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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안데스문명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2. 3. 14. 11:55

 

몽고로이드가 남아메리카에 이룩한

안데스문명 이야기

 

 

 

안데스문명이란 1532년 스페인에 의하여 잉카(Inca)제국이 정복되기 전에 현재의 남미대륙 페루를 중심으로 하여 태평양 연안지대와 페루에서 볼리비아에 이르는 안데스 중앙고원에 존재했던 문명을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1만 8천 년 전에 지구 기온이 급속히 저하하여 북극권 남극권의 얼음이 발달(연간 평균 기온이 8도 정도였다 한다.)하고 해수면이 140 미터정도가 낮아져서 시베리아, 아류산열도와 미 대륙이 연륙이 되었다.

이때에 바이칼호 근처의 몽고로이드가 일부는 중앙아시아로 일부는 태평양 연안을 남하하고 또 일부는 알라스카를 경유하여 북미에로 흘러 들어가서 오랜 시간 동안에 남미에까지 이르렀다. 안데스문명을 형성한 사람은 이 몽고로이드이다.

남미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1만 4천 년 전이라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클로비스 문화(Clovis culture)에 병행하는 1만 1천 년 전 어미형첨두기(魚尾型尖頭器=석기)를 사용하여 수렵을 한 사람들이고 기원전 7500년 전부터 동굴이나 바위 밑에서 생활하였다.

 

안데스문명의 특징

 

1, 문자가 없다

문자가 없는 대신에 매듭으로 정보를 기록하는 퀴프(Quipu=결승문자)란 것이 있었다.

 

퀴프(결승문자)

 

 

2, 청동기 단계이다.

철이나 청동을 전혀 쓰지 않고 신석기 단계였다.

3, 금이나 은의 주조 기술이 발달했다.

4. 가축을 사육하지 않았다.

라마는 운반 수단으로 알파카는 털을 쓰기 위하여 그리고 식용으로는 천축서(天竺鼠/C. tschudii=크기가 20~40센티이고 작고 둥근 귀를 가지고 꼬리가 없음, 앞발에는 발가락이 4개 뒷발에는 3개가 있는 설치류 초식동물)가 사육 되었다.

5, 수레의 원리를 모르고 있었다.

6, 괴경류(塊莖類)를 주요한 식물로 삼았다.

감자, 고구마 등을 주로 재배하였다. 해안지대에서는 물고기와 조개류도 식용으로 하였다.

옥수수는 식용이 아니라 치차라는 술의 원료로 삼았다.

7, 안데스 특유의 생태학적 환경과 문화 문명의 발전에 깊은 관계가 있다. 해안지대, 산간부, 고원지대 등 전혀 다른 환경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총체적으로 안데스문명을 발전시키고 있다.

 

인류의 정착과 농경, 목축의 시작

 

남미에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흔적을 나타내는 최고의 유적은 1만 4천 년 전이라는 연대측정치를 나타내는 유적도 보이지만 확실한 것은 클로비스문화(Clovis culture)와 병행하는 1만 1천 년 전의 물고기의 꼬리 모양의 어미형첨두기(魚尾型尖頭器=석기)를 사용한 수렵인들의 유적이다.

 

 

어미형 첨두기(석기)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남쪽 120킬로미터에 있는 마스토돈(Mastodon=약 40000만년 전~11000년 전에 생존했던 코끼리나 맘모스 같은 대형 포유류 동물)을 해체 처리했던 타구와타구와 (Taguwataguwa) 유적은 이 시대의 특색을 나타내는 유적이다.

이윽고 기원전 7500년 무렵까지에 동굴의 개구부나 바위 밑을 이용하여 생활하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페루의 토게팔라(Toquepala) 동굴이나 아르헨티나의 라스 마노스(las Manos) 동굴에는 그런 사람들의 수렵에 대한 염원을 표현한 동굴벽화가 그려져 있다.

 

토게팔라동굴 벽화

 

 



라노 마노스동굴 벽화


 

기원전 5000년 무렵부터 농경, 목축을 행하는 사회가 되었다.

