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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안데스 대제국 잉카문명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2. 3. 23. 14:04

 

안데스 대제국 잉카문명 이야기

 

 

잉카제국의 판도

 

잉카제국(Imperio Inca)은 안데스문명 계통의 최후 선주민 국가로서 남미의 페루, 볼리비아(티티카카호 주변), 에쿠아돌을 중심으로 게추아(Quechua)족이 만든 나라이다. 전신인 쿠스코왕국은 1200년 무렵에 성립하여 1438년 제9대 파차쿠티크(Pachakutiq) 황제의 즉위로 국가로서 재편성을 거쳐 1532년 스페인에 멸망하기까지 이어졌다. 최성기에는 80 개의 민족 1,600만의 인구를 거느리고 현재의 페루, 칠레의 북부, 아르헨티나 북서부, 콜롬비아 남부까지의 국토를 가진 나라였다. 국토는 100만 평방킬로미터(한반도의 약 5배)이고 남북의 거리는 4천 킬로미터나 되는 대제국이었다. 수도는 쿠스코였다.

중미의 마야문명이나 아즈데카문명과 대비하여 남미의 문명으로서 잉카문명이라 한다.

 

Ⅰ. 잉카의 창조신화

 

잉카에는 여러 가지의 창조신화가 있었다. 그 중 하나인 비라코챠(Viracocha=잉카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으로 문명창조의 신이다)전설은 다음과 같다.

문명 창조의 신인 비라코챠는 마을을 건설하기 위하여 쿠스코에 가까운 파카리 탐푸(Paqariq Tanpu)라는 곳에서 살고 있던 4명의 아들 망고 카파크(Manqu Qhapaq), 아야 앙카(Ayar Anca)、아야 카치(Ayar Kachi)、아야 우추(Ayar Uchu))와 4명의 딸 마마 오클로(Mama Ocllo)、마마 와쿠(Mama Waqu)、마마 라와(Mama Rawa)、마마 쿠라(Mama Cura))를 보내서 여행 중에 망고와 마마 오클로 사이에 태어난 신치 루카(Sinchi Ruq'a)가 쿠스코의 골짜기에 친구들을 끌어들여 새 마을을 열었다.

또 형제자매들은 쿠스코의 골짜기를 원정해서 이웃의 10 개의 마을을 병합하였다고 전한다. 이 때 지배자의 상징인 금 지팡이가 아버지 비라코차(Birakocha)에 의하여 망고 카파크에게 주어졌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망고 카파크는 형을 질투와 시기로 죽이고 쿠스코의 지배자가 되어 망고 카파크(Manqu Qhapaq)로 알려졌다고 한다.

 

Ⅱ. 잉카의 국명

 

잉카란 원래 쿠스코에 살던 작은 부족의 명칭으로 그 부족이 중심이 되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당시 황제의 명에 의하여 잉카와 같은 말을 사용하던 부족을 모두 잉카라 부르게 되었다.

정식 제국의 명칭은 타완틴수유((Tawantinsuyu)이다. 타완틴수유란 <4개의 지방으로 된 나라>란 의미이다. 제국을 동서남북 4영역으로 분할하여 각각 지방장관을 임명하였음에 따르는 국명이다.

 

Ⅲ. 잉카제국의 전신 쿠스코왕국의 성립

 

고고학에서는 쿠스코의 요새 사쿠사이와만(Sakusaiwaman) 문명은 기원전 7500년 무렵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잉카의 선조는 현재 <푸나(Poona)>라 불리는 페루의 고원지방을 근거로 유목민족으로서 살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지세조건에 따라 그들의 신장은 작아지고 체형은 강건해지는 특징을 가지고 발달하였다. 평균 신장은 남성이 157센티미터, 여성이 145센티미터였다. 고지에 적응하기 위하여 그들은 다른 지역 사람에 비하여 폐활량이 30% 정도가 커지고 심박수는 적어지고 혈액의 양도 다른 지역 사람보다 많은 2리터가 되고 헤모글로빈 양도 2배 이상이 되었다.

잉카 이전의 안데스문명은 문자에 의한 기록을 전혀 남기고 있지 않아서 잉카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게 출현한 듯하지만 어디까지나 당지의 과거 위에 성립한 것으로 그들은 선행 안데스문화에서 건축양식, 토기, 통치기관 등을 차용하였다.

