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타섬 모아이 문명 멸망의 교훈
이스타섬 지도
이스타섬은 칠레에서 서쪽으로 3700킬로, 사람이 살고 있는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피토루켄(Pitoruken)섬에서도 2000 킬로나 떨어져 있는 절해고도이다. 크기는 둘레 58 킬로 면적 180 평방 킬로이다. 화산섬으로 자원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섬이 널리 알려진 이유는 1000개가 넘는 거대석상인 모아이의 존재 때문이다. 큰 것으로 9 미터 무게가 90톤이나 된다. 이들 모두는 섬의 안쪽을 향해서 서 있는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오롱고(Orongo)의 암벽이나 동굴 벽에는 기괴한 조인(鳥人)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다시 코화 롱고 롱고(kohau Longo Longo)라는 문자판에는 상형문자가 남겨져 있다고 한다. 이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거대석상의 유래도 전승되고 있지 않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모아이를 만든 사람은 멀리 5세기경에 이곳으로 이주해온 포리네시아계의 사람들이라 한다. 그리고 모아이를 세계7대 불가사의로 한 것은 이스타섬에서 문명이 상실된 결과라고 생각되고 있다.
모아이
현재는 나무도 자라지 않는 황량한 초원인데 도민의 선조가 이주해오던 그 당시에는 녹음이 넉넉한 섬이었다고 한다. 잡곡류도 자라기 어려운 척박한 토양이라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도민은 단순하면서도 닭과 고구마를 주식으로 하는 식문화를 구축하여 잉여시간은 오로지 종교적 제사에 당했다고 한다.
화산도이기 때문에 풍부한 석회석을 그릇으로 다듬어서 거대한 석상을 조각해내었다. 해안선에 산재하는 <아프>라 불리는 제단에 옮겨서 정렬하고 무슨 종교적 의식을 행하였다.
이렇다 힐 자원도 없는 작은 섬에서는 종교제사가 사람들의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유례가 없는 제사문화가 발달하였다. 절해고도이기 때문에 외부에서의 침입자가 없어서 평화로웠다.
인구는 해마다 확실히 증가하여 1600년 무렵에는 섬의 생태계에서 유지할 수 있는 인구를 넘어 7000명(1만 명이라는 설도 있다.)에 달하고 1650년 무렵에는 자주 식량난에 봉착했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때문에 식료 쟁탈을 둘러싸고 부족 간의 항쟁이 빈발하고 마침내는 식인하기까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 증거로서는 이 시대의 지층에서 많은 무기나 부서진 인골이 발굴되고 있다.
부서진 모아이
또 이 항쟁이 일어나기 전에 제사문화의 과열화로 거대화한 모아이의 제조수는 증가할 뿐으로 이를 운반하기 위하여 큰 나무를 벌채하고 또 인구가 증가한 분만큼 난방용 장작이나 가옥의 건설로 인하여 이전보다 많은 양의 나무가 필요하였었다. 그러나 부족 간의 항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거의 나무는 고갈상태였다.
1722년 네덜란드의 J. 록크벤이 유럽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이스타섬을 방문하였을 때 섬은 일면 초원으로 덮여있고 나무는 없었다는 보고가 있다. 도민들은 초가집이나 동굴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렇게 거대한 모아이를 만든 민족으로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약 50년 후 1774년 쿠쿠선장이 방문했을 때는 도민이 무기를 들고 싸우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당시의 인구는 약 600명이었다고 한다. 이때 부족 간의 상징인 모아이의 대개는 힘이 깃든 눈 부분을 뭉개버리고 눕혀지고 마치 문명의 종말을 이야기 하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고 한다.
이스타섬 도민으로서 비극이었던 것은 섬이 전 도민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이미 배를 건조할 나무마저 고갈되었었다는 점이다. 원래는 항해에 뛰어났던 민족이었지만 모아이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나무를 잃은 것은 항해로 신천지를 찾아 이동할 수 있는 기술마저도 없었던 것이다.
모아이버블의 존재는 약 300체의 모아이(전체의 30%에 해당함)가 제작 도중에 버려졌다는 것이 밝혀준다. 이리하여 도민은 문화를 잃고 차차 미개상태로 역행한 것이다.
1862년 이후 노예상인이 차차 도민을 페루로 연행하고 1877년에는 노인과 아이들 100명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이스타섬의 비극은 한정된 자원과 빈한한 환경인데다 자원낭비형의 극단적인 우상숭배의 제사문화를 경쟁적으로 발전시킨 데에 있다.
외부의 문화와 접촉할 수 없이 고립된 세계의 가련한 말로이다.
이스타문명 소멸에서 얻어지는 교훈은 약탈적 자원이용의 결과 말로를 여실히 나타낸 점에 있다. 문명이 발상한 지역에서 현재에도 높은 문명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없고 자원을 다 써버린 결과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을 강요당해왔다.
이집트문명을 상징하는 것은 피라미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피라미드가 이집트 문명의 흥망을 모두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곧 피라미드를 조영하기에는 방대한 노동력이 필요하고 그에 맞는 식량을 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거석을 자르고 운반하기에는 방대한 목재를 필요로 하고 또 증대하는 인구를 먹이기 위한 에너지 자원으로서의 목재 수요도 급증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 결과로서 이집트는 삼림자원의 고갈을 초래한 것은 아닐까.
이집트문명을 전파한 그리스 및 그 주변에서는 지중해문명이 발상하였는데 그것은 상록경엽수림대(常綠硬葉樹林帶)에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이 지역에서도 에너지원이 되는 삼림은 거의 소실하고 말았다. 그런 결과 유럽 문명의 중심은 알프스 이북의 낙엽광엽수림대(落葉廣葉樹林帶)로 이행하고 유럽문명이 번영한 것이다.
유럽에서의 문명의 흥망은 기본적으로는 이스타섬에서 일어난 일과 유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이스타섬처럼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서 외부에 방대한 자원을 가진 전파할 곳이 있었으므로 문명이 발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오늘 날 지구의 총인구는 60억을 넘고 있다. 석유, 천연가스 등 에너지의 수요도 증가할 뿐이다. 현재는 삼림은 에너지원으로서는 가치가 없으나 증가하는 식량 생산을 위하여 해마다 방대한 면적의 삼림이 소실되고 논이나 밭으로 변환되고 있다. 일찍이 엄청나게 거대하다고 생각되었던 지구도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 날에는 작게만 느껴진다.
증가하기만 하는 화석연료의 소비 그리고 삼림 등의 생물권의 대규모 파괴의 연쇄는 이산화탄소의 급증을 초래하고 전 지구 규모의 환경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늘 날은 삼림의 최대의 가치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수원을 함양하는 환경적 가치이고 고대와 같은 에너지원, 식료공급원으로서의 가치와 같이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스타섬의 비극은 지구 규모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데이교대학 기노시타다게시 교수 <이스타섬 모아이 문명 멸망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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