 권력을 잡자는 것이었다.
이때 마침 형편이 좋았던 것은 나포레온의 아우가 의회의 의장이었다. 1799년 11월 파리에 돌아온 나포레온은 아우의 협력을 얻어서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았다. 결국 군의 힘을 배경으로 총재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잡았다. 이 사건을 <브루메이르(Brumaire) 18일 쿠데타>라 한다.
이후로 1811년까지 나포레온이 프랑스의 독재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이야기 2 -나포레온의 대륙지배-
1, 독재 체제 확립
총재정부를 타도한 나포레온은 새롭게 통령정부를 조직했다.
3명의 통령을 두었으나 나포레온이 제1통령이 되어서 다른 2명의 통령은 나포레온이 시키는 대로만 하였다. 그래서 실제로는 나포레온의 독재였다.
프랑스의 지배자가 된 나포레온의 정치는 어떠했는가.
외교면에서 1802년 영국과 아미안조약(Peace of Amiens)을 맺어서 영국과의 화평을 이루고 제2회 대불대동맹을 해체시켰다. 오랜 동안의 숙적이었던 영국과의 화평이 이루어진 것이다.
내정으로는 1800년 정부의 중앙은행인 프랑스은행을 설립하여 통화와 경제 안정을 기하고 프랑스 산업의 발전을 위한 기초를 만들었다.
1801년에는 종교협약으로 프랑스혁명 이래 적대시하고 있던 로마교황과 화해했다. 프랑스인은 거의 로마교회의 신자였으므로 이것은 많은 국민의 신앙심을 만족시켰다.
이러한 성과를 배경삼아서 1802년에는 종신통령이라는 지위에 취임하였다.
나포레온은 독재자이기는 하지만 프랑스혁명 때에는 자고방당을 지지하기도 한 일이 있는 사람이다. 프랑스혁명의 진보적인 이념이나 이상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성과를 지키는 것이 프랑스의 발전에 빠질 수 없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독재자이면서 자유, 평등을 지킨다는 것은 모순되지만 나포레온으로서는 이 두 가지가 성립되었다.
혁명의 성과를 지킨다는 면에서 나포레온은 1789년의 혁명 이래 프랑스 정부가 낸 법령을 집대성하였다. 이것이 <나포레온 법전>이다. 1804년에 제정되었다.
나포레온은 이 법전으로 브루쥬아지(Bourgeoisie=시민혁명에서 혁명의 주체가 된 도시에서의 유복한 상공업자)의 정치 경제의 지배권을 확정하였다.
2, 황제 즉위와 영국과의 전쟁
1804년 나포레온은 황제가 되었다. 황제라는 칭호는 나포레온 1세 이후 1814년까지 프랑스의 정치체제를 제1제정이라고 한다.
원래 황제란 세습적인 지위이기 때문에 프랑스혁명의 민주주의적인 이념 하고는 모순이 되므로 나포레온은 즉위 직전에 국민투표를 행하여 <내가 황제가 되는 데에 대하여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를 물었는데 결과는 압도적으로 찬성이 다수였다.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혁명 이래 민주적 전통은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포레온의 즉위는 주변국을 자극하였다. 다시 영국 주도로 제3회 대불대동맹이 결성되었다. 이에 참가한 나라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이었다.
영국은 아미안 조약을 파기하고 다시 프랑스와 여러 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주적은 영국이었으니까 나포레온은 먼저 영국 상륙적전을 실시하였다.
1805년 10월 33척의 프랑스 함대가 스페인의 카디스(Cadiz)항에서 출격하였는데 바로 영국 함대와 조우하여 해전이 벌어졌다.
이것이 유명한 <트라팔가(Trafalgar)해전>이다. 영국함대는 27척으로 함대 수로서는 열세였는데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다. 프랑스는 침몰 3척, 포획 17척, 도망 13척인데 대하여 영국은 상실선이 하나도 없었다.