기원전 6000년~3000년 무렵에 페루 북부고지의 라우리코챠(Raurikocha)유적에서 이전에 많았던 사슴에 바뀌어 라마 알파카 등 낙타과 동물 뼈의 출토량이 증가한다.

기원전 5500년~4200년 무렵에 중앙고지 우챠쿠마차이(Uchuku Ma Chai)동굴에 역시 낙타과 동물 뼈의 출토량이 증가함을 볼 수 있어서 낙타과 동물을 사육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또 기원전 6000년 무렵까지는 옥수수, 호박, 박, 콩 등이 재배되기 시작하였음을 북고지의 기타레로(Gitarero)동굴 출토의 식물 유존체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 기원전 3000년~2000년 무렵부터 목화, 칸나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제왕국의 성립되기까지

 

신전 군의 탄생

 

기원전3000년~ 2500년 무렵이 되어서 현재 리마시 북방 수페(Supe)계곡에 카랄((Caral)이라는 석조건축을 주체로 한 유적이 나타난다.

해안유적은 볕에 건조한 벽돌로 만든 것이 많은데 이 시기의 유적에는 석조건축이 있다. 카랄(Calal)유적에서는 꽤 많은 양의 어개류(魚介類)가 출토되고 있다.

 

 

칼랄 유적

 

칼랄 주거터

 

또 페루의 북부해안에 와카 푸리에타(Waka Purietta)의 촌락 자취나 알토 사라베리(Alto Saraberi), 중앙해안의 가스마 계곡에 와이누나(Wainuna), 중앙해안지대에 아스페로(Asupero), 중앙해안지대에서 리마 북방에 엘 파라이소(El Paraiso) 등에 신전이 구축되었던 자취가 있다. 엘 파라이소(El Paraiso)는 U자형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그 일변이 400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 한편 산간부에서는 소형의 신전이 세워지게 된다. 기원전 3000년 무렵에 북부고지 산타(Santa)강 상류에 라 가루가다(La Garugada)의 신전, 기원전 2500년 무렵의 코토슈(Kotoshu) 유적이 있는데 이는 페루 중부에 있는 고대 건조물 유구군으로 유적은 직경 100미터 높이 14미터 십 수 층의 생활유구로서 게추아어로 <작은 돌 산>이란 뜻이 있다. 또 9미터 사방의 <교차한 손의 신전>이 지어졌다.

 

 



교차한 손의 신전 자취

 

당시는 아직 토기를 가지지 않은 시대로서 토기 탄생 이전에 이런 신전군을 탄생시킨 점에 안데스문명의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왕의 존재를 인정할 만한 것은 지금은 나오지 않는다.

 

토기의 사용과 문화 형성

 

기원전 1800년에 이르러 토기를 이용하게 되었다.

기원전 800년 무렵부터 남미대륙 안데스 고지 페루의 북부에서 중부에 걸쳐 기원전 100년 무렵까지 안데스문명 형성기의 문화로서 종교성이 강한 차빈(Chavin)문화가 번영했다. 유적은 약 300미터 사방 지역에 지하신전, 석조건조물, 프렛홈, 테라스, 조각된 석주 등이 있는 종교시설이 만들어지고 안팎으로 고양이나 괴수의 상을 조각한 원주나 석상이 세워졌다. 그 후 페루의 산악지대에서 평지에 걸쳐 토기와 금속기(금, 은, 동) 등 차빈문화의 분포가 밝혀져서 후의 인카문명과는 다른 그에 선행하는 문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같은 무렵에 북부해안에는 정치한 토기를 가진 쿠피스니케(Cupisnique)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차빈문화 유적

 

완다르 유적(차빈문화)

 

그러나 기원전후에 이르러 신전을 중심으로 한 사회는 무기나 전쟁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곧 전쟁 없이 신전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사회가 운영되었던 시대이다. 이후 신전시대가 소멸하고 차츰 왕국이 탄생한다.

