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프랑스 ‘드골’ 대통령 이야기
어린 시절
샤루루 드골(Charles André Joseph Pierre-Marie de Gaulle, 1890년 11월 22일 - 1970년 11월 9일)은 1890년 11월 22일 북 프랑스의 리루시에서 태어났다. 선조는 13세기에 거슬러 올라가는 하급귀족이라 하고 아버지는 의학, 이학, 문학 3개의 박사학위를 받은 석학이며 열렬한 가톨릭 신도로서 예수교계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할아버지 주리앙도 저명한 역사학자로서 예수회계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샤루루는 어려서부터 역사에 흥미를 가지고 조국 프랑스의 명예와 전통을 긍지로 여기게 되었다. 14세에 희곡을 창작하기도 자라서는 프랑스, 독일 문학 철학을 애독했다.
드골은 처음에는 전도사가 되고자 하였으나 그보다도 자신의 신장이 2미터라는 훌륭한 체격을 살려서 군인이 되고자 결심했다. 보불전쟁에 종군한 아버지 등 드골 집안의 선조에는 군인이 많았다.
*주 ; 보불전쟁 1870년~1871년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의 전쟁인데 결과는 프랑스가 패하였다.
사관학교 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애국적 엄격한 교육을 받아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09년 19세 때에 산시루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당시 사관학교의 규정에 따라 최초 1년간을 이등병으로서 지방의 연대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가 지낸 곳은 아라스의 보병 제33연대였다. 보통은 <위를 향해라. 위를 향해라.>하고 기합을 받을 때에도 신장이 큰 드골만은 <아래를 향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다. 부대 근무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그에게 별명은 <수탉> <아스파라가스> 그리고 코네타블(Connetable/대장군)>이었다. 그런데 두드러진 성적을 올리지는 못하였다.
1912년 졸업 후는 역시 보병 제33연대에 소위로 배속되어 여기서 신임 연대장 페탕대령(Petain、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1856-1951)과 만났다. 이 페탕 대령은 드골의 인생에 최고의 스승이고 또 후에는 최대의 정적이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에는 대위로서 독일과 싸워 1916년 대전 중에 최대의 격전지인 베르탕 전투에서 부대를 지휘하였다. 독일군의 포격으로 중상을 입고 기절하여 전사로 판정되어 시체 운반차에 태워졌었다, 그러나 수송 도중에 의식을 되찾아 살아났다. 전사라고 들은 페탕은 “드골 대위 중대장으로 복무하다. 그 지성과 덕성에 있어서 알려진 인물이다. 엄청난 포격으로 대대에 큰 손해를 내고 중대도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그것이 군의 영광이라고 판단하고 병을 모아 공격을 감행 백병전을 감행하였다. 혼전 중에 전사하였다. 공적이 뛰어나다. 페탕”이라는 개인적인 감사장을 작성했었다고 한다.
또 포로생활도 경험하였는데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했다. 드골은 5회나 탈옥을 꾀하였으나 몸집이 워낙 크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래서 가장 엄중한 포로수용소인 잉고르 슈닷트성의 감옥 <천녀의 집>에서 포로생활을 경험하였다. 이 감옥에는 후에 러시아의 적군원수(赤軍元帥)가 되어 스탈린에 의하여 숙청당한 두하초프스키(러시아어: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Тухачевский, 1893년 2월 16일~1937년 6월 11일=소련방 원수)가 있었다. 두하초프스키는 드골에 대하여 “미래는 우리들 것이다. 우물쭈물 하지 마라.”하고 포로생활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폴란드 군사고문시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드골은 폴란드의 군사고문이 되어 그 나라에 부임하였다. 당시 폴란드는 혁명 러시아 적군의 침공을 받고 있어서 수도 바르샤바까지 쳐들어갔다. 그 때 적군 사령관은 함께 포로생활을 한 두하초프스키였다. 드골은 이 전투에서 활약하여 폴란드 군 소령의 칭호를 받고 동시에 폴란드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육군대학교 시대
폴란드에서 귀국하여 산시루 육군사관학교의 군사사(軍事史) 담당 교관으로서 근무한 후 1922년에 육군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동학교에서는 <근면하고 예민, 박학, 그러나 친우들 하고 잘 어울리지 못함. 성격적 원만성 결여>라고 평가되고 있다. 또 육군대학을 졸업했지만 드골은 <나의 길을 간다.>라는 주장을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군 상관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대위에서 소령이 되기까지 10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이 사이에도 후에 적이 되는 페탕은 드골을 좋게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드골은 중동에 1회 부임하고 1932년에는 중령으로 승진하여 파리에 있던 군사최고회의 사무장으로 취임하였다. 다시 페탕의 계획에 의하여 드골은 육군대학교에서 <전투행위와 지휘관>이라는 특별 강연도 했다. 이 강연을 문서로 작성한 것이 《검과 칼날》이다. 단지 이 글은 [프랑스판<나의 투쟁>] 혹은 [드골판<나의 투쟁>]이라고도 평가된다.
