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이야기
클레오파트라의 묘지를 찾겠다고 나선 이집트 고유물 당국이 현재 조사 중인 지점에서 21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기대감을 고조시켰다.자히 하와스 이집트 고유물최고위원회 위원장은 19일 알렉산드리아 동쪽 약 50㎞ 지점인 타포시리스 마그나 신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라들과 클레오파트라의 이름 및 얼굴이 새겨진 동전, 가면 모양의 조각상 등이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을 공개했다.
(2009. 4. 21 조선일보에서)
클레오파트라상
1. 클레오파트라의 가계와 재능
클레오파트라(Cleopatra)는 기원전 69년 1월에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출산 즉후에 죽었다. 또 그녀에게는 한 사람의 언니(베레니케4세)와 한 사람의 여동생(아루시노에4세) 과 두 사람의 남자 동생(프톨레마이오스 13세, 14세)이 있었는데, 언니가 일찍이 요절하고 여동생은 후에 암살되었으며, 남동생 13세와 처음 결혼하고, 그가 죽자 다음 동생 14세와 결혼했다.
그녀가 속하는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가는 왕가의 피를 순결하게 지탱하기 위하여 근친 혼인을 계속해왔다. 그것은 알렉산더대왕이 이 땅을 정복하여 대왕의 후계자였던 장교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통치하여서부터 250년간 이어지는 관습이었다.
그녀의 일족은 토착 이집트인이 아니고 마게토니아의 피를 받은 그리스인이었다. 클레오파트라란 그리스어로 <아버지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가 플루타크에 의하면 미모는 결코 유가 없을 정도는 아니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할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그녀는 우아하고 온아한 말솜씨가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어 능력은 매우 뛰어나서 메디아어, 이티오피아어, 시리아어, 바루티아어, 아라비아어, 헤브라이어 등에 능통하고 이집트 지방 사투리마저도 능했다한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집안에서는 이집트어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한다.
2. 왕위 계승과 권력 투쟁
기원전 51년 클레오파트라가 18살 때에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어서 아버지의 유언과 관습에 따라 형제 중에 가장 연장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13살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고 공동으로 파라오가 되어서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었다.
여왕 기질인 클레오파트라는 왕위에 오르자 친정을 할 계획이었으나 정치를 보좌하는 3인의 섭정은 그들의 야심과 이익을 우선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저들의 마음대로 조종하려 하였다. 그러나 의지가 강한 클레오파트라가 방해가 되므로 그들의 음모에 의하여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동부 국경지대인 페르시온으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3. 로마 독재자 시저와의 만남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 사막의 비밀 장소에 숨어서 난을 피하였으나 3인의 섭정들은 그녀를 체포하여 없애려고 동방 사막지대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렇게 그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마침 로마에서 로마제국의 독재자 시저가 라이벌인 폼페이우스가 패하여 이집트로 도망하는 것을 추격하여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던 것이다. 시저가 알렉산드리아에 왔다는 것을 안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힘을 빌리기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그와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해상이나 육상이나 엄중히 군대로 봉쇄된 형편이라서 그와 접근할 수가 없었다.
기원전 48년 10월 중순 어느 날 저녁 프톨레마이오스 궁전에서 로마 제국 독재자인 시저와 클레오파트라는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것이야말로 기이한 방법으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시저에게 여왕으로부터의 전언을 올리겠다는 한 사람의 그리스인이 왕궁에 나타났다. 그 그리스인은 아포로도로스라 하는 사람으로 융단 말이 같은 것을 둘러매고 왔다. 이집트군이나 시저의 군대도 이 그리스 상인의 둘러맨 물건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시저가 하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아포로도로스는 주의 깊게 묶어 놓는 융단 묶음의 끈을 풀었다. 그러자 그 속에서 한 사람의 자그만 여자가 굴러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동화의 한 장면 같았다. 플루다크(Plutarch)에 의하면 여왕은 스스로를 이불보 안에 말게 하여 시저에게 선물로서 보내게 하였다고 한다.
그때 클레오파트라는 21세. 이제 곧 부서질 것 같은 화사하고 단정하게 올린 머리는 목에서 맺고 있었다. 시저로서는 위엄이 높은 여왕이라기보다 한 요정으로 비쳤을 것이다.
이제까지 보지 못한 젊고 예쁜 여자에 시저는 어리둥절하였다. 게다가 그녀의 말재주, 깊은 지성과 번쩍이는 위트에 53세인 로마의 독재자인 시저는 매료되고 말았다. 그리고서 밤이 되자 그 두 사람은 깊은 대화와 관능적인 쾌락을 마음껏 즐기게 되었다.