 

국가가 탄생되기까지

 

기원 전후부터 기원 700년 사이에 페루 북부해안 현재의 트루힐로(Trujillo)시 주변에 모체(Moche)문화가 번영했다. 모체문화는 페루 북부해안으로 들어가는 모체강에서 딴 이름이다. 아름답게 채색되고 사실적인 인면, 동물, 작물 등을 그린 등형주구토기(鐙型注口土器)와 금과 주석 합금 세공이 훌륭한 부장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체의 은세공품

 

기원 전후부터 800년 무렵까지 현재의 페루의 해안지대 현재의 나스카시 주변에 나스카((Nazca)문화가 번영하였다. 안데스문명 중에 관개시설이 정비된 개척이 진행되었다. 1980년에 처음으로 밝혀진 벽돌조의 피라미드와 신전이 건축되었다 하니 종교적 중심은 나스카강 유역의 가와치(Kawachi)유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나스카지상화로 유명하다.

 

 

나스카 지상화 배치도

 

수렵이나 농업을 주 생업으로 하고 조금의 어업도 행해졌다. 처음에는 종교적 성격이 강하고 후에 군사적 성격이 강해졌다. 노예제도는 없었으나 사회계층은 엄격했다고 한다. 서민은 등나무로 골격을 엮어서 칠을 칠한 주거인 긴차라는 주거에서 살았다.

 

기원 700년 무렵부터 1000년 사이에 페루의 산간부에는 와리(Wari)문화가 번영했다.

특히 와리문화의 특징은 지팡이를 짚은 정면을 향한 인물이 그려진 대형 항아리나 컵 모양의 토기와 흑요석제의 석기류(石器類)가 유명하다. 와리문화에서는 옥수수 술을 사용한 의례활동이 성했다. 이 의례 행사가 끝나면 토기를 부수고 땅에 묻는 의례가 있었고 토기에는 인물상을 그렸다. 흑요석 유통도 활발했는데 다른 석재와 비교해서 중시하지는 않았다.

와리에서는 각지를 지배하기 위하여 도시다운 양상을 지닌 건물이 각지에 지어졌다. 페루 북부 와마추코(Wamachuko)시 교외의 비라코챠(Birakocha)유적이나 남부 쿠스코에 있는 피키랴쿠타(Pikiryakuta)유적이 유명하다. 벽을 2중으로 두른 장방형의 방을 특징으로 한다.

또 와리(Wari)가 안데스에 계단식 밭을 넓혔다 한다.

 

또 현재의 볼리비아 고원지대에는 기원전후로부터 티와나쿠(Tiwanaku)문화가 일어나 기원 1100년~1200년 무렵까지 이어졌다.

티와나쿠 유적은 볼리비아 티와나쿠에 위치한다. 티티카카(Titicaca)호 연안에서 내륙으로 17킬로미터 들어간 곳에 있으나 거의 파괴되어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종래에는 이 유적은 단순한 종교순례지로서 사람이 살지는 않았던 곳으로 알았다. 그러나 최근 조사 결과는 유적 주변에 꽤 많은 주거지 자취를 확인하고 도시양상을 띠고 있다고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식량 생산도 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타와나쿠 유적 석상

 

 

그 후 페루의 북부해안에는 8세기 무렵부터 라레츠(la leche) 강 유역에 시칸(Sicán)문화가 번영했다. 시칸문화는 기원800년에 멸망한 모체문화의 후예로서 유물에 공통점을 가진다.

시칸문화 사람들은 에쿠아돌에서 대형패류가 북 콜롬비아에서는 호박(琥珀), 남 칠레에서는 청석(靑石), 마라뇬 (Marañón)강 유역의 금 등의 교역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칸문화의 뛰어난 품질의 토기나 통화로 쓰인 조개나 광물을 교환하고 주민 문화와 교역이 성했다고 생각된다.