영국 함대 사령관은 넬슨제독이었다 이 사람은 전투 중에는 항상 갑판에 서서 자신의 위세를 부하들에게 보이고 사기를 진작시켰다. 모습을 드러내면 당연히 적의 공격을 받을 터이니 매우 위험하다. 실제로 이전 전투에서는 오른쪽 눈과 오른팔을 잃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도 부하들은 위험하므로 갑판에 나서지 않도록 말렸으나 여느 때처럼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전투에는 승리하였으나 자신은 전사하였다.
이런 죽음으로서 인기가 높아지지 않을 수가 없다. 넬슨은 영국의 영웅이 되었다. 런던에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이라는 공원이 있어서 거기에 넬슨의 동상이 세워졌다.
3, 오스트리아 공격
해군이 대패했으므로 나포레온은 영국 상륙작전은 단념하였다. 전쟁에서 승리를 계속하는 것이 나포레온의 인기를 높이고 권력의 근본이었으므로 다음은 나포레온 자신이 직접 군을 지휘하여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였다.
트라팔가 해전 패배 2개월 후인 1805년 12월에 오스텔리스(Austerlitz)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패퇴시켰다. 연합군의 병력은 9만 프랑스군 병력은 7만 4천이지만 승리한 것이었다. 이 전투에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황제도 직접 참가하였었다. 그래서 이를 삼제합전이라고 한다.
이후 나포레온은 유럽 각지에서 승리하여 영국, 스웨덴, 오스만제국 이외의 지역을 거의 세력 범위 안에 넣었다. 그래서 프랑스 국가의 이익이 되도록 국경을 새로 긋거나 속국을 건설하거나 하였다. 속국으로 할 수 없이 큰 나라인 오스트리아나 러시아는 동맹으로서 프랑스의 영향 하에 두었다.
어느 지역이 어떻게 되었는지 대강을 보기로 한다.
1806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여 독일의 소국을 모아서 라인 동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프랑스의 지배하에 두었다.
최후까지 나포레온에게 저항한 프로이센과 러시아도 1807년 틸시트 조약(Peace of Tilsit)으로 프랑스에 굴복하였다. 나포레온은 프로이센 영토의 절반을 빼앗고 여기에 바르샤바 대공국을 건설하여 프랑스의 속국으로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 등 친척에게 네덜란드나 이탈리아. 스페인의 국왕으로 임명하여 유럽 대륙을 거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 사이에 1806년 프로이센에 승리하여 수도 베를린에 입성한 나포레온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명령을 내었다. 곧 대륙봉쇄령이다. 별명으로 베를린 칙령이라는 법률이다. 나포레온 지배 하 및 동맹관계의 여러 나라에 대하여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법률이다.
군사적으로 영국을 정복 할 것을 체념한 나포레온은 유럽대륙과의 무역에서 영국을 폐쇄시킴으로서 경제적으로 영국을 괴롭히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나포레온의 전쟁이 최종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법률이다. 결국 영국으로 하여금 프랑스와 무역을 하게 함으로써 프랑스의 산업발전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4, 후계자가 필요했다
나포레온은 프랑스 황제가 되고 유럽을 지배하에 두었으나 조세핀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후계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조세핀과는 이혼을 하고 1810년 오스트리아황제의 딸 마리아 루이사(Maria Luisa,1791년~ 1847년)와 결혼하였다. 마리 루이사는 18세이고 나포레온은 40세였다. 결혼 후 이듬해에 아들을 낳았다. 이 시기가 나포레온의 절정기였다. *
이야기 3 -몰락의 시작-
1, 나포레온 프랑스군의 강함
나포레온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압도적으로 강하였다.
짧은 기간 내에 전 유럽을 그 지배하에 둘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군이 매우 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프랑스군은 어째서 그렇게 강했을까?
첫째 프랑스군은 사기가 높았다.
병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쟁에 대한 자각심이 강하였다. 그 이유는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추상적으로는 <혁명의 성과>이고 구체적으로는 <토지>였다.