안데스 세계에는 문자의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그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신화에서 추찰하면 1200년 무렵 게추아족 중의 잉카부족이 중앙 안데스 쿠스코에 지방적 소국가인 쿠스코왕국을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스페인인 연대기 작가의 기록을 통합하면 초대의 망고 카파크(Manqu Qhapaq)로부터 13인의 황제가 즉위하였는데 초대를 제외한 12명의 황제는 실재 인물인 듯하다. 여기서 역산하면 쿠스코왕국의 성립은 1200년 무렵이라고 추정된다.

 

Ⅳ. 안데스 세계의 통일

 

2대에서 8대에 이르는 200여 년 간에는 제국이라고 하기보다 부족이라고 해야 알맞을 정도로 쿠스코를 중심으로 수십 킬로미터 이내의 여러 부족과 전투를 하였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5세기 중엽 무렵 오랜 동안의 숙적이었던 북방의 창카(Chanka)족과 싸워서 승리하고 잉카부족은 급속히 정복을 개시하였다.

제9대 파차쿠티크(Pachakutiq 재위 1438년-1471년 ) 황제는 재위 33년간에 제국의 판도를 약 1천배로 확장하였다. 그리고 신제국 <4개의 나라> 곧 타완틴수유(Tawantinsuyu)로 재편성하고 중앙정부의 수장인 사파 잉카(황제)와 강력한 지도자가 이끄는 4개의 속주로 된 연방제로 하였다.

제11대 황제 화이나 카파크(Huayna Capac、재위1493년-1527년 )는 다시 영토를 확장하여 안데스 세계의 1백만 평방킬로미터(한반도의 약 5배), 남북의 거리 4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제국이 되었다.

 

Ⅴ. 정치와 지배체제

 

1) 왕통 계승

잉카제국은 군주국가로서 근친결혼에 의하여 태어난 일족에 의한 세습정치였다. 제국의 왕좌에 즉위할 수 있는 자는 같은 양친인 왕과 왕후에게서 태어난 왕자로서 첫째 공주를 아내로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첫째 공주는 친 오빠나 오라비의 정처가 되고 왕비가 된다.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장자가 제국의 왕위를 정당하게 계승할 수 있다.

만일 왕의 첫째 공주가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에는 둘째, 셋째로 아이를 낳을 때까지 차례로 결혼을 해야 했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관에서 널리 교잡함으로써 황족의 혈통이 순결성을 잃게 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황제는 태양신의 화신이라 생각하고 신하가 황제를 알현할 때는 직접 볼 수가 없었다.

 

2) 행정조직

제9대 황제 파차쿠티크(Pachakutiq)의 제국 재편성에 따라 잉카는 <타완틴수유((Tawantinsuyu)>라는 국명처럼 전국을 4개의 영역으로 나누었다. 곧 타완(Tawan)은 4를 의미하고 수유(Suyu)는 영역 또는 나라를 의미한다.

북은 친차수유(Chinchasuyu), 남은 콜라수유(Qollasuyu). 동은 안티수유(Antisuyu), 서는 콘티수유(Qontisuyu) 등 4개의 커다란 관리지역으로 구성되어 통치되었다.

4대 지방을 황족에서 뽑힌 장관이 그것을 지배하였다. 그들은 다시 수도 쿠스코의 최고회의를 통하여 정치행정이나 사법을 관장하였다.

그 4개의 영역을 수유(Suyu=연방제 국가의 주격)라 하고 그 수유 안에 몇 개의 현(와만), 그 중에 1만 명 단위의 군(유뉴)이 있다. 곧 주-현-군 단위로 통치를 위한 행정구역을 정하였다.

다시 평민은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이웃으로서의 집단으로 묶었다.

현의 수장은 잉카의 피를 받은 상층 귀족으로서 최고회의에서 임명된 현지사가 맡아 다스렸다.

