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에 만들어진 불가사의한 석조유적
난 마도레(Nan Madore)의 수수께끼
포나페도와 <난 마도레>란 어떤 곳인가?
태평양 서부 미크로네시아 카로린제도 동부의 섬인 포나페(Ponape)도는 바른 이름은 폰페이(Pohnpei)도라 하는데 북위 7도 동경 158도에 위치하여 동서 37.6킬로미터 남북 19킬로미터 면적 334평방킬로미터(우리나라 완도 391.81 평방킬로미터 보다 약간 작다)인 화산도이다. 최고봉은 토톨롬(Totolom)봉으로 높이가 791미터이다. 현재 인구는 4만 7천명(2001년 통계)이다.
이 포나페(Ponape)도는 크고 작은 26개의 작은 섬으로 둘러싸인 화산도로서 별명은 돌로 만들어진 섬으로 알려졌다. 섬 둘레는 산호초로 둘려있다.
이 섬은 연중 강우량이 대단히 많기 때문에 섬 안에는 작은 시내가 많고 4개의 큰 폭포도 있다. 그리고 매우 많은 종류의 열대 식물이 무성하다. 그런 때문에 녹음과 꽃으로 아름다운 섬으로서 태평양의 화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섬에는 태평양 제도의 최대라고 하는 석조유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유적인 <난 마도레>는 포나페도의 남동부에 위치하는 테무엔(Temuen)도의 산호초에 있다. 그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해상유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로 세로가 1200미터, 600미터의 넓이로 70헥타르 정도의 산호초의 중앙에 현무암과 산호로 만들어진 크고 작은 92개의 인공 섬이 펼쳐지고 있다. 이 92개나 되는 인공 섬 위에는 각각 둘레에 정방형이거나 장방형의 벽이 둘러쳐져 있다.
곧 크고 작은 사각형의 성루 또는 울타리라고도 할 수 있는 현무암으로 된 인공 섬이 떠있는 것이다. 밖에서의 입구는 한 곳밖에 없고 인공 섬은 각각 수로로 연결된다.
포나페 사람들은 이 유적을 <난 마도레>라고 부른다.
<난 마도레>란 <신들과 인간들 사이에 펼쳐진 공간>이라는 의미가 있는 듯하다. 이는 엄청난 무한한 넓이를 나타내는 말인 듯하다.
<난 마도레> 섬은 어떻게 만들었는가?
92개의 인공 섬들은
먼저 수심이 매우 얕은 바다 바닥을 골라 수면에서 2미터 정도의 높이로 현무암으로 둘레를 둘렀다.
둘레를 친 그 안에 산호를 채워서 평탄하게 하였다. 큰 것은 100평방미터의 섬이 되었다.
옛날에는 이 평탄하게 만들어진 섬 위에 망그로브나 빵나무(麵麭木/면포목/breadfruit Tree)기둥으로 하고 야자나 판다나스(Pandanus)의 잎으로 지붕을 덮은 목조건물을 지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축을 쌓은 현무암 석재
특히 의식이나 왕의 주거 등의 중요한 섬은 산호를 채운 표면상에 다시 현무암 돌 기둥을 써서 수 미터나 되는 외벽을 쌓았다.
외벽은 하나가 10톤 정도나 되는 현무암의 가늘고 기다란 각주를 수 미터 간격으로 잘라낸 것을 교체하여 짜고 있다.
석재로 쌓은 외벽 축(사각형)
이 돌기둥 안에는 산호나 돌이 채워져서 그 규모는 큰 것으로는 높이가 수 미터에서 10미터 정도 폭은 3미터 정도이다. 재료인 현무암은 포나페도의 북부에 있는 섬 조카지(Jokaji)섬에서 운반된 것이라고 보인다. 포나페도는 화산도이기 때문에 용암으로 만들어진 현무암이 흔하다. 현무암은 쪼개면 5각형이나 6각형의 주상으로 쪼개지므로 이를 떼배에 매달아 운반하여 와서 짜낸 것이다. <난 마도레> 전체를 짜는 데 쓰인 각주의 수는 엄청난 수로 50만 개는 넘는다.
출입구
각 섬의 기능은 어떠했는가?
