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선지’ 장군 이야기
-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에서 기개를 떨쳤다-
고선지(高仙芝, ?년~755년)는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군이다. 서역에서 활약하고 탈라스하반에서의 전투에서 압바스(Abbas)조의 이슬람군과 교전하였다.
20세기 초 돈황(敦煌)을 발굴한 영국 고고학자 겸 탐험가인 오렐 스타인(Sir Marc Aurel Stein, 1862년 11월 26일~1943년 10월 26일)은 말하기를 “고선지의 원정은 한니발이나 나포레온을 웃돈다.” 고 했다. 이는 한니발이나 나포레온이 횡단한 알프스산보다도 더 높고 험준한 해발 4,600미터의 파밀 고원을 넘어서 대규모의 원정을 했기 때문이다.
서역에서 공을 세우다
중국의 고서인 《구당서(舊唐書)》에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高舍鷄)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하서군(河西軍)에 들었고 이후 서역 사진에서 장군으로 복무하였다.” 라는 기록에 의하면 고선지(高仙芝) 장군은 고구려 출신으로 아버지는 사계(舍鷄)라 했다.
고선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이다. 안서는 고선지의 아버지가 장군으로 복무하던 곳이다.
이곳은 실크로드의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로서 아버지는 실크로드를 내왕하는 상인을 보호하고 서역 여러 나라의 침입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격전지에서 성장한 고선지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아름답고 말 타기 활쏘기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아버지는 유약한 점이 있다고 걱정하였었다고 하지만 고선지는 10대에 군인으로서 도적의 토벌에도 참전하였다. 그런 공을 인정하여 20세에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었다.
고선지 장군은 741년에 천산산맥 서쪽에 있는 달해부족(達奚部族)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북상하여 오므로 2천의 기마부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서서 이를 진압하였다. 그래서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에 임명되었다.
747년에는 소발률(小勃律/길기트)국이 당나라에 배반하여 토번(吐蕃/티베트)에 가서 부근 20 수개의 국가가 토번에 동조하고 있어서 전인완(田仁琬) 때부터 3회나 토벌군을 내었으나 언제나 실패하였다. 그런데 고선지는 휘하에 봉상청(封常淸), 이사업(李嗣業). 감군(監軍)인 변령성(邊令誠) 등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토벌하기 위하여 출전하였다. 보병도 모두 말을 가지고 안서(安西/구챠)를 출발하여 가슈가르를 지나서 파밀고원에 들어가 오식닉국(五識匿國/슈구난지방)에 도착했다.
그 후 군을 삼분하여 조숭자(趙崇玼) 등에게 별동대를 이끌게 하고 본대는 호밀국(護密國)을 통과하여 후에 합류하기로 하였다. 고선지 등은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합류에 성공하고 급류인 판자강 도하에도 성공하였다.
이 땅에서 토번군(吐藩軍)이 지키는 연운보(連雲堡=사루바트)를 함락시키고 5천 명을 죽이고 1천 명을 포로로 하였다. 여기서 진군에 동의하지 않은 변령성과 3천명을 수비로 두고 다시 행군하였다.
험준한 20킬로미터나 수직 상태가 이어지는 다루고토 고개를 내려가서 장군 석원경(席元慶)에게 1천명을 붙여 “대발률(大勃律/바루치스탄)로 가기 위하여 길을 빌릴 뿐이다.” 고 말하게 했다. 자신의 소발률 본거지 아노월성(阿弩越城)에 도착 후 토번파의 대신을 참수하고 소발률 왕을 포로로 하여 판자강에 걸린 토번으로 통하는 등교(藤橋)를 잘랐다. 그 후 소발률 왕과 그 왕후인 토번왕의 딸을 연행하여 귀환하였다. 서역 72국은 당나라에 항복하고 그 위엄이 서아시아까지 미쳤다.
그 후에도 3회에 걸쳐 서역원정을 성공시켜 고선지 장군은 실크로드의 제왕이라고까지 불리게 되었다.
