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에 묻혀버린 고대도시 이야기
타크라마칸 사막이란
3세기의 타크라마칸 사막(재구성도)
<타크라마칸(塔克拉瑪干/Taklamakan)> 사막은 중앙아시아인 중국의 신강(新疆) 위글자치구에 있는 사막으로서 어원은 위글어의 <닷키리(塔克拉/죽음)>와 <마칸(瑪干/무한)>의 합성어라 한다. 곧 <죽음의 장소> <죽음의 세계>라는 뉘앙스를 지닌다.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막>이라는 의미가 있다. 동서 1200킬로 남북은 넓은 곳에서 500킬로 그 면적은 실로 52만 평방 킬로나 되어 <사하라>사막 다음 가는 세계 2위의 면적을 가진 사막이다.
북쪽으로 천산산맥 남쪽으로 곤륜산맥 등 6~7천 미터의 대산맥에 끼어 있어서 매우 건조하고 강수량은 연간 수 밀리 정도이다.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이 땅을 여행하고서 <이 사막은 엄청나게 넓다. 횡단하는 데에 1년은 걸릴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래뿐 먹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최저 1개월분의 식량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묘사했다. 그런데 <타크라마칸> 사막은 낮 최고 기온은 섭씨 50 도 이상이고, 최저 기온은 영하 10도까지 내려간다. 게다가 이 작열지옥이라고 할 수 있는 환경에 더해서 거친 모래바람이 불어대어서 생물은 전혀 근접할 수없는 죽음의 세계이다.
늙은 낙타만이 모래바람이 불 것이라는 것을 예지할 수가 있다. 모래바람이 불 것이라는 것을 알면 낙타는 울고 그 입과 코를 모래 속으로 묻는다. 이윽고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바람은 맹렬한 모래먼지 바람이 되어서 풍속 25 미터 이상이 되기도 한다. 바늘 같이 뾰족한 돌이 덮치는 것이다. 모래먼지 바람은 순간 지나가지만 만일 이 때에 코나 입을 막을 것이 없다면 반드시 쓰러진다. 물론 목숨이 위험하다고 여행자에게 충고한다.
사람들은 이 사막을 <죽음의 바다>라 칭하고 <일단 발을 밟으면 다시 돌아오지는 못하는 곳이다.> 고 말하여 가까이 하기조차 무서워하는 것이다.
5 세기 초 불전을 구하기 위하여 인도로 여행한 법현(法顯 ?399~414 중국 동진의 승려) 스님은 타크라마칸 사막의 모습을 <하늘을 나는 새 없고 땅을 달리는 짐승도 없다. 보이는 것은 아득히 모래의 바다이다. 표지로 의지하는 것은 단지 죽은 자의 마른 뼈뿐이다.>라고 기록할 정도이다.
장안에서 중앙아시아를 건너서 페르샤로 향하는 실크로드도 <타크라마칸> 사막 바로 앞에서 북로와 남로로 나뉘어 이 죽음의 바다를 피하려 한다.
모래에 묻힌 도시 누란과 미란의 발견과 조사
20 세기 초에 이 사막에서 번영을 자랑했던 것으로 보이는 고대 왕국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성곽 등의 오아시스 도시국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폐허가 차례차례로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 유적에서는 동서 문화의 교류를 나타내는 향기 높은 미술품이 출토되었다.
불교유적
모래에 묻힌 이들 오아시스는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Sven Hedin 1865-1952)>의 스벤대와 영국의 <오렐 스테인(Aurel Stein, 1862-1943)>의 스테인대가 우연히도 거의 같은 시기에 이 땅을 탐험하여 <누란(楼蘭/Loulan)>, <미란(米蘭/Miran)>을 비롯한 많은 유적을 발견하여 발굴하게 되었다.
특히 수수께끼의 도시, <누란(Loulan)> 유적의 발견은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어느 현지인이 잊어버리고 두고 온 삽을 가지러 되돌아갔는데 모래 속에서 아름다운 나무에 조각이 된 판을 발견하고 가지고 온 것이 계기였다.