그는 주로 부하인 관리들을 통수하고 다시 지방 여러 도시를 시찰하여 농지의 경작 상태, 관개상황, 촌락의 위치, 인구 조사, 가축의 수 등을 건사하고 있었다. 다시 관리들로부터 퀴프(결승문자)로 기록된 정보를 모아 그것을 중앙인 쿠스코의 최고회의나 황제에게 제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결승문자를 기록하거나 읽는 일은 퀴프 (결승문자)의 전문가가 행하였다.

잉카는 정복한 부족의 수장을 <구라카>라 부르는 귀족계층으로 정하고 군 단위의 지배를 맡겼다. 곧 피정복 평민 전부를 <구라카>라는 잉카의 귀족계층에 의하여 통치되고 1000명 단위의 군(우뉴)은 원래의 집단 그대로였다. 그러므로 정복당하기 이전의 아일루(공동체)가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또 잉카는 그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특별한 주민이주정책을 썼다. 곧 정복지의 주민의 일부를 서로 바꾸어 이주시켜 서로 견제하게 하여 반란을 방지하도록 꾀하였다. 동시에 인구가 적은 지방에 노동력을 보급하여 토지의 수익을 올리고 인구의 과잉지역에서는 그 인구를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Ⅵ. 유물 유적

 

1) 사쿠사이와만 성채

잉카문명에 사크사이와만(Saksaq Waman=성채 겸 종교시설의 유적) 유적이 있다. 쿠스코 교외의 북부에 있는 거대한 성채인데 하나의 돌이 매우 거대하여 그것을 어떻게 잘라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운반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짜 맞추었는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쿠사이와만 성채

 

 

오랸타이 탐폰 석죽

 

하나의 돌이 너무나 거대하여 전체의 무게는 2만 톤이나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거대한 바위가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어디서인가 운반해 온 것이다.

운반하였다 하여도 간단한 도구밖에 없었던 그 옛날에 도대체 어떻게 하여 운반해 온 것일까? 그런 점에서 사크사이와만 유적은 우주인의 손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라는 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쿠스코 시내에 남겨진 유적 <오랸타이 담폰 (Oryantai tampon)>에는 거대한 빌딩만큼 한 한 덩이의 바위가 있는데 분명히 어디선가 잘라내어 운반된 흔적이 있다.

 

2) 마추픽추

험한 절벽의 산꼭대기 표고 2,450미터의 높은 곳에 그 도시의 유적이 있다.

이 고대도시는 신전이나 궁전, 거주구 등으로 구분되어 주위는 성벽으로 굳혀있다. 총면적은 5평방킬로미터 정도이다. 그 반 정도의 경사에 계단식 밭이 보인다.

 

 

공중도시 마추픽추

 

마추픽추에는 400채 정도의 주택 유적이 있고 그 어느 것이나 20톤 전후의 거석으로 축조되었다. 도시의 서쪽에는 훌륭한 궁전과 신전이 만들어졌고 신전 제단에는 실로 100톤 이상이나 되는 거대한 돌이 사용되었다. 이들 거석과 거석은 교묘하게 짜여서 수 백 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면도날 한 장 낄 수가 없이 짜였다. 석재를 다루는 장소는 600미터나 아래로 내려온 험한 계곡 밑에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는데 철제 공구를 모르는 잉카(Inca)인이 어떻게 해서 돌을 잘랐는지 그리고 몇 십 톤이나 되는 거석을 어떻게 산위로 올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3) 잉카의 도로

잉카의 석조 간선도로는 북부의 퀴토(Quito=에콰도르의 수도) 에서 칠레의 중부 탈카(Talca=칠레의 도시)까지 5,230킬로미터에 달하고 있다.

 

잉카의 도로

 

실제로 이 도로에는 7킬로미터마다 이정표가 있고 약 19킬로미터마다 숙사가 설치되었으며 차스키(Chaski)라는 파발꾼이 약 8킬로미터마다 설치되었다. 숙사와 숙사 사이에 릴레이식으로 하루에 240킬로미터의 거리에 정보를 전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도로는 제국을 유지하는 데에는 필요했으나 거꾸로 스페인인에 의한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도 하였다.