전격작전 추진
제1차 세계대전의 베르탕전 체험에서 드골은 이후의 전쟁은 참호전이 아니라 기동력이 있는 전차나 비행기를 구사한 기계화 부대에 의한 전격작전이 된다는 것을 논하고 몇 가지의 저서 중에서 그것을 보급하였다. 이 견해는 페탕 등 프랑스군 주류파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독일의 작전가인 구데리앙(Heinz Wilhelm Guderian, 1888년 6월 17일~1954년 5월 14일)이 같은 발상을 하고 그가 있던 독일군이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있다.(국가지도자가 히틀러였다는 것도 컸다고 생각된다.)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40년 5월에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하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방위방침을 견지한 프랑스군이 국경의 거대요새 <마지노선>을 기동력이 있는 장갑부대로 우회하여 진군하고 프랑스군은 겨우 1개월간의 전투로 독일군의 전격작전에 의해 패배했다.
개전 즉후 5월 15일 드골 대령은 새로 편성된 제4기갑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미 때는 늦어서 소규모이기는 하였지만 여기서 겨우 드골은 오랜 동안 주장해오던 기계화 전술을 실제로 시험할 기회를 얻었다. 다른 제1에서 제3의 3개 기갑사단이 특별히 두드러진 활약도 없이 끝난 데 대하여 드골이 이끄는 제4기갑사단은 사단장 직접 지휘 하에 전차의 집중 훈련을 하였다. 일시적이지만 독일 군부대에 위협을 주는 데에 성공했다. 특히 송무현 아비르 근방에서의 반격에서는 송무강 남안의 적의 교두보 3개 중 2개까지 탈환하는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없이 드골은 육군차관으로 임명되어 부대 지휘에서 손을 때었다.
자유 프랑스 시대
드골은 제2차 세계대전 서전에서의 전공으로 프랑스군 사상 최연소 장군이 되었다. 1940년 6월에는 동년 3월 에두아르 다라디에의 사임으로 새로 수상으로 취임한 포르 레노의 신내각 국방차관 겸 육군차관으로 임명되어 독일군에 의한 프랑스 침공에 대하여 영국군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런던으로 날아가서 윈스톤 처칠 전시내각과 교섭을 시작했다. 그 중에 합법적으로 영불연합군 지휘권 총합과 망명적 성격의 정책, 영불연합(프랑스와 영국의 정치적 통합 구상)에 분주했다. 영국 측의 각의 결정 후 프랑스 정부의 피난처인 보르도로 향했으나 레노 내각은 영불연합 안건과 휴전파의 압력으로 총사퇴하고 차관직도 해임되었다.
6월 15일 수도 파리가 함락되어 자신에 대한 체포 소식이 들려 연합군 고문인 영국 육군 장교의 소환에 동반하여 영국에 망명할 것을 결단했다. 탈출처인 런던에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결성하고 런던의 BBC라디오를 통하여 대독항전을 계속하고 중립정권이지만 친독일적인 비시정권에 대한 저항을 국민에게 호소했다. 영국의회나 각료는 일이 복잡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중지하려 하였으나 영국 윈스톤 처칠의 지시에 의하여 방송은 강행되었다.