이 충격적인 만남도 클레오파트라로서는 매우 세밀한 계획으로 이루어졌다. 이때까지 그녀에게 살길이란 이 길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저에게 받아들여져서 그의 권력을 바탕으로 자신을 추방한 동생과 그 하수인들을 떼려 잡지 않으면 자신에게는 죽음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절체절명의 방법으로 여자의 무기를 효과적으로 쓰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독재자 시저의 마음을 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둘은 그리스어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밤새껏 대화를 나누고 만나는 바로 그날 맺어졌던 것이다.
한편 이튿날 아침 시저로부터 부름을 받은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13세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 시리아 사막 어디에 숨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누이가 어느새 궁전으로 되돌아와서 로마의 독재자와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닌가.
동생은 갑자기 간질을 일으켜 방을 뛰어 다니고 추태를 부리면서 도로까지 뛰쳐나가 백성들 앞에서 왕가의 문장을 찢어 지면을 치곤하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의 말을 지껄였다. 이처럼 흐트러진 국왕의 모습은 이윽고 이집트를 사랑하는 백성의 동정을 유발하여 그들이 폭도화하여 궁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때 시저가 나타나서 백성과 국왕을 달래어 소란을 재울 수 있었다.
그 후 시저는 두 사람이 화해하여 사이좋게 나라를 통치하기로 선언하게 하였다.
이런 무대 뒤에서는 은밀하게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섭정들이 시저와 클레오파트라를 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저가 이를 눈치 채고 즉시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궁궐 안에 연금하고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섭정의 한 사람인 환관 포테이노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정박하고 있는 이집트 함대를 출항시켜 로마군을 요격 하려 하였다. 시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함대에 방화하는 작전을 세워서 그 작전이 성공하여 이집트 함대는 한 척 남김없이 불에 타거나 침몰하고 말았다. 후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왕궁에서 추방되었는데, 남은 반란군을 이끌어 로마군과의 최후의 결전을 결행하였다. 그러나 추격당하여 나일강으로 쫓겨서 군대가 추락하여 거의 익사하거나 악어 밥이 되었다. 아직 소년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배를 타고 도망차려 하였으나 뒤 쫓아 오는 군중들이 배를 올라타는 바람에 배가 침몰하여 익사하고 말았다.
4. 클레오파트라의 전횡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죽자 그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다시 결혼하여 공동 통치를 하였으나 전제체제를 확보하여 클레오파트라의 적대 세력은 사라지고 클레오파트라는 사실상 이집트의 여왕이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시저의 뒷받침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시저는 알렉산드리아의 권력투쟁이 끝나자 휴가를 받아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100미터가 넘는 왕실용 배로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했다. 이 배는 기록에 따르면 물에 뜬 궁전이라 할 만큼 선상에는 정원이 있고 대식당이 있고 신전마저 있었다 한다.
이 여행은 시저로서는 이집트를 처음으로 여행하는 것이고 두 사람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신혼여행이었다. 마침 그 때 클레오파트라는 임신 6개월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마지막 선상 여행이 될 줄은 그들은 예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휴가가 끝나자 시저는 로마 총통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클레오파트라와 작별하고 이집트를 떠나야 하게 되었다. 소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둥지를 튼 폼페이우스의 잔당들을 소탕하고 로마로 개선하는 것이다. 그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란 말을 한 편지는 이때 알메니아의 폰토스에게 보낸 편지였다.
로마에 돌아간 시저의 개선식은 실로 장대한 것이었다. 그는 이제 3번째 독재관으로서의 취임이기도 하였다.
한편 클레오파트라는 시저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카에사리온을 키우면서 재회의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년 후 마침내 로마로부터 클레오파트라와 카에사리온을 빈객으로 로마로 맞아들인다는 통지가 온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고관들을 대동하고 로마로 들어가서 시저의 저택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야 클레오파트라와 시저는 행복의 절정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대 사건이 터진 것이다.시저의 독재에 공화정의 붕괴를 우려한 일부의 원로원 의원들에 의하여 시저는 암살되었다. 3월 15일이었다.클레오파트라의 야망은 시저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시저는 유언으로 로마제국의 후계자는 그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라 했다. 후계자는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에사리온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클레오파트라는 실의에 빠진 채로 서둘러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5.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만남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로 귀환하여 명목상의 공동 통치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독살하고 시저의 아들인 어린 카에사리온을 공동 통치자로 지명하여 프톨레마이오스 15세라 하였다.
시저가 죽은 후 로마는 시저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두 파로 나뉘어서 권력투쟁을 하게 되었다. 한편 두 사람은 협력하여 시저를 암살한 주모자들에 대한 복수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복수전은 안토니우스가 솔선하여 끝내 마케토니아에서 브루터스와 카시우스를 쳤다. 그 암살 주모자들은 자살하였다. 시저가 암살되어서 2년 반이 지난 때였다.
