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 이야기
중국의 만리장성은 동쪽 끝이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에서 서쪽 끝은 감숙성(甘肅省) 가욕관(嘉峪關)까지 8,851.8 킬로미터나 된다고 한다.
장성의 기원
만리장성
흔히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축조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시초는 기원전 15세기의 은(殷) 왕조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황하유역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은나라는 그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북방 이민족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곧 북방 민족인 흉노(匈奴), 몽고(蒙古), 선비(鮮卑), 여진(女眞) 등의 유목민이 자주 남하해 내려와서 번화한 도시를 습격하여 금품과 식량을 약탈하고 사람을 살해하고 불을 지르곤 하였다. 그런 만족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방어용 성채를 축조하기 시작한 것이 장성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최근 호북성(湖北省)이나 하남성(河南省)에서는 은(殷)나라의 것으로 생각되는 거대한 성곽의 유구가 발견되고 있다. 그것은 높이 10 미터 폭 30 미터 정상 폭이 5 미터의 구조를 가지고 일변의 길이 2천 미터나 될 만한 거대한 성곽으로 1만 명이 매일 노동을 해서 20년 이상이 걸릴 만한 규모의 것이다.
대를 이은 만리장성 축조
이 사업은 주(周BC1046-BC771) 왕조 때에도 이어져서 기원전 4세기의 춘추전국시대에는 각각의 나라가 독자적으로 화북(華北) 변경에 성곽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세기에 이르자 진시황(秦始皇 BC259-BC210)(재위BC246-BC221)이 중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독재정권으로 각국이 축조한 성곽이나 성벽을 연결하여 하나의 방어선으로 하였다. 지금까지는 각각으로 끊어졌던 성벽을 하나로 연결한 것이다. 그리고 진나라는 황하를 따라 대규모의 장성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장성을 구축해가면서 명장 몽념(蒙恬 ?-BC210)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흉노(匈奴)를 격멸하도록 하였다. 흉노를 토벌하여 영토가 넓어지면 그곳을 개척하기 위하여 죄수들을 노동자로 들여보내어 성 구축에 이용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유형자들은 머리를 깎고, 쇠사슬에 매인 채로 몇 년이나 요새를 구축하는 데에 강제 동원되었다.
또한 진시황은 빈한한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강제로 이주당한 사람들은 채석장이나 벽돌 만드는 곳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노동력이 부족해지면 군대로 하여금 공사에 당하게도 하였다 한다. 만일 명령에 항거하는 자는 구덩이에 생매장되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물도 식량도 없는 불모지인 산지나 사막에서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흉노의 공포에 떨면서 그야말로 마소처럼 사역 당하였다. 겨울이 되면 영하 20도에 달하는 추위를 견디지 않으면 안 되고 혹시 도망이라도 치다가 걸리면 즉시 사형에 처해졌다.
이런 지옥 같은 환경에서 날마다 몇 백 명씩 굶주림과 피곤에 지쳐서 죽어갔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이러한 백성의 괴로움을 돌아보지 않고 이 공사를 진행시킨 진시황이나 명장 몽념에 대하여 격하게 논평하고 있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을 통일한 한(漢)나라는 무제(武帝 BC156-BC87) 때에 진나라의 강경책을 바꾸어 유화책으로 전환했다. 흉노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공물을 바치기도 하고 미녀를 바치기도 하여 흉노의 마음을 달래는 유화책을 쓴 것이다. 그러는 반면 흉노를 쫓아 영토를 확장하면서 장성은 서쪽으로 계속하여 이어 갔다. 마침내 돈황(敦煌)으로 서쪽 실크로드의 입구인 옥문관(玉門關)까지 연장시킨 것이다.
그 후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304-439)시대에 이민족의 힘이 강해져서 북위(北魏)는 남쪽에 치우친 현재의 선에 새로운 장성을 건설했다.
오대십국(五代十國 907-960) 시대인 936년에 장성의 중요 방어거점인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 를 후진(後晋)이 요(遼)에 할양하고 이에 따라 장성에 의한 북방 민족의 방어는 곤란하게 되었다. 그런 때문에 후 북방민족 글란(契丹)이 건국한 요(遼), 여진(女真)이 건국한 금(金), 몽고인이 건국한 몽고제국은 무난하게 장성을 넘어서 침입하여 중국은 3세기 동안 북방민족의 세력 하에 놓였다.
남방에서 일어난 중국인의 왕조인 명(明)이 몽고인의 왕조인 원(元)을 북방 초원으로 추방하자 원(元)이 다시 침입해올 것에 대비하여 명(明)나라는 장성을 강화하여 현재의 상태가 되었다.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경계선>이라 말하지만 실은 초원 가운데에 서있다. 이것은 원나라 때의 북방의 초원과 남방의 농경을 일체로 한 사회 경제가 성립하여 명나라도 자국 내에서 이를 실현하려고 북방으로의 노력을 확대하려 힘썼다. 그리하여 장성 주변에는 교역소가 설치되어 교역을 행하였으나 서로 뜻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북방민족이 침입해오곤 하였다.
명나라 말기에 만주족(여진족)이 후금(後金)을 건국하자 명나라와의 사이에 장성의 동단을 둘러싸고 사투가 반복되었으나 명나라가 망하고 후금이 청(淸)나라로 개명하여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만리장성의 현황
2006년 중국의 학술단체인 <중국장성학회>의 조사에 의하면 만리장성이 유효하게 보존되어 있는 지역은 2할 이하이고, 일부 현존하고 있는 지역도 3할이라서 5할 이상은 소실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2009년4월18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문물국은 총연장 6,352 킬로미터에서 8,851.8 킬로미터로 수정 발표했다. 봉화대 5,723개소가 확인되었다.
무너지는 장성 흔적
잘못 전해진 이야기
일찍이 만리장성은 크기 때문에 <우주에서도 육안으로 보이는 유일한 건조물이다.>라고 중국의 교과서에도 실렸으나 실제로는 폭이 좁고 주위의 색깔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한다. 그런데 2003년 중국 최초의 유인우주선 <신주(神舟)5호> 의 우주인 양리위(楊利偉) 비행사가 <만리장성은 보이지 않았다.> 고 증언했다. 그래서 교과서에서 삭제하였다. 2004년에는 중국계 미국인 <로이 차오> 비행사가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180미리 망원렌즈를 단 디지털카메라로 <만리장성>을 촬영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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