1941년 10월 25일에는 런던에 망명 중이었던 잔 무랑(Jean Moulin, 1899년 6월 20일~1943년 7월 8일)과 회견하고 하나의 커다란 조직 <레지스탕스 국민회의>를 만들기 위하여 잔 무랑을 극비리에 프랑스 본토에 파견하였다. 또 스스로 자유 프랑스군을 지휘하여 알제리아, 튜니시아 등 프랑스 식민지를 중심으로 한 북 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우고 대독 항전을 지도했다. 그러나 불령인도네시아나 마다카스갈을 비롯한 식민지나 프랑스 본국의 프랑스군 다수는 중립을 유지하거나 비시장권에 귀속하여 노르망디 상륙까지 드골에게 모인 프랑스군 세력은 참으로 한 줌밖에 안 되었다.
드골은 그 독재적이고 강권적 자세로 처칠이나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충돌하는 일이 많았고 특히 루즈벨트는 드골을 <형식에 얽매인 구시대적 인물> <선거로 뽑힌 것이 아닌데 지도자로서 군림하려고 한다.>고 하여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그 후 1944년 6월 연합군에 의한 유럽대륙 재상륙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하자 조국으로 돌아가서 자유 프링스 군을 이끌고 영국군이나 미군의 연합군과 함께 싸우고 동년 8월 25일에는 파리가 해방되었다. 드골은 이튿날 26일 자유 프랑스군을 이끌고 파리에 입성하여 개선문에서 노트르담 성당까지 개선 파레이드를 행하고 샹제리제 거리를 매운 파리 시민으로부터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임시정부 수상
1) 강권적 지도자
프랑스 해방 후 국민의회는 만장일치로 드골을 프랑스공화국 임시정부 수상으로 선출하였다. 그는 수상이 되자 민중의 성원을 배경으로 다른 지도자나 정당의 의견을 무시하는 일이 많아져서 사회당과 공산당으로부터 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1946년 1월에 드골은 정책상의 일치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돌연 수상직을 사임하였다.
이 사임의 진의는 정당정치와 의회주의에 대한 불만이었다고 한다. 드골은 차제에 뛰어난 지도자가 국민의 지지를 배경으로 강력한 정치를 행하는 것이 정쟁으로 날이 새고 지는 정당정치(프랑스공화국에서는 다당 난립이 되는 일이 많았다.)보다도 국민을 위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런 신념에서 1947년에 프랑스국민연합을 결성했는데 이 단체도 1952년에 분열하는 정쟁이 발생하였다. 그것을 싫어한 드골은 이 단체를 해체하고 1955년에는 공적 생활로부터 은퇴를 선언했다.
2) 국영화 추진
드골은 다시 프랑스 해방 후 1945년에 대기업 자동차회사인 르노를 국영화하고 에르프랑스항공 등 다수의 기간기업을 국영화했다. 이처럼 국가 부흥을 추진하기 위하여서이기도 하고 인프라 관련 대기업의 국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공공 투자에도 힘을 썼다. 이 정책은 후에 드골이 대통령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제5공화제 대통령
1) 알제리아의 독립 승인
1958년 5월 알제리아의 프랑스식민지가 알제리아의 독립운동에 대항하기 위하여 알제리의 주둔군과 결탁하여 본국 정부에 반기를 들고 현지 주둔 낙하산 연대가 코르시카도를 점령하고 진압하러 나선 공화국 보안대도 도착 후 반란군에 동조하여 프랑스 본토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 긴급 사태에 정부는 군부를 억누를 수 있는 인물로서 은퇴를 선언하여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있던 드골에게 출마를 요청하여 드골을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자크마슈 장군이나 라우르사랑 장군도 주둔군 수뇌부도 이를 지지하였다.
