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노예무역 이야기
대항해시대가 개막하자 유럽 사람들은 거부가 될 꿈을 꾸고 신항로의 발견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광대한 토지와 거기에 잠자는 황금의 보석, 비단, 후추, 향신료 등이었다. 15세기 처음 아프리카의 서해안에 상륙한 포르투갈 사람은 발견된 사금과 소수의 흑인을 붙잡고 귀국하였다. 왕에게 헌상하자 왕은 매우 기뻐하고 그 토지를 자기들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서 차차 붙잡힌 흑인 수도 매년 증가하고 운반되는 부의 양도 증가 일변도를 걷게 되었다. 물론 포르투갈에만 한정하지 않고 유럽 다른 나라에도 파급되었다. 이리하여 노예무역이라는 마녀재판보다도 더한 인류의 오점행위가 급속하게 형성되어갔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원래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무시하여 이것은 마치 발견한 자기네의 소유물로서 이후 거기서 수확되는 자원이l나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니 엉터리의 논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신대륙과 노예 삼각무역
콜럼부스가 대서양을 횡단하여 신대륙의 항로를 발견하자 미주 대륙도 그들의 행동 범위에 들어서 지금까지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던 노예무역이 신대륙인 미주까지 더해져서 소위 삼각무역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노예무역은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삼각무역이라는 것은 먼저 유럽에서 흑인노예는 미주나 가리브해역으로 운반되어 매각된다. 그 금으로 사탕이나 면화 광석 등의 원재료를 구입하여 유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때 교환 비율은 약 남자의 경우 럼주 100가론(1가론은 4.5리터), 여자는 80가론, 아이는 100명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총 5정, 혹은 나이프 7개 철의 지금 21개 등으로 교환되었다.
이 유럽, 아프리카, 미주를 둘러싼 무역항해는 한 번 회전에 2개월 정도 걸렸다고 생각된다.
한 바퀴 돌면 원자본의 7, 8배 정도의 이익이 부푸는 구조였다. 거만의 부를 손에 넣기에는 이렇게 몇 차례 하면 되는 것으로 흑인 노예는 백인에게는 막대한 부를 창출하게 하는 검은 화물이었다.
이리하여 노예무역은 유럽의 경제를 지탱하는 기반이라고 해도 좋고 환언하면 유럽의 번영은 노예라는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희생 위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실어온 값싼 잡화류, 럼주 등을 아프리카로 운반하고 거기서 노예무역과 교환된다.
한 흑인 노에의 일생
아프리카에서 붙잡힌 흑인소년 쿤타가 어떻게 노예로서 일생을 마쳤는지 설명해보기로 한다.
1) 카카족의 피습과 상품화
16세 소년 쿤타는 양친과 6세인 누이와 4세인 동생 그래서 5인 가족으로 빈한하지만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카카족 병사들이 마을을 습격하였다. 그것은 새벽의 순간이었다. 카카족은 해안부에 사는 종족으로 다른 부족을 붙잡고는 영국인에게 노예로 팔아서 이익을 내는 잔인한 부족이었다. 양친은 저항할 틈도 없이 일순에 피살당하였다. 어린 누이와 동생은 그 자리에서 살해당하였다. 쿤타는 목에 사슬이 걸리자 4명 일조로 족쇄를 걸리었다. 수 주간 후 영국인 노예상이 기다리고 있는 해안까지 데리고 가서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자세히 신체검사를 받았다. 신체검사를 하는 이유는 가격을 정하기 위해서이다. 눈에 흰 반점이 있거나 이빨이 빠져 있으면 가격이 낮아진다. 쿤타는 우량품으로 정해졌다.
2) 노예 운반선
다음은 배에 실려서 운반하게 되었다. 노예는 남녀 따로 나뉘어서 2명씩 손발이 묶여 한 척에 600명 정도를 실었다.
배는 100톤에서 겨우 200톤 정도의 작은 범선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수의 노예를 실었는데 그 수는 600명 정도였다.
선창은 되도록 많은 노예를 실을 수 있게 180센티미터의 폭에 선반이 양쪽 벽에 몇 개나 만들어지고 공간의 유효하게 쓰이도록 하여 가득 실었던 것이다. 노예 한 사람에게 주어진 공간은 겨우 몸을 둘릴 수 있을 정도로 통속에 넣어진 것 같았다.
안은 어둡고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악취가 풍겼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장실도 없고 용변을 보는 것은 양동이에 하고 배가 흔들리면 쏟아지기도 하여 배안은 오물 투성이였다.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공간에서 몇 주간이나 지내야 했다.
수송 도중에 사망하는 노예가 생기면 이익이 되지 않으므로 건강 상태를 유지하게 하기 위하여 식사할 때는 하루에 2회 정도 갑판으로 나가서 운동을 하도록 하고 주에 1회 정도 갑판에 나가서 샤워를 하게 하지만 이때에도 족쇄는 차고 있어야 했다.