다음에 스벤대가 그 장소를 발굴해보니 다시 수많은 문서, 고전, 도기, 나무에 조각된 판 등이 발견되고, 다시 환상의 오아시스국가의 존재를 밑받침하는 고성의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그 고성은 1변이 300미터 정도의 거의 정방형으로 성벽은 황토를 쌓아서 구축되었었다. 성벽의 중앙에는 높이 10미터 남짓한 불탑이 솟아있고 불탑 주위에는 고급 목조 건물이나 대문의 자취가 발견되었다. 고성 가까이는 오랜 수도나 마른 과수원 자취가 있었다.
그 환상의 도시 <누란(Louran)>은 지금부터 2천 년 전 옛날 광대한 <타크라마칸> 사막 동부에 위치하여 동서교통의 요충으로서 번영했었다.
그 최성기에는 1만 5천의 인구가 있었고, 동서 9백 킬로에 미치는 국토를 가지고 있었다.
천불동
사막의 입구라 할 수 있는 곳은 오아시스도시 돈황(敦煌)이 있고 거기서 사막을 16일 정도 걸려서 6백 킬로나 들어가면 최초의 오아시스인 여기 <누란(Loulan)>에 이른다.
사람들은 여기서 종종 여행의 피로를 풀고 혹은 긴 여행을 위하여 기운을 길렀을 것으로 상상된다.
다시 누란에서 남서로 사막을 170킬로 나아가면 <미란(米蘭/Miran)>이다. 이 불교도시는 큰 도시이고 거기는 훌륭한 불탑이 있었다. 이 불탑은 두꺼운 벽돌로 굳혀진 성벽 안에 있어서 거기서 출토한 물품은 동서가 융합한 아름다운 것이었다.
스테인은 <미란>에서 14개의 불탑과 1개의 성채 유적을 발견하였다. 특히 이 제3불탑은 스테인이 그리스의 사랑의 신 에로스를 생각하게 한 <유익천사상(有翼天使像)>의 벽화를 발견한 곳이다. 그 때의 충격을 스테인은 이렇게 적고 있다.
유익천사상
<바닥에서 1.2 미터 정도 팠을 때 날개가 있는 천사를 섬세하게 그린 벽면이 나타났다.--아시아 내륙 오지에 있는 <로브 놀>의 황량한 호숫가에서 이러한 그리스 로마풍의 케루빔(Cherubim=천사의 등급 2위)을 보게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이 <유익천자상>은 두드러진 눈, 오뚝한 코, 붉은 입술 등이 그리스 조각을 연상하게 되고 머리에 깎다가 한 점 남긴 머리카락은 동양적이라 하겠다. 이로써 일찍이 미란이 동서 문화의 교류로 크게 번영하였었음을 말해준다.
봉화대
실크로드의 도시들
이들 스벤대와 스테인대의 발굴과 그 후의 조사에 의하여 일찍이 페르샤를 경유하여 로마로 향했던 전장 7천 킬로라는 고대 실크로드의 전모가 밝혀졌다.
그에 의하면 장안을 출발한 동쪽 로드는 <타림(Tarim)>분지에 들어서 최초의 오아시스 돈황으로 들어간다. 여기는 서쪽으로의 현관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단히 번화한 시장이 매일 열리는 곳이었다. 돈황을 나서면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사막의 북쪽을 가는 코스와 사막의 남쪽을 가는 코스이다.
북쪽 코스를 가면 먼지 누란에 도착하고 거기서 천산산맥을 따라서 <구챠(亀玆/Kuqa)>, <가슈가르(喀什/Kashgar)>라는 오아시스를 경유한다. 한편 남쪽 코스를 가면 <미란(米蘭/Miran)>, <니야(民豊/Niya)>, <코탄(于闐/Khotan)>이라는 오아시스를 경유하게 된다.
그들 도시에서는 실크로드를 통해서 동서의 진귀한 물품이 거래되었다. 예를 들면 천산산맥 기슭에 있는 <구챠(亀玆/Kuqa)>에서는 양질의 철과 아몬드가 생산되었다. 그런 때문인지 밤이 되면 이 산에서 채취한 철을 달구는 화광이 있고 주간에는 연기가 끊임없이 보였던 것 같다.