 

Ⅶ. 경제생활

 

1) 잉카의 토지제도

토지, 광산, 가축 등 모든 생산 수단은 공동체에 귀속하고 귀족도 사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공동체를 아일루(Ayllu=페루, 볼리비아의 혈연, 지연조직을 말함)라 부른다. 이 아일루의 토지는 태양의 토지, 왕의 토지, 그리고 주민의 토지 등 3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주민에게는 그 가족을 부양하는 데에 필요한 토지가 주어졌다. 가족이 성년이 되어서 독립하거나 부양할 인수가 줄면 토지도 따라서 줄어든다. 또 경작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그 토지는 공동체에 반환된다.

이처럼 해마다 주민에게 얼마의 토지를 나누어 줄 것인지는 매년 갱신되는데 그 근거가 되는 것이 퀴프(결승문자)에 의한 주민정보의 파악이다. 이에 따라 토지 분배량을 결정하였다.

아버지가 스페인 정복자이고 어머니는 잉카의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잉카 카르실라소 데 라 베가(Inca Garcilaso de la Vega, 1539-1616)가 지은 잉카제국의 창설에서부터 멸망까지의 역사, 풍습, 문화 등의 전모를 재구성한 연대기 <잉카 황통기(皇統記)>에 따르면

“한 사람에게 옥수수 재배를 위하여 1도프(도프=면적 단위)의 밭을 준다. 1도프의 토지는 자식이 없는 부부의 생활을 지탱하기에 충분했다. 아이가 생기면 각각 남자에게는 1도프를 여자에게는 반도프의 토지를 준다. 그리고 아들이 결혼하면 아버지는 그 아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받은 1도프의 토지를 그 아들에게 주었다. 딸은 결혼하면 자기의 토지를 내놓아야 했다.

딸이 시집을 간 후 그 토지는 필요하면 아버지 것이 되고 필요하지 않으면 공동체에 반환한다. 토지는 매매할 수가 없다. 토지는 사유가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한 농작물을 얻기 위한 토지이다. 한편 광산이나 가축 등 모든 생활수단은 공동체에 귀속하고 귀족들도 사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잉카의 계단밭

 

 

잉카황제와 태양신의 토지에는 공동으로 노동을 제공하고 그 소산은 왕족을 부양하고 나머지는 <고루카>라는 국가 창고에 비축해두었다가 전쟁 시의 식량이나 기근일 때에 주민에게 배급하였다. 이처럼 토지의 소유형태를 보면 지배층도 서민도 재산의 사유화로 축재를 하고 축재를 위하여 경쟁하고 권력 투쟁을 하는 것 같은 의식은 없었다.”

곧 잉카에서의 토지 분배는 수탈을 위한 것이 아니고 부양에 필요한 분만큼 분배하는 조정분배 또는 균등분배라 할 수 있다.

경지를 늘리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관개에 의하여 토지를 개간하고 경지로 바꾸어서 면적을 늘렸다. 정복지의 경우에도 정복한 그 지방의 토지를 왕이 경지로 바꾸어 피정복자에게 재분배하여 경작하게 하였다.

왕은 피지배부족이나 신하에게서 수탈하는 일이 없고 사사롭게 축재하는 일이 없었다.

 

2) 잉카의 조세제도

화폐가 없었던 잉카에서는 조세는 모두 사람의 노동력으로 지불하였다.

주민에게 주어진 토지의 수확물은 주민의 소유로서 상납할 필요가 없었고 상납해야 하는 것은 왕의 토지나 태양의 토지를 경작하는 경우 노동력을 제공하여야 했다. 단 종자는 왕이 부담했다. 그리고 임시 부역으로서 도로, 건축, 광산, 전쟁을 위하여 성인 남자를 징집하였다. 전쟁이 났을 때에 전쟁에 필요한 무기, 의류, 신발 등에 대해서는 무기는 무기의 재료가 생산되는 토지에서 상납하고, 의류나 신발 등은 그 재료가 되는 가죽이나 모피는 왕이 주고 주민은 옷감을 짰다.

 

Ⅷ. 종교와 교육

 

잉카시회에는 종교가 깊이 침투하였었다. 최고신은 창조의 신인 비라코챠(Viracocha)였는데 태양, 달, 별 등 천체의 신이나 농사의 신, 지모신, 미라의 신앙도 깊었다.

<태양신>은 잉카 황제의 선조이고 황제는 살아있는 신으로 숭앙하였다. 황제의 의사는 곧 법이었다.