식사는 감자, 콩, 바나나를 가루로 한 가축 사료였다. 이때에는 도망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기회가 되므로 선원들은 총을 들고 경계하고 바다로 뛰어드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배 주위에는 그물을 쳤다.
노예선
선창단면도
그러나 위생 상태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장티프스나 적리에 걸리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 다른 노예들에게 오염이 되는 것이 두려우므로 그런 증상이 있는 노예는 발생 즉시 바다로 버려진다.
선장이 선내를 순회하면서 신체가 쇠약한 자가 보이면 <이 놈은 쓸모가 없다. 버리는 편이 낫다.>고 하면 곧 사형선고가 되었다.
노예 중에는 울면서 울부짖는 자도 있었는데 선원에 의하여 끌려 나와서 그대로 바다에 버려진다. 그들은 몸이 쇠약해져서 상품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면 곧 선외로 내버린다. 바다에는 사나운 상어가 기다리고 있어서 즉시 죽여 버린다.
상어는 항상 배 주위에 떼 지어 있다. 노예가 정기적으로 바다로 버려지므로 상어는 배 뒤를 줄곧 따르고 있는 것이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그것 또한 심한 일이 된다. 창이란 창은 모두 닫히고 선창 안은 사우나탕처럼 된다. 배 멀미로 토한 것 등 오물이 마루에 널린다. 그 위를 양동이 가 굴러다닌다. 악취는 심해져서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풍길 정도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역병이 돌기 쉽고 눈병이 유행한다. 백인들도 실명하여 배가 대해를 몇 주간이나 헤매는 경우도 있게 된다.
종종 반란이 꾀해지는데 성공할 전망은 거의 없다. 반란이 진압되면 보이기 위하여 잔혹한 처형이 행해진다. 반란을 꾀한 자는 많은 사람들 앞에 끌려나와 산 채로 찢기고 목이 잘린다. 심장이나 내장이 꺼내지고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먹이기도 한다. 여자의 경우는 배 기둥에 묶어서 매를 친다. 그 후 몸을 단도로 산 채로 자르거나 가죽이 벗겨지기도 한다. 희생자들은 귀가 찢어질 정도로 절규하며 죽어간다.
쿤타 곁에 있던 같은 연령의 소년이 단식하여 죽으려 한 일이 있었다. 상인들은 중요한 상품인 노예를 자살시켜서는 안 된다고 금속 기구로 강제적으로 소년의 입을 열어서 유동식을 억지로 목으로 흘려 넣었다. 그러나 그 소년은 점점 쇠약해져서 바다에 던져지고 말았다. 항해 중에 어떤 이유로 죽는 노예는 3할이나 되었다고 한다.
3) 노예 시장에서
신대륙에 도착하면 노예시장이 열린다. 노예 상인들은 자기의 상품이 값비싸게 팔리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영양가가 높은 식물이나 야채 과일을 주고 향유를 전신에 바르고 머리를 깎아서 이발을 하고 건강한 인상을 연출한다. 연령이 35세가 넘으면 노인 취급하여 상품가치가 반감하므로 보기에 젊게 보여야 한다.
노예시장
장이 열리면 많은 농장 경영주가 모여든다. 쿤타는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은 무대에 올려 진다. 경영주들은 쿤타의 건강상태와 체력을 알기 위하여 눈, 이빨, 피부등 신체 상황을 자세히 조사한다.
다시 쿤타가 마음에 든 경영주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체크하는데 쿤타는 여러 가지의 모습을 보이고 팔이나 다리 등을 움직여 보이기도 해야 한다.
상품 평가는 약 10분 정도 걸린다. 노예상인들은 상품인 노예를 모두 팔기 위하여 신체의 결함이 있는 자를 포함하여 모개로 팔려고 한다. 이리하여 거래가 성사되면 대금은 일시불이 원칙이다. 쿤타를 포함한 5명의 흑인 노예에 대한 거래가 성립된다. 그때 걸음에 약간 어려움이 있는 여자 노예도 끼어있었다. 경영주는 그녀를 사환으로라도 쓰려고 한 것일 것이다.
4) 노역
쿤타는 팔리자 등에 낙인이 찍혔다. 이것은 경영주의 이니샬로서 이렇게 함으로써 노예가 누구의 소유물인가를 일목요연하게 되는 것이다.
쿤타 일행을 사들인 경영주는 카리브해에서 대규모의 사탕수수 재배를 하는 농원 경영주였다.
300에커나 되는 광대한 토지에서 재배하고 베어내고 그것을 짜내어 당밀로 하고 럼주를 만드는 일까지 일관하여 제조하는 거대농원이었다.
여기는 많은 노예가 밭 경작, 공장, 직공, 집안에 배속되어서 아침부터 밤까지 강제노동에 당하게 된다.
