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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후사에 대한 일본의 우리와 다른 인식

간천(澗泉) naganchun 2018. 11. 18. 07:48

전쟁 전후사에 대한 일본의 우리와 다른 인식

-일본 드라마 분석을 통한 일본의 속내?-



과오를 인정하고 수긍하고 그래서 다시 거듭나는 일은 정말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대인배여야 가능한 일인가, 담대한 사람만이 가능한 일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내려놓는 무소유의 사람이어야 가능한 것일까, 진정 무서움을 아는 사람이어야 할까.


인간에 대한 사랑, 연민을 아는 마음이어야 할 것 같다.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어야 할 것 같다.


전쟁이라는 엄청난 재난적 사건에 휩쓸리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불운을 겪는 일 앞에서, 상처 입은 나의 인생은 내 가족과 우리의 삶은 누가 보상해 주는가라고 묻게 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이렇게 고통스러운 체험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생각을 할 것이다.

가령 그 누구도 어느 기관도 그 무엇도 미안 해 하지 않게 되면 끝나지 않을 일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 새롭게 거듭나는 것도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아픔을 털고 일어나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다시 자신들의 삶을 일구어 나가려면, 아니 개인을 초월하여 나라나 민족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 것을 우리는 전쟁사를 통해 배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많이 배운다.


독일은 전쟁으로 해를 입힌 일에 대한 막대한 사죄를 꾸준히 하는 나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거듭 거듭 과오를 인식해서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 일을 저지른 자기네 나라의 거대한 악에 대해서 그릇됨에 대해서 양심을 가지고 호소하려고 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얼론 인 베를린(Alone in Berlin)'이라는 영화를 보면,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베를린을 배경으로 한 노동자 부부가 나치 체제에 저항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나치 체제에 저항하는 내용의 사제 엽서 200여장을 베를린 곳곳의 우편함이나 계단 등에 남겨놓는 방법으로 나치 체제에 저항했다. 베를린 시민들이 도처에서 진실을 알 수 있게 하려고 목숨을 건 저항을 한 것이다. 이후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943년 4월 플로첸제 교도소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작전명 발키리 (Valkyrie)’ . 강직한 성품의 클라우스 폰 슈타펜버그 대령은 조국과 국민을 위하는 충성스런 장교이지만 히틀러가 독일과 유럽을 파멸시키기 전에 누군가 그를 막을 방법을 찾아내기를 희망한다. 북 아프리카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슈타펜버그 대령은 독일 사령부로 발령을 받으면서 권력 최상위층까지 숨어 있는 비밀 저항세력에 가담,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최근 요 몇 년 동안에 제작되고 방영된 일본의 드라마를 보면,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저항을 그린 내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전쟁에 대한 사고방식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예라고 생각해서 개인적으로 조금 살펴보았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서(In This Corner of the World, この世界の片隅に)’ 라는 드라마.

히로시마 인근에 사는 가족들의 전쟁 당시의 삶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집들의 아들들은 전쟁터로 나간다.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고 오라고 응원가를 부른다. 납골상자가 보내져온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어머니는 상자를 열어본다. 그 안에는 작은 돌멩이가 들어있다. 왜? 전쟁터에서 누구의 뼈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돌이라도 넣어서 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미국이 퍼부어대는 공습으로 인해서 폭탄이 터져서 팔을 잃은 사람들의 일상, 아이를 잃은 가족, 먹을 것을 배급받는 광경, 공습에 대비해서 불을 끄기 위한 훈련장면.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은 패망을 하자 천황의 방송을 전 국민이 라디오를 통해 듣게 한다. 각 지역마다 반상회같은 것이 있어서, 라디오가 있는 집에 모여서 들으라는 지시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무릎을 끊고 나란히 가지런히 앉아서 듣는다. 전쟁에 졌다고 하니 ‘구야시이’라고 억울해 한다.



