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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전기/고대그리스 칠현인

2, 개혁가인 '솔론,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2. 6. 1. 04:38

 

2, 개혁가인 '솔론' 이야기

 

 

솔론의 상

 

솔론(Solon, BC640년~560년?)은 BC6세기경에 활동한 아테네의 정치가, 입법가로서 <솔론의 개혁>을 행하여 그 때까지 행해졌던 귀족정치를 종결시키고 *재산정치의 기반을 잡았다.

솔론의 부모는 명문 출신이기는 하였으나 부유하지는 않았다. 솔론은 젊었을 때 해외 무역에 종사하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것은 축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수양을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그의 지식욕은 “늙었어도 많이 배운다.”고 하였다. 노년이 되어서도 각지를 돌아다니는 생애였다.

 

*주

재산정치=시민을 재산 소유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재산을 가진 평민에게도 참정권을 주었다. 종래에는 귀족의 신성한 의무이던 공동체 방위를 위한 전쟁 행위에 참가하는 것으로 귀족에게만 참정권을 인정하였었다. 그것을 중장비 보병으로서 무구를 자변할 수 있는 재산을 가진 평민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솔론은 외국무역 경험에서 사치나 타약함이나 선원으로서의 위험한 쾌락도 경험하였다. 솔론이 40세 경 자신이 중산계급임을 자각하였다. 그래서 솔론은 항상 “악한 자가 부하여 번영하고 선한 사람으로서 가난한 자가 많다.”고 말하고 “부자의 탐욕과 오만에서 부자와 빈자의 항쟁이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솔론은 그 인격이 고매함이 평가되어 사람들의 추천에 따라 BC594년(46세경) 아테네의 정치를 담당하는 중역을 맡는 집정관이 되었다. 당시 고대 아테네 최초의 성문법인 <드라콘의 입법=BC 621년에 Drakon에 의하여 제정된 아테네의 최초의 성문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법은 애매했지만 관습법을 성문화 한 것이었는데 의연히 귀족에게 유리한 법이었다.

<드라콘 법>은 귀족 우위의 법일 뿐 아니라 매우 엄한 법으로서 살인죄만이 아니라 절도죄 등에도 사형이 규정되었었다. 무역 경제의 발전으로 경제력을 높인 평민들은 <드라콘 법>이 귀족에게만 유리한 불공정성에 대하여 불만이 높아졌다. 집정관이 된 솔론은 <드라콘 법>을 공정하고 현실적인 조문으로 개정하였다. 곧 살인에 관한 사항만 남기고 그 외는 전부를 폐지하여 더욱 민주적인 신법이 되게 하였다.

 

솔론의 개혁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기 나라를 방위하기 위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것은 최대의 명예였고, 무기와 방어도구, 말을 준비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임하는 권리였다.

그리고 국가의 번영과 방위를 위한 전쟁에 참가하는 시민(귀족)만이 국가의 정치에 참가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 때문에 그 때까지 가난했기 때문에 전쟁에 참가하지 못 하였던 평민들도 무역활동을 통하여 경제력을 축적하고 무기를 자변할 수 있는 유복한 평민이 많아져서 정치에 참가하려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그런 때문에 집정관인 솔론은 시민을 재산에 따라 4계급(귀족, 기사, 자작농, 빈곤층)으로 나누어 그에 맞는 참정권을 주었다. 또 솔론은 참정권을 얻지 못하는 빈민 평민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하여 <짐 내리기>(채무 장부의 삭제, 채무 노예의 금지) 법을 내어서 채무 장부에서 삭제하고 채무를 갚기 위하여 신체를 저당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리하여 자작농민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았다.

다시 그는 시민 한 사람이 상처를 받았을 때 그것은 도시 전체의 상처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타낸 “어떤 나라가 살기 좋은가”하는 질문에 솔론은 “부정한 일을 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부정한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과 같은 분노를 느끼는 나라이다.”라고 답하였다.

