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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앙코르 와트(Angkor Wat)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09. 12. 12. 06:08

앙코르 와트(Angkor Wat) 이야기

 

 

 

대강의 역사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 유적군의 대표적인 사원 건축물이다. 앙코르(Angkor)는 왕도를 말하고 와트(Wat)는 사원을 의미한다. 대가람과 아름다운 조각으로 크메르 건축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12세기 전반에 앙코르왕조의 수르야바르만(Suryavarman) 2세에 의하여 힌두사원으로서 30여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1431년경 앙코르를 버리고 프논펜으로 왕도를 옮긴 후 한 때 잊어버렸다가 1546년 안첸 1세에 의하여 제일회랑 북변에 조각을 새로 하고 그 후 손자 때에 불교사원으로 개수하여 불상을 안치하였다.

1860년 사원을 찾은 프랑스 박물학자 앙리 무오(Henri Mouhot 1826-1861)에 의하여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전경

 

앙코르 와트의 건설

 

오늘 날 앙코르와트의 유적은 조사에 의하여 그 전모가 밝혀지고 있다. 이 세계 최대의 석조사원이 건설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900여 년 전인 12세기 중엽이라고 생각된다. 그 당시 이 땅을 지배하고 있던 자는 고대 크메루(Khmer)왕국(앙코르왕조)이라는 강대한 제국이었다.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서 이 왕조는 최성기를 맞아 타이 동북부에서 라오스, 베트남의 남쪽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거의 인도지나반도 전역을 지배하에 두고, 거대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크메르왕국의 이름은 인도지나 전역에 알려지고 그 위광은 동남아시아 구석구석까지 울렁거렸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조공한 국왕의 수는 120이 넘고 500만의 군대를 가졌고 왕의 재보을 벌려놓으면 수리의 기리가 될 정도로 엄청난 국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최성기에 즉위한 수르야바르만(Suryavarman) 2세는 1113년에 즉위하자 거대석조사원 앙코르와트의 건조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30년이라는 세월과 막대한 인원을 동원하고 인해전술로 완성시켰다고 한다.

수르야바르만 2세(태양왕이라는 뜻)는 역대 왕 중에도 최강의 왕이라고 알려지고 그 절대적인 권력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려고 이 거대석조사원을 건설한 것이라 한다.

그는 앙코르와트 건설과 병행하여 자신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웃나라인 참파(Cham Pa)나 베트남을 침략하기를 반복하고 약탈과 파괴를 마음껏 행하였다.

그런데 그가 죽자 그 반동으로 국내는 혼란해져서 국력은 약해지고 거꾸로 참파(Cham pa)군의 반격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앙코르의 도시는 점령당하고 패한 캄보디아군은 지리멸렬해져 버렸다.

그러나 수년 후 앙코르 탈환의 기회를 잡은 쟈야바르만(Jayavarman) 7세는 거병하여 다시 참파군을 쳐서 앙코르를 탈환하였다. 그 후 쟈야바루만 7세는 파괴된 앙코르를 수복하고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루어놓은 것이 왕도 앙코르 돔(Angkor Tom/큰 왕도)이다.

 

앙코르 와트의 규모

 

앙코르와트는 거대석조사원으로 그 규모는 신전으로서는 세계 최대이다. 중앙부에는 65미터나 되는 거대한 탑이 솟아 있고 그 주위를 대각선상에 4개의 탑이 서 있다.

다시 그들 사원 본체의 주위를 회랑이 3중으로 둘러 있고 가장 바깥을 해자가 둘러있다. 해자는 190미터나 되고 동서 1500미터, 남북 1300미터의 장방형이다. 게다가 사방의 축선에 따라 한 치의 틀어짐도 없이 정확하게 만들어졌다.  

앙코르에는 주요한 유적이 60개 정도가 있어서 모든 유적은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대하여 정면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앙코르 와트뿐이다.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 이유에 대하여 가지가지의 이론이 있는데, 오늘 날에는 앙코르 와트는 사원이기도 하지만 왕의 사후에는 분묘로서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쪽을 향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곧 서쪽이라는 방위는 사후의 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앙코르 와트가 능묘였다는 생각은 상상의 경지를 벗지 못한다.