기원전 42년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공화파를 지지하였는데 삼두정치파가 득세하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호출하였다.
이전 시저 암살 주모자인 카시우스에게 재정적 원조를 한 사실에 대하여 밝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클레오파트라로서는 이것은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살아있을 때 추방된 아버지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찾아온 당시 기병 대장이었던 안토니우스의 뇌리에는 아직도 소녀였던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 신화의 사랑과 미와 성의 여신 아프로디테처럼 장식하고 많은 선물을 가지고 많은 동반자를 대동하여 약속된 소아시아의 다루소스로 향했다.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회식에 초대하였는데, 그보다 한 수 위인 클레오파트라는 거꾸로 자신에게로 오도록 이야기를 걸었다. 그날 밤 연회는 실로 호화롭고 취향이 의심스러웠다. 등불의 숲을 이루고 식탁 일면에는 장미꽃이 복사뼈가 묻힐 정도로 깔려있었다. 초대된 로마의 군인들은 한 결 같이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세련된 화술과 우아한 몸가짐 앞에서 차차 그녀에게 매료되어 그녀의 포로가 되어서 연회가 끝날 무렵에는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가기보다 오히려 알렉산드리아로 가야하게 되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세계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우아하고 호화찬란한 도시였다. 이 도시에는 세계의 모든 부가 모여들었다. 항구에는 세계 각지에서 많은 배가 드나들어 막대한 부가 육상으로 하역되고 있었다.아프리카로부터는 상아, 금, 향료, 그리스로부터는 양질의 올리브유, 포도주, 소아시아로부터는 곡물, 진기한 직물, 인도로부터는 장식품, 보석류가 화물의 거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항구에 몇 백 척이나 되는 상선이 드나드는 것을 고대의 불가시의라 하는 파로스섬의 등대가 길을 안내 하였던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이처럼 클레오파트라와의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41세인 안토니우스에게는 시저와 같이 그녀를 휩싸 안을 만한 머리가 없었던 것 같다. 시골 태생이고 기분파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안토니우스가 쉽게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굴복하고 마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런 일화가 남아있다. 나일강에서 낚시를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고기가 낚기지 않아서 조마조마한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잠수부로 하여금 물에 잠겨서 자신의 낚시에 고기가 물게 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곧 그것을 눈치 챘으나 모르는 척하고 그를 칭찬하였다. 단순한 안토니우스는 매우 기분 좋아했다. 다음 날도 낚시를 했는데 안토니우스에게는 흑해에서만 잡을 수 있는 종류의 고기만 올라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안토니우스에게 다시 잡힌 고기는 내장도 비늘도 없는 고기가 올라왔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시킨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다.
이 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안토니우스님. 그런 어획물은 그 지역 제후들에게 알맞은 것, 당신이 낚아 올리는어획물은 더 큰 것, 국가가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과연 재기 넘치는 클레오파트라의 유모어를 전하기에 걸맞은 일화라고 하겠다. 그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28세로서 안토니우스의 쌍둥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토니우스에게 로마로부터 그의 처 후루비아가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전했다는 뜻밖의 전갈이 온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말할 것도 없이 전쟁을 멈추게 하려고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후르비아가 자신을 업신여기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진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속셈이었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후루비아가 옥타비아누스에 패하여 도주하여 온 것을 심하게 책하였다고 한다. 그 후 로마로 향하는 도중 후루비아는 지금까지의 피로로 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
옥타비아누스는 라이벌이라고는 하지만 다시 안토니우스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으므로 화해를 청해 왔다. 그래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화해를 하기로 하였다. 이 때 화해의 표징으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를 새로운 아내로 맞아들인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결혼했다는 통지가 로마로부터 들어온 때 클레오파트라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화가 났을 것이 분명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도록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쌍둥이를 키우면서 원망하는 소리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그 마음을 애처롭게 생각하여 시리아까지 원정해 온 기회에 클레오파트라와 만나고 싶다는 사자를 보냈다. 명목은 시리아 원정에서 부족해진 식량, 물자의 원조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승리욕에 취한 나머지 과격해진 안토니우스는 파르치아 원정에서 큰 손해를 입어 궁지에 빠지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클레오파트라는 원군을 보내어 무사히 안토니우스를 구출해냈다.
이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에게 머리를 들 수 없어서 그녀와의 결혼을 승낙하고 <내가 죽으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장을 쓰고 다시 옥타비아누스의 누이하고는 이혼했다.