그는 전쟁에서 죽은 자의 자녀를 도시국가의 경비로 부양하고 교육하는 규정이나 부모에게서 기술을 배우지 못한 자녀는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없다고 하는 등 시민생활의 세부까지를 규정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관직은 재산의 과다에 따라 정해지고 귀족에게 거의 독점되고 있는 토지의 재분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명성을 얻다.

 

<솔론의 개혁>은 귀족계급과 평민계급의 대립의 격화를 억제하고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솔론은 인기에 편승하여 *참주(僭主)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주

=참주(僭主)--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 있었던 비합법적 수단으로 지배자가 된 자로서 대개 귀족 출신으로 평민의 불만을 이용하여 그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독재는 아름다운 산이지만, 한 번 오르면 내리고 싶지 않아진다.”  고 하였다.

솔론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그가 아직 집정관이 되기 전의 일로서 그가 태어난 사라미스를 메가라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한 일이었다. 

메가라는 당시 강국으로서 아테네는 메가라와 싸워 몇 번이나 패하여 사라미스의 방어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아테네 시민은 이후 사라미스의 방어를 위하여 전쟁을 추진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한다는 결의를 민회에서 행했다. 메가라의 침략에서 사라미스를 방어하고 아테네의 영광을 높이기 위하여 솔론은 정치 중심지 아고라에 뛰어 들어가서 전의를 고취하는 노래를 불렀다.

“이런 일이라면 나는 아테네인 대신에 조국을 바꾸어 포레칸토로스섬이나 시키노스섬 같은 작은 섬사람이 되고 싶다. 곧 사람들 사이에 이런 소문이 날 터이니까.

“보라. 이 사람도 사라미스를 배신한 앗티카(앗티카반도)의 남자이다.” 라고.

자! 사라미스에 가서 사랑하는 섬을 위하여 싸우자. 그리고 이 쓰라린 치욕을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계속되는 메가라와의 패전에 의하여 전의를 상실하고 약한 마음에 사로잡혀있던 아테네는 솔론의 몸을 던진 호소에 의하여 메가라와 다시 싸워서 보기 좋게 패배시켰다.

이 메가라와의 전쟁에서의 승리함으로써 솔론의 이름은 일약 아테네 중에 알려져서 <솔론의 개혁>에 의하여 귀족계급과 평민계급의 대립의 격화를 억제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이 개혁이 부유층에도 빈곤층에도 원망을 살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솔론에게 “당신은 아테네인을 위하여 최량의 법률을 만들었는가?”하고 묻는다면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 중에 최량의 것을”이라고 답하였다. 후에 알리스토텔레스는 “솔론은 타인을 억눌러 참주가 될 수도 있었으나 참주가 되지 않고 쌍방에서 미움을 사도 자신의 이익보다도 미덕과 국가의 안전을 중시할 정도로 절제하고 공평했다.”고 평가하였다.

솔론은 이 법률에 백년의 효력을 주어서 나무 회전판에 기록하여 행정부에 걸었다. 500년 후 프르타크가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에도 그 회전판이 낡은 나머지가 있었다고 한다.

 

공직 은퇴와 외유

 

<솔론의 개혁>에는 부유층이나 빈곤층도 불만이었으므로 그는 10년간 법률을 변경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게 하고 공직을 은퇴하여 이집트, 키프러스, 이오니아 지방을 여행하였다.

솔론이 이집트의 사이즈라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 한 사람의 노신관이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솔론이여 당신네들 그리스인은 어린애이다. 그리스에는 노인(현자)이 없다. 정신적으로 모두가 젊다. 당신들에게는 오랜 사상이 전통에 의하여 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또 세월을 지나서 백발이 된 학문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이유를 말하리다. 인간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다 파멸을 당하고 있다. 또 이후로도 파멸될 것이다.

다시 신관은 이제까지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일 모두는 이집트의 신전에 기록되어있는데 그리스인은 전혀 모른다고 말하였다. 그 한 가지가 9850년 전에 바다에 침몰한 위대한 대륙 아틀란티스 문명이었다.