앙코르 와트를 건설함에 있어서는 마을 사람들을 부역에 동원하고 전쟁 포로를 중심으로 10만 명 정도의 사람이 동원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되고 있다.

그 내역은 석공 3만 명, 운반인 1만 5천명, 목공 5천명, 불사조공 등이 5천명 기타 식료나 생활필수품 등을 조달하는 수 만 명이다.

그들은 현장 부근에 마을을 이루고 완성되기까지 몇 십 년이나 작열하는 태양 밑에서 땀과 먼지투성이 속에서 일했던 것이다.

이처럼 앙코르 와트 급의 사원을 건설하는 데에는 천문학적인 인원과 방대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국가적 대사업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크메르왕조는 절대적인 국력과 권력을 갖추어 있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크메르왕조는 그 후에도 실력 있는 왕이 차례로 등장했기 때문에 찬란히 빛나는 황금시대가 유지되었었다. 그 결과 앙코르 유적군이라고 일컬어지는 대소 1천 3백 개나 되는 석조건축불이 세워졌던 것이다.

이 고대 크메르인의 역량, 인내력, 지능, 권력이 집약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크메르왕국은 그 고도의 예술양식만이 아니라 근린 제국에 끼친 영향력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시대가 동남아시아의 그리스라고 칭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메르 미술의 집대성

 

앙코르와트는 크메르 미술의 집대성이라고 일컬어진다. 5기의 탑 주위를 3중의 회랑이 들러있는데, 가장 바깥 회랑은 일주하는 데에 760미터나 된다. 게디가 그 장대한 벽면에는 섬세한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그 테마는 천지창조가 주체인데, 신들과 아수라(阿修羅)와의 싸움, 천국과 지옥, 동물을 탄 신들의 행렬, 가지가지의 전투 장면 등이 그려져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차원의 세계로 유인해버리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상을 주는 공간이라 하겠다.

 

회랑

 

이 회랑을 한 번 돌면 천지창조로부터 몇 번이나 전쟁을 겪어서 운명의 허무함 까지 설명하는 장대한 서사시를 읽을 수가 있다.

회랑의 동쪽 입구에 있는 벽면에는 천지창조를 주제로 하는 웅장한 부조가 약 50미터나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대해를 흔들어 섞어서 용출하는 불사의 영액(靈液)을 손에 넣기 위하여 88명의 아수라와 85명의 신들이 대 만다라산을 회전시킨다는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그 장려한 유적들, 매혹적인 조각류,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섬세한 신전은 천년이 지난 오늘 날도 보는 자로 하여금 경이와 외경의 마음을 안게 한다.

아수라와 신들은 각각 대사(大蛇)를 그물을 대신하여 안고 그것을 잡아 댕김으로써 만다라산을 빙글빙글 돌려서 대해를 젓는다. 이 그물 댕기기를 지시하는 것은 비슈느신이다. 그 젓는 작업은 천년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어서 바다 속의 물고기나 악어들은 도망치기 바쁘고 이윽고 대해는 우유 바다로 변한다. 그리고 이미 불사의 영액이 물밑에서 용출하여 그것을 취한 비슈느신에게 의하여 하늘 높이 들어 올려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세계가 시작됨을 알린다.

 

여신상 조각

 

다시 서사시는 계속된다. 북쪽 벽면에는 20이 넘는 신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쌍두마차를 타고 배후에 커다란 일륜(日輪)을 단 태양신 수리야, 그 위에는 달의 신 찬드라, 다시 공작, 코끼리, 무소, 사자 등을 탄 8체의 불가사의한 신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이것들은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방위 신들인가. 일설에는 이 신들은 혹성의 움직임을 상징하고 있다고도 한다.