이것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에게 선전포고하는 구실이 되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의 권력 싸움은 절정에 이르러 언젠가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는데 그 기회가 온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누이와의 이혼 사실을 잘 이용하였다. 그것은 시저의 후계자인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선전했다. 실제로 이때까지 원로원 의원에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강했는데 거의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쏠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안토니우스는 로마제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 일은 클레오파트라로서는 크게 예상과 다른 상황이었을 것이다.
6. 악티움 해전 패배와 안토니우스의 자살
안토니우스가 옥비아누스의 누이와 이혼한 후 클레오파트라와 맺어져서 동방 전제군주의 입장에서 옥타비아누스에 도전하려 하였다. 마침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선전하고 이에 응전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사령부를 페로폰네소스 반도 연안의 파도라에 두고 함대를 안프라키아만에 집결시켰다
끌어 모은 병력은 10만의 보병, 2만 5천의 기병, 다시 800척의 함선이 안토니우스의 손안에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자신도 전용의 기함에 타고 다시 60척의 소함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군은 마게토니아 서남부에 있는 안프라키아만에 함대를 정박시키고 옥타비아누스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만은 악티움을 앞에 바라보는 좁은 해협이 깊숙이 펴진 장소로 대 함대를 수납하기에는 안성맞춤의 지형이었다. 다시 그리스서남부에는 전초기지가 설치되어 물자의 보급 루트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로마 유일의 명장 아그리파의 존재를 가볍게 보았다. 이 뛰어난 전략가는 기습공격으로 먼저 그리스남부를 점령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의 보급 루트를 끊고 바로 북상하여 삽시간에 악티움만에 정박한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포위하여 유폐시키고 말았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피난 장소가 퇴각할 수 없는 곳이 되고 만 것이다. 포위는 꽤 장기간에 미쳤다. 식량이 바닥나고 역병이 돌고 안토니우스 진용은 극도로 비참한 상태에 처하고 말았다. 군대의 사기는 떨어지고 탈주하는 병사가 발생했다. 당초 800척의 진용을 자랑하던 대 함대도 인원과 불자 부족 등으로 많은 선박을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장비가 좋은 230척을 빼고 모두 불을 질러버렸다.기원전 31년 9월 2일 안토니우스 함대를 선두로 클레오파트라 함대가 일렬이 되어서 악티움을 목표로 나아갔다. 그 앞의 이오니아해에서 아그리파의 대 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계획은 선두의 안토니우스 함대가 충돌하고 있는 틈을 노리고 클레오파트라 함대가 도주할 것으로 했다. 그녀의 함선에는 보화를 가득 싣고 있었다. 그 뒤를 안토니우스가 좇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함대는 도망치지 못하고 포위당하고 말았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목숨만을 건져서 도망치고 함대는 전멸하고 말았다. 후세에 말하기를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부하들을 버리고 그녀를 좇아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옥타비아누스의 선전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최후의 결전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결과는 탈주의 연속이었다. 바다에서는 이집트 함대가 로마 함대와 전투를 개시하기 직전에 모두 로마군에 항복했다, 안토니우스의 기병대도 항복하고 말았다.
안토니우스는 허둥지둥 궁전으로 도망쳐 왔으나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되는 날 클레오파트라는 지하의 묘실에 숨어서 안토니우스에게 <나는 죽었지만 슬퍼하지 마라> 하고 알리도록 했다. 아마도 안토니우스가 로마에 돌아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것을 곧이들은 안토니우스는 슬픈 나머지 자살을 결심하고 스스로의 칼을 빼고 배를 갈라 자살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자살이라는 말은 잘못 전해진 말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옮겨져서 그녀의 팔에 안기어 숨을 거두었다.
7. 클레오파트라의 자살
싸움은 끝났다. 옥타비아누스군은 모든 것을 포위하고 클레오파트라를 궁안에 연금시켰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개선할 때 클레오파트라를 백성들 앞에서 쇠사슬에 매인 채로 끌고 다니며 내보여서 자신의 힘을 드높여 보이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8월 12일이었다. 로마로 출발하기 3일전 그녀는 목욕을 하고 최후의 식사를 하였다. 그때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맛있을 것 같은 무화과 열매 밑에는 아스피스라는 작은 독사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스피스의 독은 편안하게 죽게 되는 독이다 그 효과를 노예를 시켜 실험을 마치고 있었다. 뱀은 이집트 사람에게는 성스러운 생물이었다. 이 자그만 성스러운 독사의 독으로 파란만장의 39세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수문장이 눈치를 채고 달려갔을 때 그녀는 황금 침대에 여왕의 의상으로 보석을 몸에 달고 죽어있었다. 시녀가 황금의 머리 장식을 죽은 여왕의 목에 감으려 하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죽어서 2천년이 되었으나 지금도 그녀의 매력은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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