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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월요단상

할머니의 시간

간천(澗泉) naganchun 2013. 8. 12. 06:40

 

할머니의 시간

 

 

 

아이들과 공감하려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야 한다는 캣취 프레이즈를 내건 어린이대상 교육프로그램 관련 사업체가 있다. 그 회사의 광고를 보면 다정한 선생님이 아이들을 만나면 아이들의 눈높이와 같아지기 위해 무릎을 굽히고 아이들의 키 높이와 같도록 자신의 키를 낮춘다. 그리곤 아이들의 눈을 평행으로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훈화를 하거나 칭찬을 하거나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도 위를 올려다보거나 하지 않아도 되고 자연스레 편안하게 공감하는 시간이 빨라지게 될 것이다. 즉 동등한 입장에서 상대방을 대한다는 인간관계의 진리를 그 밑바탕에 까는 이야기인 것이다.

 

랜 동안 할머니는 중풍으로 자리에 누워계셨다. 할머니의 눈높이는 어린이들의 눈높이보다 더욱 낮은 세상이다.

왼쪽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지만 다른 한쪽 팔과 다리로 집안 이곳 저곳을 몸을 질질 끌면서 옮겨 다니고 그러면서 운동도 하고 일어나 앉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지낸다. 천장을 보고 눕지 않고 항상 옆으로 새우처럼 두 발과 두 손을 조아리고 있다. 어떨 때는 참으로 귀엽다. 원래 작은 몸집이지만 아프고 나서 부터는 더욱 작아진 몸이 만화영화에 나오는 ‘스푼요정 호호아줌마’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착하고 고분고분하고 성깔을 부리지 않을 때다.

 

워낙도 성질이 불같은 분이었지만 요즘은 가끔 성난 사자처럼 으르렁 거린다. 당신의 대소변을 가리고 온갖 수발을 드는 가족들에 대한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구년 가까이 그런 환자를 모시는 가족들은 성가시다. 할머니는 당신의 그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에게 당신의 조그마한 권리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우성이다. 약간의 쾌적함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당신 뜻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가족들을 들들 볶으면서 당신의 그 자그마한 한 뼘 어치의 쾌적함을 성취해낸다. 그러니 가족들은 성가실 수밖에 없다.

 

할머니는 당신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 말고, 아무리 몸이 아프고 힘든 상황이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자기를 일으켜 달라(일으켜주면 금방 드러누우면서도), 밥을 가져와라, 밥을 먹여라, 조금씩 천천히 먹여라, 기저귀를 채울 때면 '좀 서두르지 말고 성의 있게 해라', 기저귀를 갈아 달라, 물을 가져와라, 옷을 입혀라, 방문을 열어라, 불을 꺼라, 너희들만 먹지 말고 가져와라 등등 그 요구사항은 수도 없이 다양하다. 즉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들 정상인들이 스스로 해결하는 일들, 무엇 무엇인지 아이템을 들먹일 수 없을 정도로 그저 당연시 해 온 여러 가지 일들을 일일이 타인의 손을 빌어 해결 하려는데도 전혀 미안해 하지 않고 당당하다. 아니 너무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다. 그때 더 잘 돌봐드리지 못함에 마음에 걸린다. 주변을 부릴 줄 아는 힘이 진정한 능력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할머닌 진정한 능력자였던 것 같다.

 

그 할머니가 보고 싶다. <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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