프랑스 혁명에 의하여 봉건제도가 없어진 프랑스는 자고방파의 정책으로 망명귀족의 영지가 정부에 몰수되어 많은 서민이 이것을 분배받았다. 프랑스가 대불대동맹군에게 패한다는 것은 프랑스에 왕정이 복귀되고 망명귀족들이 돌아와서 모처럼 손에 넣은 토지를 잃게 되는 것이었다.
혁명에 의하여 손에 넣은 토지와 자유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 프랑스인의 마음이었다. 그것이 바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것이었다.
비록 자신은 전장에서 죽는다 하여도 내 집의 토지는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필사적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프랑스군이 강했던 최대의 이유였다. 당시 프랑스는 러시아를 제외하면 최대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병력의 수로 봐서도 제일 강했다.
그러면 다른 나라는 어떠했는가? 그들은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이거나 프로이센 같은 나라는 농민을 무리하게 징집한 군대였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싸우는 병사가 아니었다.
그러니 발미(Valmy)의 전투(1792년 9월 20일에 일어난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투로서 프랑스군이 승리함)에서는 프랑스 의용군의 절규소리를 듣고 프로이센군은 무서워서 퇴각했다고 한다.
둘째, 프랑스군에게는 점령지, 정복지의 민중의 협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적의 영토에서 행해지는 압정에서 민중을 해방시킨다. 우리는 혁명군이다.”하고 말하듯이 나포레온은 자유, 평등을 기치로 내걸고 행하는 전쟁이었다.
적국에 가서도 그 적은 민중이 아니고 적국의 지배계급인 봉건영주이거나 귀족이었다. 민중은 나포레온 편이 되었다. 평민계급인 민중은 나포레온군대가 자기 나라에 쳐들어와서 봉건제도를 타도해줄 것을 기대하였다.
셋째, 나포레온은 기동력을 중시하였다.
항상 적보다 먼저 전장에 도착하여 적군이 집결하기 전에 적을 공격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군 4만과 러시아군 6만 이 전투를 한다고 하면 병력으로는 프랑스군이 열세이다. 그러나 6만의 러시아군이 모두 도착한 것은 아니다. 군대는 부대별로 제각기 길을 찾아서 서서히 집결하게 된다.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이 집결하기 전에 행군을 마치고 적을 공격한다. 그러면 수적으로 열세이지만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프랑스군은 어째서 빨리 이동할 수가 있었는가. 병사들이 달리는 것이다. 프랑스군은 사기가 충천하고 싸울 의지가 있으므로 열심히 달린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
“황제는 우리들의 발로 승리하였다.”
또 프랑스군은 밤이나 비가와도 행군이 가능했다. 프랑스군은 짐이 없으니 장비가 가벼웠다. 그러니 달릴 수가 있다. 필요한 물자는 현지에서 조달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곧 적국 민중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동력을 발휘하여 병력을 집중시키고, 중앙을 돌파하고 각개 격파로 승리하였다. 다시 전술의 특징으로서 보병, 기병, 포명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켰다고 한다. 특히 포병을 잘 썼다는 것이다.
또 나포레온은 추격전에 능하였다. 퇴패하여 도망치는 적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철저히 격멸시켰다.
나포레온 이전에는 영주들끼리 또는 귀족들끼리의 전쟁이라서 승기만 잡으면 그 이상 추격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결국 영주나 귀족은 서로 동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주나 귀족이 추격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병사들이 그대로 따라주지 않았고 곤란해지면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나포레온군은 병사들이 전쟁에 대한 의식이 투철하였기 때문에 끝까지 추격이 가능했다.
넷째, 나포레온의 카리스마가 병사들을 분전하게 하였다.
같은 시대 사람의 증언을 몇 가지 들어본다.