그의 하루는 새벽에 호루라기 소리에서 시작하여 오전 9시경에는 30분 정도 아침식사시간이 주어진다. 아침 식사는 감자류, 콩류, 바나나 등에 소금으로 맛을 들인 것들이다. 정오가 되면 자유시간이 2시간 정도 주어진다. 그런데 이것은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영주의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오후 2시경에 작업이 개시된다. 그래서 밤 7시까지 이어진다. 수확기에는 철야하여 일을 해야 했다.
수확된 사탕수수는 즉시 처리하지 않으면 사탕의 품질에 영향이 있으므로 즉시 짜서 즙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때문에 공장에는 커다란 원통형 철제의 롤러가 회전하고 있고 그 압력으로 사탕수수를 눌러서 즙을 짜내는 압착기계가 가동되고 있다. 이 기계의 압착하는 힘은 대단해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팔이 말려들어가는 두려움이 있다. 많은 노예가 괴로워 수면부족으로 주의가 산만하여져서 사탕수수와 함께 기계에 말려들어가서 팔을 잃는 경우가 있다.
채찍 맞은 흔적
사고는 빈번히 일어나서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럴 때 전체의 작업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끌려들어간 팔은 도끼로 잘리고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런 때문에 도끼는 정해진 자리에 상비하고 있었다. 이런 때문에 농원에서는 한 쪽 팔이 없는 노예가 흔히 보였다.
쿤타는 여기서 10여년을 보냈다. 그 후 다른 경영자에게 팔려서 족쇄를 채운 채로 항구로 끌려간 쿤타는 이번에는 미국에서 면화를 재배하는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는 미국에서는 면화를 재배하는 대규모 농원이 번창했었다. 특히 18세기말에 방적기가 발명되자 농원의 규모는 더 커져서 많은 수의 노예가 필요하게 되었었다. 여기서의 작업은 엄해서 쿤타는 매일 몸이 가루가 될 정도로 일해야 했다. 달이 밝은 날에는 철야해서 일하기도 하였다.
매일의 노예 관리는 엄하고 경영자들은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무기 등을 숨기고 있지 않은지 정기적으로 노예가 사는 집을 검사하였다. 또 노예의 생산고에도 주의하였다.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노예에게는 매를 치는 등의 벌을 가했다.
밤이 되면 노예들은 집에서 밖으로 나와서 다닐 수가 없었다. 혹시 도망이라도 친다면 철야하여 추적하였다. 족쇄를 자르고 도망하여 잡힌 노예가 오른쪽 발가락을 모두 잘린 자도 있었다. 그들은 365일 노동으로 날이 지고 새었다.
36세가 된 쿤타는 오랜 동안 과혹한 노동 때문에 몸이 튼튼하지 못하였다. 보기에는 노인처럼 되어서 장시간 서있을 수가 없어서 다리의 관절통으로 고생하기도 하였다. 이런 때문에 쿤타는 사환처럼 쓰이게 되었다.
노예가 만족하게 일을 할 수가 없게 되면 경영자는 그들을 자기의 집에서 사환처럼 부렸다. 남자는 요리인, 목수, 대장장이, 경비원, 여자는 세탁, 청소, 요리, 아기보기 등으로 부렸다.
이런 사환을 많이 부리는 것은 경영자로서의 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쿤타는 그 후는 달리 팔려나가는 일 없이 사환으로 49세까지 살았다 한다.
유럽인이 남긴 인류사의 오점
일찍이 노예제도는 유럽의 경제기반이었다. 노예무역과 마녀사냥을 보면 사실에 매몰된 인류 최대의 오점을 보는 것 같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붙잡아서 몸에 낙인을 찍고 상품으로서 취급하는 행위가 태연하게 행해졌던 것이다. 노예사냥이 시작되어 3세기반 정도 사이에 노예로서 신대륙으로 끌려간 사람 수는 방대하고 적어도 1천 2백만, 그 과정에서 죽거나 폭력으로 살해된 사람까지를 더하면 그 희생자는 5천 만 명이 넘을 것이라 한다.
이 반세기 사이에 사회는 변하였으나 흑인의 자유에 대한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도 잔인할 수가 있을까. 신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묻고 싶은 말이다.
* <뿌리(roots)>
흑인 작가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는 자신의 출신과 자라온 생애를 알고 싶어서 도서관이나 자료관을 다니며 마침내 7대 전까지의 조상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조상이 아프리카의 노예사냥에 붙잡혀서 노예선을 타고 미국까지 끌려온 것을 밝혀내었다.
자기의 조상이 견딜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어떻게 해서 미국에까지 끌려오게 되었는지를 안 헤일리는 일순간 돌이 되고 전신의 피가 굳어버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헤일리는 1965년 이 이야기를 <뿌리(roots)>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다. <뿌리(roots)>는 발매와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노예제도가 이렇게도 비참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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