이 92개나 되는 인공 섬에는 왕의 주거, 의식의 섬, 성직자의 묘, 손님을 위한 시설, 사환이나 병사의 주거 등 각각 전문적인 역할 분담이 있었던 것 같다.
곧 92개의 섬들에는 각각 다른 목적이 주어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 이 섬들에는 많은 터부나 관습이 있었던 것 같다.
먼저 <난 마도레>에 들어가는 밖에서의 입구에는 거대한 돌담이 둘러져 있다.
이것은 바깥의 강한 풍파, 조류로부터 고을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말하자면 항구의 방파제와 같은 존재이다.
다음 그 안으로 들어가면 높이 8미터에 이르고 이중으로 된 외벽으로 둘러싸인 중요한 섬이 있다.
여기에는 역대의 왕의 묘가 있을 뿐 아니라 기도, 심판 등 중요한 의식이 행해진 곳이다. 그리고 긴급할 때에는 요새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 배후에는 성직자의 주거나 장례를 치르기 위한 섬, 다시 수비대가 상주한 것으로 보이는 섬이었다.
<난 마도레>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코코낫 오일이나 꽃 등으로 곱게 화장을 하고 유품과 함께 싸서 카누에 태워서 고인이 생전에 들렀던 섬들을 순회하고 최후에는 이 섬으로 돌아오는 장례 의식이 행해졌다고 한다.
한편 수비대가 주둔하는 섬에는 여성은 상륙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거기서 남서부로 향하면 다시 크고 작은 섬들이 좁은 간격을 두고 떠있다. 비교적 중요한 역할을 맡은 섬으로서는 왕족의 주거, 저장과 생산의 섬, 양식연못, 의료시설 등이 있다.
저장과 생산의 섬에는 주로 코코넛 오일을 정제하였다. 포나페도 안의 야자열매는 이 섬에 모여져서 야자열매의 껍질을 벗기고 등급을 가리고 분업체제로 오일을 생산하였다. 생산된 오일은 의식용이나 등화용으로서 <난 마도레> 안에 공급된다.
섬 안에는 여러 가지 양식연못이 있었다. 의식용 조개를 양식하는 연못에는 거북, 장어 등을 양식했었다고 생각되는 연못이 발견되고 있다. 조개를 양식하는 연못에는 바깥 대양과 연결하는 터널이 발견되고 있다. 거기로부터 신선한 해수를 공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료전용의 섬에서는 이 섬 전체의 병자들을 치료했었던 것 같다.
그밖에 주방전용의 섬에서는 식재인 수많은 고기와 조개류의 잔해가 나오고 있다. 또 감옥이나 형장인 섬, 묘지 전용의 섬, 큰 카누를 매어 두었던 선착장의 섬, 식료저장고인 섬까지 실로 많은 역할을 가진 섬들이 존재하였다. 마치 전문화된 기능을 가진 수상 도시이다.
물에 잠긴 모습
토대가 된 섬 자체는 해면에서 1.2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그래서 조수가 밀려오면 물에 잠기어 섬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때 마치 크고 작은 가까이에 있는 네모 모양의 현무암의 울타리만이 해상에 떠 있는 것처럼 이상한 경관을 이룬다. 마치 고대 거석 해상도시와 흡사하다.
이 문명이 절정기였던 무렵의 웅장한 경관이었을 것이다. 물의 도시 베니스처럼 사람들은 카누를 타고 이들 섬 사이를 왕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가?
그러면 이 불가사의한 수상 도시라고 해야 할 장대한 유적군을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만든 것일까?
누가 <난 만도레>를 만들었는가 하는 전승으로 마을마다 다른 전설이 있으나 대표적인 예를 믈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어느 날 올로시파(Ohlosihpa)와 올로소파(Ohlosohpa)라는 형제가 서쪽 섬 카타우 페이디(Katau Peidi)에서 카누를 타고 이 포나페에 왔다.
포나페에는 정치제도가 없다는 것을 안 형제는 정치와 신앙의 중심지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어느 곳에 세울까 하고 생각한 나머지 처음에는 소케스(Sokehs)에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전전 하다가 현재의 장소로 정하였다. 이곳을 <난 마도레>라 이름 붙였다.