드골은 이것이 염원하던 호기라고 생각하여 대통령에게 강권을 주어 의회의 힘을 억제하는 신헌법을 입안하고 곧바로 이것을 국민투표에 붙였다. 동년 9월에 행해진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을 얻어 신헌법이 제정되고 프랑스 제5공화정이 성립하여 드골은 그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드골은 이후 1969년 퇴임하기까지 11년간 강권적이라 할 수 있는 정권 운영으로 프랑스 내외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 11년간 처음으로 프랑스 정국은 안정되고 그 교묘한 경제정책으로 프랑스는 고도성장을 성취하였다. 외교면에서도 프랑스의 지위는 급속히 높아졌다. 그러나 알제리아에 대해서 드골은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드골은 자신이 후년 회고록에서 제1차 인도네시아 전쟁의 배경에 있는 민족자결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 또 당초에는 완전독립이 아니라 완만한 연방제를 모색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장군들의 반란이 발발하고 결국 알제리아 영유의 계속을 주장하는 우익조직의 테러에 의한 반대를 억누르고 1962년 독립을 승인하였다. 드골은 이 무렵 번번이 암살의 표적이 되었었다.
2) 독자로선
동서 양진영 사이에서 냉전이 계속되는 속에 드골은 미국과 소련의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하는 양진영과 별도로 유럽 여러 나라에 의한 <제3의 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프랑스를 그 중심으로 하려고 한 일을 유작이 된 회고록 속에서 말하고 있다. 그 자신도 유럽 각국이 역사나 문화적 배경을 무시하여 통합하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각국이 공동으로 당하는 연합에는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서독은 화해 협력을 진행하는 반면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국제연합에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NATO본부를 프랑스에서 철퇴시킨 후에 NATO에서도 탈퇴하고 말았다. 그와 병행하여 국제연합 분담금 지불도 정지하고 미국과 가까운 입장을 취하는 영국의 구주경제공동체(EEC)에 가맹을 거부하는 뜻을 밝혔다. 이 시기에는 동유럽 여러 나라도 역방하고 있다.
또 <프랑스의 안전보장이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념으로 통상 병력 삭감 대신에 프랑스 독자의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1960년 2월에는 사하라 사막의 레가스 실험장에서 원폭 실험에 성공하여 미, 소, 영 다음으로 핵보유국이 되었다. 1964년에는 영국을 제외한 다른 서방 선진국에서는 가장 일직이 공산주의 정권 하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였다.
3) 5월 혁명
세계적인 학생 운동이 높아짐에 따라 좌파적인 발상에서 현대사회를 <관리사회>라 해서 고발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그런 와중에 여자기숙사에 침입을 금지 당한 남자 대학생의 항의로부터 1968년 5월 혁명이 발발했다. 프랑스 전토를 스트라이크의 거센 바람이 엄습하여 드골은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죠류주 퐁피투 수상 등의 권하는 바도 있어서 의회를 해산하고 국민의 의사를 묻기로 했다. 그에 호응한 드골 지지의 대규모의 시위가 행해지고 5월 혁명은 급속히 힘을 잃고 드골은 의회 선거에서도 압승하여 위기를 면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969년 4월 27일 그가 국민투표에 붙인 <상원 및 지방행정제도의 개혁안>이 52.41%로 <부결>되어 드골이 패하였다. 지금까지 국민투표에 의하여 신임을 물어온 드골로서 이 패배는 자신에 대한 지지기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드골 장군은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권력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회를 무대로 하는 정당정치를 싫어해 오기는 하였지만 드골은 민의를 무시하는 독재자는 아니었다. 게다가 나이는 78세였고 어느 날 그 아들에게 <80세가 지나도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국가 원수로서 80세는 너무 늙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은퇴와 사망
1969년 4월 28일 프랑스통신은 드골의 성명을 전했다.
“나는 공화국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정지한다. 이 결정은 정오부터 유효하다.” 드골은 청사에서 떠나고 최후의 각의도 국민에 대한 연설도 정부직원이나 비서들에 대한 고별사도 없었다. 11년이나 계속된 드골 체제는 어이없이 막을 내렸다.