그 명성을 시인 두보(杜甫)는 <고도호마행(高都護馬行)>이라는 시에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安西都護胡靑驄 (안서도호호청총) |
안서 도호 장군의 서호의 총마는 |
聲價欻然來向東 (성가훌연래향동) |
높은 명성 지닌 채 갑자기 와서 동쪽으로 향하네. |
此馬臨陣久無敵 (차마림진구무적) |
이 말은 싸움에서 오랫동안 적수가 없어 |
與人一心成大功 (여인일심성대공) |
사람과 한 마음으로 큰 공적을 이루었다네. |
功成惠養隨所致 (공성혜양수소치) |
공을 이루자 은혜롭게 길러져 가는대로 두었으니 |
飄飄遠自流沙至 (표표원자류사지) |
이 말은 원래 날리듯 달려서 멀리 사막지방에 왔다네. |
雄姿未受伏櫪恩 (웅자미수복력은) |
웅혼한 자태는 마판에서 편히 길러지는 것 바라지 않고 |
猛氣猶思戰場利 (맹기유사전장리) |
날랜 기운은 여전히 전장에서 유익함을 생각하게 하네. |
腕促蹄高如踣鐵 (완촉제고여북철) |
관절이 짧고 발굽이 높아 쇳덩어리 뉘어놓은 것 같아 |
交河幾蹴層冰裂 (교하기축층빙렬) |
교하지방을 몇 번이나 차고 다려 얼음을 갈라놓았을까. |
五色散作雲滿身 (오색산작운만신) |
오색 갈기 흩어져 구름이 몸에 가득한 듯 하고 |
萬里方看汗流血 (만리방간한류혈) |
만리를 달려야 핏빛 땀이 흐르는 것 보인다. |
長安壯兒不敢騎 (장안장아불감기) |
서울 장안 장자들도 감히 타지 못하나니 |
走過掣電傾城知 (주과체전경성지) |
번개 치듯 달려는 것을 성안 사람들 모두 알기 때문이네. |
靑絲絡頭爲君老 (청사락두위군로) |
푸른 실로 갈기털 묶고 주인을 위해 늙어가려니 |
何由却出橫門道 (하유각출횡문도) |
어찌하면 다시 서울 장안 횡문을 지나 전장으로 갈까. |
고선지 장군은 도중에서 장안으로 직접 판관 왕정분(王庭芬)을 시켜 전승보고를 했다. 그런 때문에 무시당한 부몽령절(夫蒙靈절=절(言+祭)의 분노를 사기는 하였으나 변령성이 그를 비호하는 상주를 올렸기 때문에 부몽영절은 수도로 소환 당하였다.
고선지가 대신 안서사진절도사(安西四鎭節度使)로 임명되고, 홍려경(鴻臚卿)이 임시 어사중승(御使中丞)에 임명되었다.
* 주
발률(勃律)
대발률(大勃律)과 소발률(小勃律)이 있다. 대발률(大勃律)은 카시미르(Kashmir)의 바루치스탄(Baluchistan).이고 소발률(小勃律)은 그 서북쪽의 길기트(Gilgit)이다.
옛날부터 교통의 요충으로서 법현(法顯), 송운(宋雲), 혜초(慧超) 등 불승이 인도로 가는 경유지였다. 당나라 현종(玄宗)에 조공을 바치던 대발률국이 토번(吐藩/티베트)에 복종하게 되자 발률 일족인 몰근망(沒僅忙)을 소발률국 왕으로 책봉하였으나 이윽고 토번에 회유 당하자 747년에는 고선지 장군에 의하여 이를 제압하여 72개의 소국이 모두 당나라에 복속되었다.
탈라스 하반의 전투
751년 중앙아시아의 탈라스(Talas) 지방(현재 길기트(Gilgit)령)에서 당나라와 압바스(Abbas/黒衣大食)조 간에 행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당나라와 압바스조와의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천하를 나누는 전투이며 제지법이 서방으로 전파되기도 한 전투였다.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로서 서역(동 터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장군 고선지(高仙芝)가 서방의 소쿠티아나(서 터키스탄)에 압력을 가한 때문에 샤슈(石國, 현재의 타슈켄트)의 왕자는 시르강 이서를 지배하는 이슬람 세력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응하여 747년에 우마이야조 세력을 메루우에서 쫓고 압바스조의 호라산 총독이 된 아브 무슬림은 부하인 지야드 이븐 사리프(Ziyad ibn Salih)를 파견하였다. 한인(漢人)과 토착민으로 구성된 3만의 당나라군은 고선지의 지휘 하에 탈라스성에 입성했다.
*주-탈라스강=(영-Talas River, 중-塔拉斯河)=중앙아시아의 이리지방을 흐르는 국제하천.
지야드가 이끄는 압바스조 군과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은 천산산맥 서북 기슭의 탈라스 하반에서 충돌하였다.
전투 중에 당나라군에 가담했던 천산북록의 유목민 카르루크(Karluck/葛邏祿=터키계 이슬람 유목민)가 갑자기 당나라를 배신하고 압바스조군에 동조하여 당나라군을 협공하였기 때문에 당나라군은 괴멸상태가 되어 수천 명만 살아남았다. 고선지 장군은 부하인 이사업(李嗣業) 장군의 도움으로 퇴각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병사가 포로가 되었다.
