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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타지마할>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09. 11. 17. 15:21

 

<타지마할> 이야기

 

 

타지마할(Taj Mahal)은 인도 북부 아그라(Agra)에 있는 백대리석조의 능묘건축물이다. 1632년에 착공 1653년에 준공되었고, 198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연못에 비친  아침의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세로 약 580 미터 가로 약 300 미터의 부지에 둘레는 해자(垓字)로 둘러 있다.

웅대한 적사암의 남문(南門/다루와사/Darwaza)을 들어서면 이곳은 정방형으로 기하학적으로 분할된 광대한 무갈(Mughal)식 사분정원((四分庭園/차르 바기/Chahar Bagj) 이 있고 그 속 깊은 곳에 약 100미터 각으로 높이 7미터의 대기단이 있고 네 구석에 가느다란 소탑(minaret)이 솟는다. 그 중앙에는 아취형의 기둥이 없는 대공간인 이완(iwan)을 사방으로 면하게 한 능묘(陵墓/마우소레움/Mausoleum) 본체가 우뚝 솟아 있다. 능묘(陵墓)는 폭과 깊이가 60 미터이고 중앙 그 위에는 말발굽 모양의 단면을 한 높이 65미터의 돔 지붕을 얹어 있다.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 보아도 같은 디자인이다.

이들 모두가 순백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서 그 아름다움과 높은 기품이 세계인을 절찬하게 한다.

 

 

<타지마할> 전체의 배치와 특징

<타지마할>능묘는 종래의 능묘건축과는 달랐다. 종래의 능묘는 죽음의 상징인 측백나무 교목을 심은 도로가 직각으로 나눈 사분정원의 중앙에 세워졌었는데 이 <타지마할>에는 사분정원 건너 쪽 안에 <야무나(Jamuna)> 강의 대안을 배경으로 하여 아무 장애물도 없는 공간에 능묘를 배치했다.

 

서분정원 평면도

 

능묘의 양측에는 똑 같은 모양을 한 적사암 건물이 능묘를 향하여 서 있다. 모두가 백대리석 돔을 3면에 이고 서쪽(메카쪽)에는 모스크, 동쪽에는 영빈관(Guest House)이 있다.

 

 

  

                                                  남문                                  모스크                              영빈관

 

 

정원은 수로를 지닌 정원 길로 밭전(田) 자 모양으로 구획되고 있다. 교차점에는 중앙의 연못이 있는 대리석단이 설치되어 있고, 구획된 정원은 다시 작은 길로 밭전(田) 자형으로 분할되어 있다. 다시 이 소구획도 수로로 분할된다. 어디까지나 정방형을 단위로 한 기하학에 바탕을 두어서 구성되어 있다.

다시 충분히 관개가 된 화단이나 잔디밭이 있고, 요소요소에 큰 나무가 심겨 있어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수로나 연못에는 분수가 배치되어 있어 더욱 공기를 시원하게 하고. 아름다운 조망을 이루고 있다.

<타지마할>의 건축은 페르시아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인도적인 요소도 보인다. 더러 바로크 양식이 들어 있다고도 한다. 전체로 페르시아 건축의 영향이 현저하다. 사분정원도 이완도 돔 지붕도 다시 벽면의 상감세공의 기법도 페르시아의 것이다. 인도다운 요소로는 중앙 돔의 사방에 무거운 지붕을 가느다란 기둥이 받치는 소탑<차트리/Chatri/minaret>으로 그 이름은 우산을 의미하는 <산스크릿트>어의 <차드라>에서 유래한다. 이 <차트리>가 인도의 이슬람 건축을 특징짓는 요소가 되고, <타지마할>의 소탑(미나렛트/minaret)>의 정상에 첨가되어 대문 위에는 작은 <차트리>가 장식 요소가 된다.

 

 

   

 중앙 돔과 소탑

 

<샤쟈한( Muhammad Shah Jahan, 1592-1666)>이 이 <타지마할>을 건조하기 위하여 페르시아나 아랍, 유럽에서 2만 명의 공장을 모으고, 인도 안에서 천 두 이상의 코끼리를 동원하여 건축 재료를 운반하였다 한다.

건축 재료로서 대리석은 인도 <라쟈스탄> 지방산이고, 기타 벽옥(碧玉)은 <판쟙>지방에서, 비취(翡翠)는 중국에서, 터키석은 <티벳>에서, 라피스. 라즈리(청광석)는 <아프카니스탄>에서, 싸파이어는 <스리랑카>에서, 홍옥수(紅玉髓)는 <아라비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전체로 28종의 보석, 광석이 끼워져 있다.

 

왕비를 추모하기 위한 능묘

국위가 최성기였던 <무갈(Mughal)>제국의 제5대 황제<샤자한((Muḥammad Shah Jahan)(재위1628~1658)>은 1630년에 군대를 이끌고 데칸고원으로 향했다. 아라의 가호를 얻어서 남인도도 판도에 넣으려고 하였다. 이 때 황제가 사랑하는 왕비 <맘타즈 마할(Mumtaz Mahal)>은 임신 중이었는데 남편의 원정에 따라갔었다. 그 이듬해 중부 인도의 <브루한브루>에서 황제의 14번째 아기를 출산하고 산욕으로 38세로 세상을 떴다.