 

솔론과 크로이소스왕과의 만남(상상도)

 

또 솔론은 여행 중 리디아국의 쿠로이소수왕을 방문하였다. 쿠로이소수왕이 통치하는 리디아는 매우 번영했다. 그래서 거부를 이루고 있었다. 왕은 찬란한 왕국의 막대한 부를 솔론에게 자랑하였다. 그리고 왕은 질문하였다.

“솔론이시여. 당신은 유명한 현인이고 세계를 여행하여 식견이 넓다고 듣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솔론은 아테네의 한 시민으로서 테로스라는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그 사람은 특별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솔직한 성품의 사람으로서 좋은 자식들에게도 은혜를 받고 있었다. 살기에 어렵지 않을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나 이름도 없고 지위도 없는 시민이었다. 그러나 이 시민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사랑하는 아테네를 지키기 위하여 감연히 일어나 싸웠다. 그리고 죽었다. 그에게는 사람들은 깊이 감사했다.

현인 솔론은 이 <용감한 시민>이야말로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왕에게 말했다.

왕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면 제이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왕은 다음쯤이야 자신의 이름을 들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솔론이 든 사람은 우애가 돈독하고 효자인 아르고스의 구레오비스와 비톤 형제였다. 이 형제는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고 최고로 기쁘게 해드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축복에 싸여 평온하게 죽어간 시민이었다. 솔론은 이 형제를 “둘째로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판정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화를 내었다. “어찌하여 내가 아닌가요? 권력자인 나를 빼고서 극히 평범한 시민이 행복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솔론은 조용히 말하였다. “당신이 억만의 부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행불행은 시대를 따라서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래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행복의 절정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죽을 때에도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현인 솔론과 왕과의 대화는 끝났으나 왕은 납득하지 못하고 불쾌한 미음만 가지게 되었다.

 

독재정치 저지 기도의 실패

 

솔론은 메소포타미아 및 오리엔트 각자를 견문하여 지식을 깊였다. 그리고 귀국하여 아테네 시민에게 널리 알렸다. 그러나 BC561년(79세) 무렵 솔론의 친족이면서 친구이기도 하며 정적인 페이시스트라트스가 재산정치 하에서 참정권을 부여받지 못한 빈곤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억지로 참주의 자리에 올라 독재적인 참주정치를 시작하였다.

이때 솔론은 민회에 가서 페이시스트라트스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당신네들 중 어떤 사람보다도 현명하고 어떤 사람보다 용기가 있다. 곧 페이시스트라트스의 기도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보다도 현명하고 또 그것을 알면서도 공포심 때문에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용기가 있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민회의 권력기구 거의가 페이시스트라트스의 독재에 긍정적으로 돌아섰으므로 솔론은 참으로 광인 취급을 당하여 그 의견은 완전히 묵살되고 말았다. 솔론은 자신의 설득으로는 민중을 움직일 수 없고 민중이 기뻐하여 페이시스트라트스의 독재에 복종하는 것을 보고 낙담하였다.

친구들은 망명을 권했으나 솔론은 아테네에 남았다. 사람들은 솔론은 참주 페이시스트라트스에게 살해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났다. 그러나 솔론은 80세에 키프러스섬에서 죽었다. 죽음에 임하여 그는 자신의 뼈를 고향인 사라미스에 운반하여 화장하고 그 재를 대지에 뿌려달라고 부탁했다.

 

솔론의 명언

 

1, 무지는 무거운 짐이다.

2, 남에게 복종해봄으로써 어떻게 하여 사람을 지배하는지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 다.(지배하기 전에 복종하는 법을 배워라.)

3, 맹세하는 말보다 인격이 훌륭함을 신뢰하라.

4, 벗을 얻으려 서둘지 마라. 그러나 일단 얻은 벗은 서둘러 버리지 마라.

5, 큰일에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 수는 없다.

6, 충고할 때에는 가장 유쾌한 것보다 가장 선한 것을 충고하라.

7, 이성을 길잡이로 삼으라.

8, 중상에는 중상당하는 자가 상처를 입는 것은 물론이지만 중상하는 자신도 또 상 처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