<잉카 황통기>에 따르면 태양을 숭배하는 것이 이 나라의 종교라서 쿠스코의 중심에는 태양신을 모시는 신전이 건설되고 태양신을 섬기기 위하여 선택된 처녀들을 모은 <태양의 처녀의 집>이 건설되었다.

그녀들은 태양의 처녀 또는 아내로서 태양신을 섬겨야 하므로 태양(황제)과 같은 혈통이 아니면 안 된다. 곧 잉카족의 왕이거나 그 친족이라도 좋다. 반드시 정통 잉카의 딸이라야 했다.

그 처녀들은 일생 외계와의 접촉을 끊고 순결을 지키며 죽을 때까지 태양신에게 바치는 여러 가지의 물건을 만들며 조용한 생활을 보냈다.

 

복원된 태양신전

 

그곳에는 외계의 남자나 여자와의 대화를 하기 위한 장소는 전혀 없었다. 대화의 상대는 오직 그 안에 있는 처녀들뿐이다. 비록 왕이라도 그녀들과 만나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이는 가신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 솔선수범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관료는 동시에 신관이기도 하였다.

<지식은 서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에서 문화 활동은 귀족계급에만 허용되었다. 서민은 각각 일에 필요한 것만을 가르쳤다. 수공업 등의 기술도 귀족이 독점하였다.

잉카의 지식계급은 왕후, 귀족에 속하고 특정한 학교에서 자제를 교육하였다. 교육은 4년제로 공용어인 게추아어를 배우고 신학, 제사, 종교의 교의를 연구하고 다시 결승문자의 독해 기록법의 비전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잉카의 역사 전승을 배웠다.

 

Ⅸ. 문화

 

문자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구어전승에 의한 것이 스페인인 수도사에 의한 기록(연대기) 형식으로 약간 남아있다. 문자는 없으나 퀴프(Quipu)라는 결승문자가 시용되었다. 퀴프(결승문자)로 수자표기나 역법 납세 등의 기록을 행하였다. 최근에 이 퀴프가 언어정보를 포함하고 있다는 연구가 있다.

 

 

 

퀴프

 

금은세공품 

 

 

안데스문명 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금, 은, 동, 주석 등의 합금을 정련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고온 로를 만들 수가 없어서 철의 제련 기술은 없었다.

또 기하학적 문양이 그려진 목이 긴 첨저토기(尖底土器)가 특징이다.

바다에 면한 비탈진 토지를 이용하여 계단식 밭을 만들고 토마토, 고추는 낮은 토지에서 감자는 고지에서 제배되었고 고도에 따른 여러 품종의 농작물이 생산되었다.

험준한 산맥지대의 국토를 유지하기 위하여 황제는 골짜기에 구름다리를 놓고 돌로 도로나 계단을 만들고 도중에 곡식 비축 창고를 설치하였다. 인력이나 가축의 힘으로 운반하는 수밖에 없고 수레는 발명되지 않았다. 야생마를 길들여 운반 수단으로 쓰지도 않았다.

 

원래 잉카제국 초창기에는 미라 신앙은 없었으나 정복한 산악지방에서는 시체는 매장하지 않고 동굴을 묘 삼아서 안치하는 것이 통상이었다. 그들은 공동체의 기원이 되는 위대한 조상을 미라화하여 살아있는 것처럼 숭상하였다.

왕조는 이를 받아들여 역대 황제는 인심을 장악하는 수단 그리고 권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왕조의 기본으로 하고 판도를 넓히는 고리로 삼았다.

 

포대에 싼 미라

 

예를 들면 잉카가 아마존 접경지역을 정복할 때 그 지역에서는 그때까지 바위 절벽 중간에 있는 동굴에 선조의 유골을 안치하여 묘로 하였으나 잉카는 그들의 유골을 포대로 싸서 미라로 안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잉카 중앙정부에 마음이 끌리게 하였다.