“그가 전장에 나타나면 병사 4만의 값어치가 있었다.”(영국 웰링턴 장군)
“우리들은 일종의 광망에 싸여서 진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50년 후인 지금도 그 따스함을 느낄 수가 있다.” (프랑스 마루몽 장군)
“바라는 바를 이루려고 하는 나포레온의 소리는 강렬하고 설득력과 마력이 있어서 상대를 그런 기분으로 만들었다.”(나포레온 시종장 고랑구르)
2, 몰락의 시작
1810년 전후가 나포레온의 절정기이다. 이윽고 나포레온의 대륙지배가 개인적인 영광과 프랑스 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처음에 봉건제도를 타도하자는 프랑스군을 환영하던 여러 나라의 민중이 나포레온 지배에 대하여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자유, 평등이라고 주장하면서 프랑스와의 관계에서는 자유도 평등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나포레온이 자유 평등이라는 인식을 넓힌 결과 각국의 민중 의식은 높아졌다. 특히 제국의 반감을 사게 된 것은 대륙봉쇄령이다. 유럽 제국은 1808년 가장 산업이 발전된 영국에 원재료나 곡물을 수출하여 경제가 성립되고 있었다. 그것을 금지한 때문에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1) 스페인 민중의 저항
처음에 프랑스에 대하여 저항을 시작한 것은 스페인이었다. 여기서는 1808년부터 프랑스에 대하여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나포레온의 형이 스페인의 국왕이었으므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스페인군이 아니다. 일반 시민이 저항 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나포레온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최종적으로 30만의 군대를 투입하였다. 그러나 성과는 오르지 않았다. 정규군과의 전투라면 프랑스군은 백전백승할 것이지만 민중의 게릴라전은 프랑스군의 틈새를 노리고 습격해왔다. 게릴라와 일반 시민을 구분할 수도 없었다. 프랑스군은 보복하기 위하여 의심이 나는 시민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이라는 작품은 이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군은 혁명군이 아니라 침략군으로 변하였고 나포레온은 결국 이 난을 진압하지 못하였다.
2) 프로이센의 개혁과 저항
다음 나포레온에 의하여 영토가 반이 된 프로이센은 거국적으로 개혁에 힘을 쓰게 되었다. 이것을 프로이센 개혁이라고 한다.
프로이센 지도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왜 우리는 프랑스군에게 패했는가. 프랑스군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대답은 간단했다. 프로이센 병사는 전투할 의욕이 없었다. 프로이센군은 강제로 징집된 농민으로 그들의 신분은 농노였다. 봉건영주에게 경제적으로 신분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는 농노가 영주를 위하여 싸울 의욕이 생겨날 이가 없는 것이었다.
프로이센을 강하게 하려면 봉건제도를 타도해야 한다. 그러나 혁명은 곤란하다. 그래서 지배자 측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놓지 않으면서 개혁하자는 것이 프로이센 개혁이다.
이 개혁의 지도자는 슈타인(Stain 1757~1831)과 하루덴베루그(1750~1822) 등 두 사람의 대신이었다. 그들은 농노제를 없애고 농민을 자유인의 신분으로 해방했다. 프랑스처럼 농민이 토지를 취득할 수 있을 정도의 철저한 개혁은 아니었다.
또 군제개혁을 단행하였다. 군대 내의 린치나 구타하는 형을 폐지하고 사병의 대우를 개선하였다. 다시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장교를 발탁하였다.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1755년~1813년=나포레온 전쟁기의 프로이센 장군) 라는 프로이센 장군은 “병사는 국왕의 종이 아니라 국가의 시민이라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가 반드시 민주적인 인사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고 이렇게 해야 프랑스군처럼 강한 군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의 구호였다.
이리하여 프로이센은 단기간에 국민개병의 원칙을 세우고 프랑스군에 가까운 국민군을 만드는 데에 성공하였다. 프로이센군 병사들도 나라를 위하여 힘쓰자는 마음을 다지게 되었다. 후에 프로이센군은 워털루전투에서 그 진면목을 발휘한다.