전쟁에서 전후 직후 복구시대를 그린 ‘우메짱선생((梅ちゃん先生))’ 이라는 연속드라마. 공습에 대비해서 소등을 하고 창문에 창호지를 엑스자로 붙이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소중하게 간직하던 옷가지나 귀중품들을 내다가 물물교환을 하는 등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가족들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황야(だから荒野)’라는 드라마에서는、나가사끼 원폭 피해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할아버지는 슬프고도 화난 듯한 얼굴표정을 하고 있다. 원폭피해를 후세에게 알리기 위해 만든 역사전시장에서 구두로 설명을 하는 자원봉사를 한다. 학생들이 견학을 오지만 전시 내용에 별 관심없이 훅 지나치고 견학은 끝난다. 매일 나와서 관람객이 오든 오지 않든 간에 묵묵히 자원봉사자 대기 의자를 지킨다. 어쩌다가 관람객이 사진을 보면서 궁금해 하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끼어들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 관람객은 많지 않다. 이 할아버지의 설명은 매우 자세하고 길다.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어라고, 역사적 배경을 곁들여 역사 강의를 한다.



‘도쿄대공습(東京大空襲)’이라는 드라마. 몇 차례에 걸친 동경 대공습으로 피난할 방향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시민들. 다리위의 혼잡으로 살아보려고 강으로 뛰어내리지만 죽어가는 사람들, 불바다가 된 동경의 시가지.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피난 장면 등 대공습 이후 일본인들이 겪어야 했던 참상을 다루고 있다.



이런 모습을 그린 드라마를 보면서 어찌 슬픈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고통 앞에서 마음 아파하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나 너무 그런 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은 일본이 전쟁을 자초했기 때문이라는 생각 보다는

남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이런 고통을 겪었음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는 듯 여겨진다. 미국 때문에 우리가 이런 불행을 겪었으니, 자꾸 우리 (일본이라는 날)보고 전쟁 책임지고 사죄하라고 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 여겨진다.


우리 국민들은 너무도 가련하고 죄가 없는데, 그렇게 착한 국민들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외부 세계를 탓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 시기를 회상하며 만든 영화, 드라마를 통해서 느끼는 점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연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자신들이 치룬 전쟁에 대해서 굉장히 연민을 가지고 감상적으로 대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들의 소중한 가족, 자신들의 소중한 일상, 자신들의 일터, 자신들의 친구, 자신들의 먹을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미국’이라고 그린다. 자꾸만 그런 아름답고 따스한 것을 미국으로 인하여 빼앗기고 있다고 말하려 하는 것 같다.


둘째, 전쟁을 아름답게만 그리려 하는 느낌이 든다. 일본은 아직도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회고는 하지만, 진정한 뉘우침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은 그들로 인해 고통을 겪은 수백 배의 다른 아픔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전쟁 당시, 전쟁 전후에 일본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아왔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나라차원에서의 ‘미안해’함과 잘못에 대한 인식을 공표하는 일이 아닐까.


은근슬쩍 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진정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세부적인 항목에서도 세계인들이 이목을 집중시켜서 마음 깊이 들어가 인본주의에 입각해서 공감을 하게 될 것이다.



셋째, 그들은 자신의 나라 윗선이 결정한 욕심에 희생양이 된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그릇된 일이라고 저항의 몸짓이 약하다.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나라 밖 외부 세력에서 찾으려 한다.


고통을 겪고 살아 온 그 세월과 삶에 공감을 하면서도, 남의 탓을 하는 마음이 도처에 끈적 끈적하게 남아 있는 느낌이어서 아쉽다. 자신들의 연민에 대한 뒤끝을 빨리 청산했으면 좋겠다. 매직블록이나 뭐 스티커 제거제 같은 것으로 ‘그 끈적거림을 제거할 수는 없을까.



넷째,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진정어린 사과를 받고 싶어한다. ‘자꾸 일본은 왜 그럴까?’ ‘자신들의 잘못을 왜 모르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는 속 시원하지 못하다.


일본인들의 기질과 생활에 대한 심리학적, 프로 파일러적 분석을 심도깊게 하다보면 우리가 듣고 싶은 답을 좀 더 잘 이끌어낼 수 있도록 되지 않을까. 타인을 대하는 대응방법에 조금 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와 같은 사회문화적 상황 이면에 ‘그 무엇’을 콘텐츠에 담아서 전파하려 하는지에 대해서 분석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일관계는 정말로 민감한 사항이다.


** 이 글은 어디까지나 아주 개인적인 느낌이다.

그저 무심하게 일드를 즐기고만 있었는데, 그렇게만 봐서는 안되는 것이구나 하는 ‘뿅!’하고 뇌리를 스치는 시청소감이 생겼다.

그래서 몇 몇 드라마를 비교해 보고 아주 아주 개인적인 소견을 쓴 것임을  주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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