서쪽 벽면으로 옮기면 여기는 양 친족이 골육상쟁의 전투 장면이 펼쳐진다. 거기에는 씩씩한 행진이나 군마나 코끼리에 탄 병사들이 그려져 있다. 양군은 벽면 중앙 부분에서 격돌하여 양군의 격투전이 전개된다. 활을 당기는 자, 창을 휘두르는 자, 화살에 찔리어 죽어가는 자 등 치열한 전투가 이어진다.

남쪽 벽면에는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이다. 사자가 천국과 지옥으로 선별되는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진 자는 생전의 죄에 따라 염라대왕 앞에서 끌러나가 거기서 태장을 맞고 혀가 뽑히는 등 가지가지의 죄 값을 치르는 고통을 당한다. 부조에는 화형 당한 남자, 아수라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 책형(磔刑) 당한 남녀 등이 그려져있다.

 

 

벽면조각

 

앙코르와트 회랑 벽면에는 힌두교의 우주관과 신들의 유구한 시간이 응축되어 그려져 있다. 회랑을 한 바퀴 돌면 우주 창조로부터 분열, 카오스, 지옥, 소멸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흐름을 한 눈으로 불수가 있다. 그것은 거의 영원한 시간을 한 순간으로 의사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창조의 신 비슈느가 깨어있는 동안이 우주가 존재하고 있는 시간이고, 잠이 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튿날 비슈느가 다시 깨면 우주는 다시 재생된다. 이처럼 무한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의 흐름을 반복하는 것은 힌두교의 우주관이기도 하고 앙코르와트는 그것을 시각화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크메르왕국의 쇠퇴와 망각 속의 사원

 

그토록 강대하고 번영했던 크메르왕조도 왕가의 내분 등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5세기에 들어서 동쪽의 아유다야왕조가 점차 강대해져서 크메르왕조를 위협하게 되었다. 크메르왕은 증대하는 샴의 위협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앙코르를 버리고 남쪽으로 천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사태가 급박했다.

그 후에도 샴과 베트남 쌍방에서 침공을 받은 캄보디아는 국내의 혼란으로부터 다시 일어설 수가 없는 사이에 앙코르의 유적군은 밀림 속에 버려둔 채로 앙코르와트를 비롯하여 크메르의 영화를 기록한 위대한 유적들은 5백년간이나 망각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전적으로 앙코르의 유적이 사람들에게서 잊어버렸던 것은 아니었다.

포루투칼인, 이스파냐인, 중국인 내항자들이 밀림 속에 묻힌 앙코르 유적 소문을 듣고 방문하는 일은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캄보디아인 자신도 우연히 방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것은 16세기 중엽의 일이다. 캄보디아의 어떤 왕이 밀림 깊숙이 코끼리 사냥을 하던 때였다. 신하들이 밀림을 헤쳐 나가다가 장려한 대건축물의 일군을 만난 것이다. 그들은 이 유적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수목이 너무나 무성했기 때문에 단념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들 건축물이 조상이 건설한 수도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한 그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런데 당시 유럽 사람은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유적을 건설한 참 왕은 누구일까 하고 여러 가지로 조사를 한 모양이다. 그 결과 기원전 동방원정에 나선 알렉산더라는 설과, 로마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도라야누스제 (5현제의 한 사람)가 또 하나의 대제국의 수도로서 건설한 것이라는 설, 그 중에는 이것이야말로 고대의 아트란티스의 수도의 잔영이라고 하는 설까지 나와서 논쟁의 불이 붙게 되었다.

1632년에는 일본인 모리모토유콘다유(森本右近太夫)가 이곳을 찾은 바 있고, 1712년 무렵에는 도쿠가와막부의 명을 받고 시마노겐료(島野兼了)가 가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지도를 그려왔는데 불교의 대성지 기원정사라 잘못 알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영화를 극한 절대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던 장소가 그 후 멸망하여 밀림 깊은 속에서 썩어 불교의 대성지라고 잘못 생각하게 된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왜냐 하면 이 세상 만물은 항상 변하여 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지는 근본적인 2대 본능인 창조와 파괴는 이러한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끝--

* 이미지 출처-Wikipedi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