조류가 세어서 어려움이 많았으나 신의 힘을 얻어서 건조를 계속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포나페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고 서로 협력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형인 올로시파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래서 아우인 올로소파가 왕이 되어서 포나페를 통치하였다. 이것이 사우델레우 왕조이다.
이 사우델레우(Saudeleur) 왕조는 16대나 이어졌다. 그런데 16대 왕인 사우뎀워이 Saudemwohi)시대에 포나페의 신 난 사페(Nahn Sapwe)가 유폐되자 이 악정을 안 난 사페의 아들 이소켈레켈(Isohkelekel)은 봉기하여 333명의 병사를 이끌고 <난 마도레>에 쳐들어와서 승리하고 사우델리우 왕조는 멸망하였다고 한다.
요한 쿠바리(Johann Kubari)의 연구
19세기 중엽 무렵 폴란드 박물학자 요한 쿠바리(Johann Kubari 1846~1896)가 이 유적 발굴에 흥미를 가지고 미친 듯이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랜 동안 열정적으로 연구를 쌓은 결과 한갓 해답을 얻은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난 마도레> 유적은 12세기경부터 15세기에 걸쳐서 서서히 건설된 것이라 한다. <난 마도레>가 그 번영의 절정기에 거기에는 꽤 강대한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왕조가 존재하였던 사실도 판명되었다. 그는 이 왕조는 포나페도에 전해오는 오랜 전설에서 사우델레우((Saudeleur)라는 왕조라고 추측한 것이다. 사우델레우 왕조는 16대 이어졌으나 최후의 왕 때에 악정으로 내란이 일어나서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쿠바리는 그 후에도 현지에 머물러서 연구를 계속하였는데 귀국할 때 조난당하여 피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오랫동안의 연구 기록을 모두 잃어버렸다. 간신히 몸은 살아났으나 넋을 잃은 사람이 되어서 나날을 보내다가 원인도 모르게 사망하고 말았다.
제임스 처치워드( James ChurchWard)의 무(Mu) 대륙설
한편 영국의 퇴역군인이었던 제임스 처치워드(James Churchward 1851~1936 육군대령)는 이 <난 마도레> 유적이야말로 잃어버린 무(Mu) 대륙의 성도 히라니푸라(Hiranipura)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무 대륙은 남태평양 상에 존재했다는 거대대륙인데 1만 3천년 옛날에 돌연 바다에 함몰하여 6400만의 사람과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때 무의 성도였던 히라니푸라는 고지였기 때문에 수몰의 해를 면하고 기타의 산 정상은 미크로네시아의 섬들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확실히 미크로네시아나 폴리네시아에는 거석에 의한 불가사의한 유적이 많다. 얍부(Yap)도의 거석 통화를 비롯하여 파라오제도의 수수께끼의 석주나 석상, 통가(Tonga)도의 40톤이나 되는 석문, 이스타(Easter)도의 약 천개나 되는 모아이로 상징되는 유적군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필적할 만한 위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거석 유적의 건설에는 고도의 기술력과 몇 만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강대한 권력이 없다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처치워드는 여기에 일찍이 연륙되었던 거대한 대륙이 존재했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튼 <난 마도레>는 그 규모, 정교함이 훌륭함에서 무제국의 고도의 문명을 상징하기에 알맞은 존재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근년 최신의 방사성탄소에 의한 연대측정의 결과 <난 마도레> 유적이 만들어진 연대는 13세기 전후라는 결과를 내고 있다. 이로써 제임스 처치워드의 무 대륙설은 취소되었다.
그 밖의 연구
그 후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난 마도레>는 도시로서의 기능은 없고 포나페의 백성은 여기에 살 수 있는 허가를 받지 못하였음이 밝혀졌다. 여기에 상주하고 있던 자는 왕족이나 귀족, 성직자 정도로 민중은 특정한 의식일에나 올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한다.
이리하여 오랜 동안 확장을 계속하여 온 <난 마도레>도 15세기경부터 차차 쇠퇴하여 대항해시대인 16세기가 끝날 무렵 스페인인에 의하여 발견되었을 때에는 이미 버려져서 폐허상태였다고 보고되고 있다.
남국의 붉은 석양을 받아 해상에 무수히 떠있는 <난 마도레>의 유적군은 아름다우면서도 한 편 애수를 자아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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