또 프로이센은 철학자 휘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년 5월 19일 ~1814년 1월 27일)가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3) 러시아의 저항
프랑스에서 가장 먼 곳 러시아는 1810년 대륙봉쇄령을 깨고 영국과 무역을 재개하였다. 나포레온은 대륙봉쇄령을 따르도록 수차 경고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를 무시하고 말았다. 이를 방치하고서는 나포레온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러시아의 영향으로 다른 제국이 대륙봉쇄령을 깨게 된다면 나포레온의 대륙지배는 끝장이 난다.
드디어 1812년 5월 나포레온은 측근의 반대를 무릅쓰고 러시아 원정을 개시하였다. 병력은 60만 그리고 러시아 원정은 나포레온 몰락의 시작이 되었다.
이야기 4 -나포레온의 최후-
1, 러시아 원정
1812년 5월 러시아 원정이 시작되었다. 나포레온의 병력은 60만 모두가 프랑스병만은 아니었다. 24만은 프랑스 속국, 동맹국에서 동원된 병력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사기는 높지 않았다.
나포레온이 이끄는 대 육군이 니멘(Nimen)강을 건너서 러시아 영토에 침입한 병력은 47만 5천이었다.
나포레온군은 러시아군을 잡기 위하여 맹속도로 달렸다. 하루에 60 킬로의 거리를 30Kg의 장비를 짊어지고 달린 것이다. 6월이라고 하지만 이미 더위는 격심하였다. 이 행군 속도에 맞추어 행군할 수 없는 병사가 탈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버리고 달렸다. 처음 2일 간에 5만의 병사가 탈락하였다고 한다.
러시아군은 일단 국경 가까운 곳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나포레온군이 추격해오면 오는 대로 퇴각하였다, 러시아 병력은 약 20만이었다. 배 이상의 나포레온군에 정면으로 도전해서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나포레온군은 점점 추격하여 왔다. 단지 러시아군은 퇴각할 때에 농지 등을 불태워버렸다. 그러니 나포레온군은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할 수가 없었다.
또 러시아 농민은 협력적이 아니고 침략군으로 알고 있어서 이탈리아 민중 같이 호의적이 아니었다.
8월 스몰렌스크(Smolensk)에 도착했을 때에는 나포레온군 병력은 15만 5천이었다. 한 번도 전투 같은 전투를 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굶주림과 피로로 도망쳐버려서 격감했던 것이다.
9월에 퇴각을 계속하던 러시아군은 모스크바 바로 앞인 보로디노(Borodino)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수도를 방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연전 패하여 도망쳐서 마침내 모스크바를 포기하고 동쪽으로 도망쳤다. 러시아 황제를 비롯하여 모스크바시민도 모두 피난하였다.
9월 14일 나포레온군은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나포레온의 병력은 11만으로 줄었다. 그때 모스크바는 대화재가 나서 태반이 불타버렸다. 프랑스군은 식량도 없고 숙소도 없어서 고생하였다.
그러나 적국 러시아의 수도를 제압하기는 하였지만 나포레온으로서는 승리가 아니었다.
나포레온은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도망친 러시아 황제에게 항복권고문을 보냈다. 수도를 점령했으니 서둘러서 사과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러시아황제로부터 회답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런대로 모스크바에서 기다렸다.
한 달이 지난 10월 13일 나포레온을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웬걸 모스크바에 첫눈이 내린 것이다. 나포레온이 예상 외로 겨울이 빨리 온 것이었다. 첫여름에 원정을 시작한 프랑스군은 겨울 장비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굶주림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추위가 닥쳤다는 것은 모스크바를 계속 점령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즉각 나포레온은 퇴각을 명하였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온 길을 따라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병력은 10만으로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한 달 만에 1만 명의 병력이 감소된 것이다.