 



시칸의 금세공품

 

 

900년에서 1100년 사이에는 바탄 그란데(Batán Grande)라는 도시는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이 도시의 지배자의 무덤에서는 금은 술잔, 에메랄드, 진주 등 보석과 조개와 깃으로 장식된 황금 가면을 한 미라가 발견되었다.

여러 가지 모양의 토기제작이 성행하고 그 토기는 검은 광택이 나는 것이 특징이었다. 토기의 대량 생산이 가능했고 금속제품과 함께 교류가 성하였다. 1375년에 이르러 치무왕국에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850년 무렵부터 모체(Moche) 강 유역에 치무(Chimú)왕국이 일어났다. 치무왕국은 기원 850년에서 1470년 사이에 존재하였고 후에 시칸왕국을 병합하여 한때 안데스 인구의 2/3를 포함하고 1000킬로미터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었다. 현존하는 최대의 유적은 찬찬(Chan Chan=남미 최대의 고대도시)이다. 치무왕국의 도기는 칠흑이었고 정교 복잡한 금공예로도 알려졌다.

 

 

치무의 달의 신전터

 

 

 

치무의 토기상

 

 

또 1000년-1300년 무렵 페루의 중앙해안지대 현재 리마북방 찬카이(Chankai) 계곡에는 사람의 모양을 본 딴 토기와 직물 기술로 유명한 찬카이(Chankai) 문화가 개화했다.

10세기 무렵에는 페루의 중앙해안지대에서 중요한 신전도시로 발전한 파챠카마크(Pachacamac)문화가 일어나고 티티카카(Titicaca)호 연안에는 티와나쿠(Tiwanaku)사회가 붕괴된 후 아이마라(Aymara) 족에 의한 제 왕국이 정립하여 정쟁이 계속되었다.

잉카는 이 정쟁을 이용하여 그들을 정복하고 다시 티티카카(Titicaca)호 남안의 파카헤(Paqaje) 등을 정복하여 1470년 무렵까지 티티카카(Titicaca)호 연안을 평정하였다.

 

 

찬카이 토기인물상

 

 

파차카마크 신전터

 

최후로 페루 남부 산간부에 있는 쿠스코(Cuzco)분지에서 인카가 일어나 15세기 전반부터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여 15세기 후반에는 치무(Chimú)왕국을 굴복시켜 안데스일대에 걸친 잉카제국을 성립시켰다.

 

선주민 최후의 왕국-잉카제국

 

잉카족(게추아족)은 12세기 무렵에 쿠스코의 지방부족으로 성립되어 망코 카파크(Manco Capac)의 지휘 하에 소규모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다. 1438년에 9대 황제 파차쿠티(Pachacuti、재위 1438~1471년)는 원정을 통하여 국토를 확대하여 안데스산맥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에 안데스 제 왕국을 정리 총괄하는 형식으로 잉카제국은 탄생하였다. 그 영토는 북으로는 콜롬비아 남부에서 남으로는 칠레의 산티아고에 까지 이르는 안데스문명권을 장악한 최후의 선주민 국가였다. 수도는 쿠스코이다.

잉카는 지금까지의 안데스문명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인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보다 그 때까지의 기술을 계승하여 발달시킨 부분이 많다.

예를 들면 결승 문자나 계단식 밭 경작이나 도로망 등은 와리(Wari)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그리고 장대한 석조건축기술은 티와나쿠(Tiwanaku)나 와리(Wari)의 금 주조술은 시칸(Sicán)에서 치무를 거쳐서 잉카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현재 쿠스코나 페루 남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정교한 계단식 밭은잉인카시대의 것이고 도로망도 잉카시대에 정비된 것이 많다.

 

 

프란시스코 피자로상

 

1532년 약간의 병력과 화기를 가진 스페인인 프란시스코 피자로(Francisco Pizarro、1470년~1541년)에 의하여 잉카제국은 침략을 받았는데 선주민들에 의하여 몇 번이나 저항하였으나 결국 완전히 정복되고 말았다. 이에 1만년 이상 이어온 몽고로이드 만으로 발달시켜온 안데스문명은 사라지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