<코탄(Khotan)>에서는 옥이 생산되었다. 옥이란 비취나 아름다운 돌을 말하는 것으로 진주와 함께 매우 진중시하였다. 코탄 지방은 곤륜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품질이 좋은 옥이 많이 채취되었던 것이다.
<니야(Niya)>는 낙타의 산지로 알려져 있다. <사마르칸트(Samarkant)>에서는 수정, 보석 종류, 페르시아는 복숭아나무가 특산품으로 생산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실크를 수출하여 이들 품목을 수입한 것이 기록되고 있다. 아몬드나 복숭아나무 등은 중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매우 호사품이었다. 이처럼 일찍이 <누란>, <미란>은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으로서 매우 번영하였다.
<누란>과 <미란>의 사라짐
<누란(樓蘭/Loulan)>이 처음으로 역사상에 기록된 것은 기원전 176년이다. 그 후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가기도 하고 한(漢)나라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6세기경까지 동서 교류의 요충으로서 번영하였다. 그런데 그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누란은 쇠퇴해간 것이다.
그와 보조를 맞추듯이 미란의 불교도시도 같은 운명을 걸었다. 7세기 중엽 무렵 이 지역을 여행한 현장(玄奘) 법사는 <성곽은 있으나 사람 사는 연기가 없다.>고 말하여 누란이 사람이 살지 않은 폐허가 되었음을 적고 있다.
이리하여 <누란>과 <미란>은 모르는 새에 점차 사막 속으로 매몰되어 사람들에게서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천 수백 년 동안 모래 속에 묻힌 채로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다.
누란과 미란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몇 번인가의 조사에 의하여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는 이 지방 일대는 <로브 놀(Rob Knoll)>이라는 염수호(塩水湖)가 존재했음이 판명되었다. <로브 놀> 호수에는 물이 풍부했고 <타림(Tarim)>강이 이 호수에 대량의 물을 끌어왔다. 그것은 서남에서 동북에 걸쳐 250킬로 폭은 150킬로나 되는 거대한 호수였다.
그리고 이 큰 호수의 서북연안에 <누란>이 있고 <미란>은 남서 연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도시는 물이 풍부한 <로브 놀> 호숫가에 있어서 번영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4세기경부터 이 호수가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누란>과 <미란>은 조금씩 호수에서 떨어지기 시작하여 이윽고 사막 속에 남겨졌다. <로브 놀>의 물이 이들 도시에서 사라진 때 <누란>이나 <미란>은 함께 사라진 것이다.
<스웬> 박사는 <타림>강의 흐름이 바뀌는 대로 호수 자체도 이동한 것이 아닌가 하고 결론을 내렸다. 그에 따르면 <타림>강이 토사를 <로브 놀> 호에 실어 날라서 호수가 얕아지고 한편 사막은 평탄해서 끊임없이 열풍으로 침식하게 되므로 그러는 사이에 호수의 밑바닥 고저의 차가 역전하고 말았다. 그러자 물은 낮은 쪽으로 흐르게 된다.
이런 원리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사이에 <로브 놀> 호는 천천히 이동해 간 것이다. 마치 그것은 진자처럼 <타크라마칸> 사막 가운데 있어서 100킬로나 떨어진 거리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생각된다.
그 이동은 1600년이라는 느린 속도로 천천히 일어났다고 생각된다. 박사가 <방황하는 호수>라고 이름 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현재 <로브 놀> 호에는 물은 없고 이전의 호수의 바닥만 있다.
근년에 기온의 온난화가 원인이 되어서 눈이 내리지 않고 <타림>강의 수량이 격감한 결과라고도 생각되지만 자세한 것은 모른다.
마른 호수 바닥에는 소금이 굳어서 기묘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고 여행가는 말한다.
오아시스도시에 개화해서 전성을 자랑했던 문명도 물이 마르자 흐르는 모래에 묻혀서 지금은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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