나포레온군이 퇴각을 시작하자 숨었던 러시아군이 나타나서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추위와 러시아군의 추격에 나포레온군은 격감하기 시작하였다. 11월 3일에는 5만, 11월 8일에는 스모렌스크에 도착했을 때 병력은 3만 7천이었다. 여기서는 기온이 영하 26도까지 내려갔다. 프랑스군 군복의 단추는 주석으로 되어있다. 주석이라는 금속은 급격한 온도의 저하로 가루처럼 부서졌다.
그러니 프랑스군 병사들은 추운데 단추를 맬 수가 없었다. 죽은 병사의 옷을 벗겨 껴입었다. 죽은 군마를 잡아먹었다. 맛이 없어서 화약을 쳐서 먹었다고 한다. 추위를 이기기 위하여 군기를 태워서 불을 쬐기도 하였다. 군기라는 것은 적에게 빼앗기면 지휘관이 자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부대의 명예를 상징하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군기를 태울 정도이니 군대도 아닌 것이었다.
11월 26일 베레지나(Berezina)강에 도착했다. 이 강을 건너야 하는데 여기서는 갑자기 추위가 누그러져서 이제까지 얼었던 강물이 녹아서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갖갖으로 공병이 만든 가설다리를 건넜으나 건널 수 있었던 병력은 겨우 3만이었다.
추격해오는 러시아군을 따돌리기 위하여 시간을 벌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12월 10일 니멘강을 건너서 러시아 영에서 벗어난 병력은 5천명밖에 안 되었다. 60만으로 시작한 원정이 5천명이 된 것이다. 나포레온의 권력을 지탱해주었던 군대가 없어진 것이었다. 이리하여 러시아 원정은 대패로 끝났다.
2, 나포레온의 최후
나포레온의 러시아 원정의 대패로 유럽 여러 나라는 반 나포레온 연합군을 결성하고 나포레온의 발을 찍었다. 라이프치히( Leipzig)전투로 별명은 제국민전쟁이라 했다.
연합군 주력은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30만 병력이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군은 18만으로 러시아 원정으로 군단이 소멸되었지만 잘 모아서 갑자기 모아 놓은 병력이라 훈련도 충분하지 않았다.
실제로 프랑스 국내에서는 염전 분위기가 팽배하여 병사를 모으는 데에 꽤나 어려움을 겪었다. 정부가 소집한 병력은 40만이지만 실제로 소집에 응한 병력은 17만 5천밖에 안 되었다. 모두가 병역을 기피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이 때 징병을 기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앞니를 꺾어버리거나 엄지손가락을 자르는 자가 속출하였다. 당시의 총은 화약주머니를 앞니로 뜯어서 총에 화약을 장전하였다. 그러니 앞니가 없으면 징병에서 제외되었다. 앞니만으로는 걱정이 되는 사람은 엄지손가락마저 잘랐다. 이러면 총을 잡을 수가 없어서 징병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또 아내를 가진 자는 징병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서둘러서 결혼하는 젊은이가 속출하였고 젊은 처녀가 없어서 60세 여자가 18세의 총각과 결혼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패하고 나포레온은 파리로 도망하였는데 이를 추격하여 연합군도 파리에 입성하여 나포레온은 최후를 맞게 되었다.
마침내 1814년 3월 파리는 연합군에 점령되었다.
3, 엘바도 유배
1814년 4월 2일 프랑스 원로원은 나포레온의 폐위를 선언하고 4월 11일 나포레온은 퇴위선언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5월 4일에는 엘바(Eiba)도로 유배되었다.
연합군 측은 황제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라 해서 <나포레온은 엘바(Elba)도에 유배하되, 연액 보조 200만 프랑을 받는다. 그는 황제의 칭호를 유지하고, 400명의 근위병을 보유한다.>는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루이 16세의 동생이 망명 처에서 돌아와서 루이18세라 하여 즉위하여 브르봉 왕조(dynastie des Bourbons=근세 프랑스왕조의 왕국으로 1589년~1792년, 1814년~1830년)를 부활시켰다.