은퇴 후는 지방의 산촌 고론베 레 두 세구리즈의 사저에 이사하여 집필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아일랜드와 스페인을 방문하였고 다음에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외유는 언제나 6월이었다. 드골의 인생애서 가장 큰 의미를 가진 1940년 6월 18일 라디오 연설, 그 역사적인 저항을 호소한 기념일에 프랑스 안에 있는 것은 이미 국민의 총애를 잃은 드골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샤루루 드골이 서거한 것은 1970년 11월 9일이었다. 사인은 동맥류에 의한 복부대동맥파열이라고 진단되었다. 향년 79세였다.
유언서에는 <국장은 불요, 훈장 등은 일절 사양, 장의는 고론베에서 가족의 손에 의하여 간소하게 행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장례는 드골의 사저가 있던 고론베 베, 레. 두 세구리즈에서 사적으로 거행되었다.
12일에 정부가 주최한 추도미사에는 전 세계의 국왕이나 대통령이 열석했다. 회장이었던 노트르담사원에는 1944년 8월 26일에 파리가 해방되었을 때 노트르담사원에서 불러졌던 <위대하도다.>가 연주되었다.
드골의 인물됨
드골은 민중에 잘 보이려는 일을 하지 않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엄을 중시하였다. 근시인데도 국민들 앞에서는 결코 안경을 쓰지 않고 테로 위험이 있어도 과도한 경비를 싫어했다. 대전 중 준장이라는 계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장군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TV에는 별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후에 긴요할 때 TV의 효과가 좋음을 이해하고 연출가의 지도를 받고 경대 앞에서 연습을 하기도 하였다.
공인으로서의 드골은 매우 오만 불손하였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버지였다. 드골이 과자제조업자의 딸 이본느 반도르와 결혼 한 것은 31세 때로서 1남 2녀를 두었다. 차녀는 정신병으로 21세에 죽었다. 48세 때에 파리에서 240킬로 떨어진 고론 베레 두 세구리즈 마을에 집을 사서 일생을 거기서 마쳤다. 하루 생활은 규칙 바르고 질소 청결하며 의례적인 파티에는 나가기를 싫어했다. 취미는 독서와 정원 가꾸기였다.
드골 대통령 일화
1) 암살미수 사건
드골은 <나의 길을 간다.>는 자세를 모든 국면에 강하게 관철한 일도 있고 암살미수에 당한 일도 31건이나 된다.
암살에 대한 유명한 일화로서는 차로 이동 중 4인조의 암살단에게서 기관총으로 난사 당하였다. 그런데 운전수와 동승했던 부인도 무사했다. 그 후 차에서 내려서 측근에게 아무도 부상당한 사람은 없는가 하고 묻자 <4사람이 들어서 한 사람도 죽이지 못하였다는 것은 사격술이 서툴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962년 8월 22일 암살 미수 사건에는 차에 총격을 당하였지만 살아났다. 후에 드골이 말한 바로서는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차녀의 사진 액자가 총탄에 맞아서 그 총탄이 그 액자에 박혀있었다고 한다.
2) 핵무기에 대하여
그는 프랑스 핵무장을 추진하였는데, 개인으로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 된 뉴스를 듣고 <인류를 파멸시키는 일을 인간에게 가능하게 할 수단>의 등장에 절망감을 느꼈음을 회고록에서 말하고 있다.
드골 대통령 어록
1, 위대함은 위대한 인간이 없으면 결코 달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위대해지려고 결심하여 처음으로 위대해진다.
2, 사람은 되고자 하는 인물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조건의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결코 그 인물은 되지 않는다.
3, 프랑스는 전투에는 졌으나 전쟁에는 진 것이 아니다.
4, 파리여 파리는 욕을 당하고 파리는 파괴되고 파리는 희생이 되었다.--그러나 파리는 해방되었다. 자신의 힘으로 해방한 것이다. 프랑스 전토의 지원 하에 프랑스인의 힘으로 싸우는 프랑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프랑스이다. 프랑스여 영원 하라.
* 출처-위키페디아와 인터넷
www.kaho.biz/degaulle.html에서 번역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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