또 황제는 사후에 미라로 하여 시종들이 그 죽은 황제의 재산으로 그 미라를 관리하여 황제의 생전과 같은 권위를 지탱하였다. 다음 황제는 전 황제로부터 유산을 상속 받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신 황제는 자신의 재산을 얻기 위하여 영토학장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를 거듭함에 따라 죽은 황제가 현 황제보다 권위가 높아지고 필연적으로 죽은 황제의 시종들이 정치 세력화할 수도 있었다. 12대 황제는 이런 모순을 없애기 위하여 역대 황제의 미라를 합장하여 매장하게 하고 그 시종들의 재산을 몰수하려 하여서 내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Ⅹ. 잉카제국의 멸망

 

1532년 일획천금을 꿈꾼 스페인군인인 피자로(Francisco Pizarro、1470년-1541년)는 사병을 이끌고 잉카제국의 북단에 있는 고을을 정찰하여 잉카제국의 병력이나 장비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일시 귀국하여 스페인 왕실의 정식허가를 받아서 페루의 총독 겸 사령관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리고 멕시코 정복자인 코르테스에게서 <왕을 붙잡으면 이긴다. 만일 왕을 놓아버리면 그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싸울 것이다.>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고을에서 살인, 약탈, 강간을 되풀이하면서 잉카의 수도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당시 잉카 국내에서는 정통황후의 소생으로 12대 황제가 된 화스카르( Huáscar、1503년-1532년、재위1527년-1532년 12대 황제)는 자신이 정통황제라 주장하고 측실 소생인 아타활파(Atahualpa、1502년-1533년 재위1532년-1533년 후에 13대 황제)에게 충성맹세를 요구하였으나 아타활타가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12대 황제 화스카르는 북으로 침공하여 아타활파를 공격하고 유폐시켰으나 탈출한 아타활파는 후에 화스카르를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황제로 등극을 선언하였다. 그래서 13대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쿠스코로 남하하는 도중 안데스 산맥의 분지인 카하마르카(Cajamarca=페루 북부 표고 2750미터의 분지)에 들렀다.

 

피자로의 동상

 

이 무렵 1532년 7월 피자로는 스페인의 주유에 관하여 회담하고자 사자로서 카톨릭 바루테루테 신부와 현지 통역을 황제 아타활파에게 보냈다.

바루베루테 신부는 통역을 통하여 황제와 그 백성의 기독교로의 개종을 요구하고 거부한다면 기독교와 스페인의 적으로 삼는다고 전했다. 아타활파는 <누구의 속국도 되지 않는다.>고 하여 스페인인의 주유를 거부하였다. 사자들은 돌아와서 그 상황을 알렸다. 피자로는 1532년 11월 16일 카하마르카(Cajamarca)에 있는 황제 아타활파군에 대하여 기습을 준비하였다.

피자로는 스페인 법에 따라 스페인 황제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므로 선전포고를 한다고 선언하였다. 아타활파는 바루베루테 신부에게 그대들이 무슨 권위로 그런 말을 하느냐 하고 냉정하게 묻자 신부는 성서를 황제에게 권하고 이 속에 있는 말씀에 유래하는 권위라고 답하였다. 황제는 성서를 조사하여 <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냐?> 하고 묻고 성서를 땅에 내던졌다. 이 행동은 잉카에는 문자가 없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스페인으로 하여금 싸울 핑계를 주게 된 것이다. 신부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다.” 하는 소리에 맞추어 사격이 시작되어 2시간에 걸쳐 7천명 이상의 비무장 잉카 병사가 살해되었다. 황제 아타활파는 가마에서 끌어 내려져서 태양의 신전에 투옥되었다.

아타활파 황제는 스페인인들이 잉카제국을 지배하려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아서 그들이 찾고 있는 금은을 방 가득히 모아 줄 터이니 석방해 달라고 제의하여 피자로는 이에 동의하였다. 피자로는 잉카의 백성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황제로 하여금 피자로가 잉카제국 전토의 총독이라는 선언이 필요해서였으나 석방할 의도는 없었고, 결국 간이 재판을 열고 황제가 우상숭배를 상습으로 하고 제12대 황제인 화스카르를 살해했다는 죄로 처형하고 말았다.

다시 처형하기 전에 피자로군은 황제의 명령으로 파견된 군대라고 하여 저항을 받지 않고 수도인 쿠스코에 입성하고 행정을 장악하였다. 1533년 이로써 잉카제국은 멸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