그런데 루이 18세는 오만하고 완고하여 인기가 없었다. 그는 이기주의자이고 둔감하며 향락가이며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어서 매우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국민의 평판도 나빠서 차라리 나포레온이 낫다는 소리가 돌았다. 그리고 윈 회의는 영토분배 문제로 분규하고 난항이었다.
4, 나포레온의 복귀와 워털루 전투
프랑스 국내에서 이런 소리가 엘바도에도 이르러서 나포레온은 마침내 1815년 2월 24일 측근을 이끌고 7척이 선박으로 엘바도를 탈출하여 프랑스 남해안에 상륙하였다. 나포레온 탈출 소식이 바로 파리에 전해져서 루이 18세는 나포레온을 체포하기 위하여 군대를 남 프랑스로 보냈다.
군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을 나포레온은 다가가서 <영광스러운 프랑스 병사 제군들 나는 돌아왔노라. 함께 프랑스의 영광을 찾읍시다.>하고 말하자 체포하러 간 병사들은 오히려 나포레온의 지휘를 따라서 파리로 진군하였다. 루이 18세는 무서워서 도망치고 말았다. 3월 나포레온은 파리로 귀환하여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즉각 영국, 프로이센 등에 의하여 연합군이 결성되고 나포레온과의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것이 1815년 8월의 워털루(Worterloo) 전투이다.
나포레온이 이끄는 프랑스군 병력은 10만이고 이에 대한 연합군 병력은 영국군이 6만 8천, 프로이센군이 4만 5천이며 총사령관은 영국의 웰링턴(Wellington,1769년~1852년) 장군이었다.
6월 18일 워털루에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격돌했다. 그런데 실은 6월 16일에는 리니에서 프랑스군과 프로이센군의 전투가 있었다. 이때는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에 승리하였다. 나포레온은 3만 3천의 별동대를 구루지(Gurushi) 장군에게 지휘하도록 하여 프로이센군을 추격섬멸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전의 프로이센군이라면 일단 흩어지기 시작하면 병사들은 도망치기가 바빴을 것이다. 그런데 프로에센 개혁을 격은 프로이센군은 거듭나서 도망친 병사들은 다시 지휘관 밑으로 집결하여 정연히 퇴각하였다. 구루지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만 하고 워털루전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6월 18일 워털루에서 프랑스 주력군과 영국군이 전투가 개시된 때 구루지 장군의 별동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전투는 프랑스군이 우세하였으나 구루지군 3만 3천명이 합류한다면 승리는 결정될 것이라서 나포레온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 무렵에 워털루에 나타난 것은 도망쳤다는 프로이센군이었다. 형세는 역전하여 결국 프랑스군은 패하고 말았다. 구루지군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5, 센트 헬레나도에서의 죽음
이 워털루의 패배로 나포레온은 다시 퇴위하고 대서양 절해의 고도인 센트 헬레나(Saint Helena)도에 유배되었다. 동행을 허용한 것은 12명의 종자뿐으로 영국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특히 나포레온은 센트 헬레나도의 총독 하드슨 로우(Sir Hudson Lowe 1769~1844)의 무례한 대우로 고생하였다. 황제를 지낸 사람을 <보나파르트 장군>이라고 부르고 썩은 포도주를 가지고 접대하는 등 철저히 우롱하였다. 또 나포레온의 건강이 나빠졌는데도 주치의를 본국으로 보내버렸다. 나포레온은 그를 저주하여 “장래 그의 자손은 로우라는 성을 가진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한다.
이로써 그는 할 일이 없어졌으니 하루 종일 섬을 돌거나 자신의 생애를 종자들에게 말하거나 하며 6년간을 지냈다. 1821년 52세로 병사했다. 영국인에 의하여 독살되었나는 설이 유력하다. 그의 유해는 1840년 프랑스로 돌아와서 안장되었다. 종자가 나포레온의 사후에 회고록을 출판하였다. 이 회고록으로 나포레온 영웅 전설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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