이븐 아시르의 《연대기》를 보면 압바스조군은 당나라 군 5만을 죽이고 2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이 전투 이후 중앙아시아에 이슬람 세력의 지배가 안정적으로 확립되었다. 소크도인이나 듀루크계 여러 민족 사이에 이슬람교가 전파되었고 당나라세력은 그 후의 안사의 난 등으로 후퇴하였다. 또 당나라 포로 중에는 제지기술자가 있어서 서방 세계에 종이 제조법이 전파되게 되었고 이윽고 사마르칸트에 제지공장이 설립되게 되어 이슬람 세계에 제지법이 전해졌다.
고선지의 최성기
755년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났다. 영왕(榮王) 이완(李琬=현종의 황자)이 토벌군의 원수가 되고 고선지가 부원수로 임명되었다. 고선지는 모집한 병사를 더해서 총 십만이라는 천무군(天武軍)을 이끌고 이미 토벌군 장수로 임명된 봉상청(封常淸)에 따르기로 되었다. 협군(陜郡)까지 왔을 때 안록산 측에 낙양을 빼앗기고 패주하던 봉상청과 만났다. 거기서 봉상청의 진언에 따라 동관(潼關)까지 퇴각할 것을 정하였다. 대원창(大原倉)을 열고 모든 병사들에게 넘기고 나머지를 소각하고 퇴각하였다.
그때 안록산군에 공격당하여 당군은 많은 병사가 도망가거나 짓밟혀 죽었다. 그리고 대량의 무기, 갑옷, 군량이 내버려졌다. 그러나 동관으로의 퇴각은 성공하고 안록산군은 철수하였다.
그러나 다시 감군(監軍)이 된 변령성(邊令誠)이 말하는 것을 무시한 때문에 봉상청과 함께 현종에 대한 참언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현종은 두 사람에 대하여 처형 명령을 변령성에게 내렸다. 먼저 봉상청이 처형되고 고선지도 돌아오자 체포되었다.
고선지는 “퇴각한 것이 죄가 된다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다. 자재, 병량을 도둑질하였다면 무죄이다.” 고 말하고 부하들을 향하여
“나에게 죄가 있다면 밝히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왕(枉)”=(원죄/寃罪)이라 소리쳐라.“ 고 말하자, 군중에서 “왕”이라는 소리가 대지를 흔들었다.
봉상청의 시체에 “자네가 나를 발탁하고 나를 대신하여 절도가 되었다. 이번에는 자네와 같은 곳에서 죽는다, 천명이다.” 말하고 진중에서 처형되었다.
장군 이승광(李承光)이 대신 지휘하였으나 새로 부원수로 임명된 가서한(哥舒翰)은 동관(潼關) 수비에 실패하고 현종은 장안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고선지 장군의 일화
1, 고구려는 668년에 당나라에 멸망하였다. 많은 고구려 사람이 당나라로 연행되었다. 고선지는 성이 고구려 왕과 같으므로 고구려 왕족의 자손이라고 한다.
2. 병사들이 험난한 지형에서 겁을 먹지 않게 하려고 앞에 나간 병사를 공격 대상 인 소발률국의 항복 사자라고 위장시켜 환영한다는 뜻을 전하게 하고 거짓으로 병사들을 기쁘게 하고 안심시켜 진군시켰다.
3, 아노월성(阿弩越城)을 함락할 때 칙령이라고 속여서 명주를 넘기고 소발률국 사람을 불러 모아 대신이 도착하자 그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4, 시인 잠삼(岑參)도 고선지 휘하에 있었던 시기가 있다.
5, 탐욕으로 많은 사재를 축재하고 있었는데 아끼지 않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6, 탈라스 하반의 전투에 의하여 두우(杜佑)의 종자인 두환(杜環)이 포로가 되었다. 또 포로 중에는 제지기술을 가진 자가 있어서 그 때 서역으로 종이가 전래되었다고 한다.
7. 영국 고고학자 겸 탐험가인 오렐 스타인(Sir Marc Aurel Stein, 1862년 11월 26일~1943년 10월 26일=중안아시아 탐험조사로 알려진 영국에 귀화한 항가라 인)은 파미르 실지를 조사하여 고선지의 군사행동을 “고선지의 원정은 한니발이나 나포레온을 웃돈다.” 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역사의 수수께끼 > 위대한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우화 작가 ‘이솝’ 이야기 (0) | 2015.07.12 |
---|---|
1, 전국시대 명의 ‘편작(扁鵲)’이야기 (0) | 2015.07.12 |
6, 프랑스 ‘드골’ 대통령 이야기 (0) | 2015.07.12 |
5, ‘나포레온’ 이야기 (0) | 2015.07.12 |
위대한 사람들 머리말 (0) | 2015.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