 

   

샤자한 왕과 왕비의 상 

 

<맘타즈 마할(Mumtaz Mahal)>은 <궁정의 선택된 자>라는 의미로 <샤자한> 황제에게 시집올 때에 선제인 <쟈한기르 (Muḥammad Jahangīr 1569-1627)(재위1605- 1627)>에게서 받은 애칭이다. 본명은 <아르쥬만드 바누 배굼(Arjumand Banu Bagum>이라 하며 궁정 명가의 출신으로 결혼 후에는 황제의 좋은 상담역이었다. <샤 쟈한>황제는 일생 변함없이 <맘타즈 마할>을 사랑하여 전장에까지 동반시켰던 것이다.

왕비가 죽자 황제는 온 나라에 2년간의 복상 기간을 명하고 스스로 슬퍼하여 그 후 마음이 밝은 날이 없었다. 제국의 영토 확대나 궁정 정치에 열을 다하던 <세계의 왕>이라 일컬었던 황제도 단지 <맘타즈 마할>을 그리워하며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왕비가 죽은 2년 후부터 묘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실로 22년이나 걸려 완공되었다 한다.

 

꿈으로 사라진 또 하나의 흑대리석 능묘

<샤 쟈한>이 왕비 <맘타즈-마할>의 죽음(1630년)을 애도하여 이 <타지마할>을 준공하고 얼마 없어서 <샤 쟈한>황제는 <야무나(Jamuna)>강 대안에 흑대리석을 기조로 한 자신의 묘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계획에는 강을 끼고 백대리석과 흑대리석의 능묘가 나란히 있고 그 사이를 대리석 다리로 이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샤 자한>이 병으로 쓰러지자 왕자들 4명이 제위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병에서 일어난 <샤 자한>황제는 전권을 장남에게 위임하여 은퇴하고 흑대리석 능묘의 건축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제위 쟁탈전에 승리한 3남인 <아우랑제브 알람기르(Aurangzeb Alamgir 1618-1707)는 부왕이 장남을 비호하였다는 이유로 <샤 자한>을 <아그라>성에 유폐하고 말았다. 그러자 <샤 자한>왕은 강 건너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8년 동안 날마다 눈물로 지새다가 1666년 세상을 뜨게 되자 <타지마할>의 왕비 옆에 묻혔다.

 

 

묘실의 가관

 

 

<타지마할>의 평가와 유명한 이유

<타지마할(Taj Mahal)>이란 <맘타즈 마할>을 줄인 것으로 <궁정의 관>을 의미한다. <샤 쟈한> 황제의 한숨이 화석화한 것이라 형용된다. 이 능묘는 좌우대칭으로 균형을 취한 <무갈(Mughal)>의 전통을 이어서 절정에 이른 능묘 건축이라 평가된다.

<타지마할>이 지어지던 연대기에 따르면 <그 위용과 아름다움은 천상의 일곱 개의 낙원을 능가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17세기의 프랑스의 의사로서 여행가인 <프랑스와 베르니에(Francois Bernier 1625-1688)>는 <타지마할의 예술성의 높이를 비교한다면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은 단순한 돌덩이를 쌓은 산에 불과하다.>라고 평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이슬람 건축은 인도의 <타지마할>이다. 이것이 능묘가 아니라 궁전이라고 해도 <타지마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누구든지 생각해내게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유명해진 이유는 다음의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모두가 백아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이다.

 

둘째는 그것이 건설된 경위가 말해주는 낭만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무갈왕조 제5대 황제 <샤 쟈한>은 궁정 귀족의 딸인 <맘타즈 마할>과 결혼해서 하렘에 많은 미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생 그녀 한 사람만을 깊이 사랑하고 14명의 아이를 낳았다. 아기를 낳다가 산욕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황제는 깊은 비탄에 잠겨서 <타지(맘타즈 왕비의 애칭)>를 생각하기 위하여 가장 아름다운 능묘를 지을 것을 결심하고 국가의 재정을 기울여 이를 지었다. 또한 <야무나>강 대안에 자신을 위한 같은 모양의 흑대리석의 능묘를 지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왕자 <아우랑그제브>에 의하여 폐위당하여 <아그라>성 구석에 유폐되어 강 건너 쪽의 <타지마할>에 묻힌 왕비를 생각하며 눈물로 만년을 보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서 유명해졌다.

 

셋째는 이슬람 건축의 특질은 피막적건축(皮膜的建築)이라고는 하지만 외부의 조각적 형태를 과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싼 중정원이나 내부 공간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런데 이슬람 건축이면서도 인도의 조각적 건축으로서 독립한 우미한 모습을 아낌없이 나타낸 건축 작품은 현장에 가지 않고 사진만 보아도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기단조각                                                 벽면조각 

 

 

 넷째는 <타지마할>은 참으로 이슬람다움에서 일탈하여 인도적인 허영화한 건축 작품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타지마할>의 돔은 이중전(二重殿)으로 천장과 지붕 제각각에 보기 좋은 높이에 돔을 얹고 있다. 이 이중 돔의 지붕 안 공간에는 중심인 묘실의 공간보다 거대하고 터키의 피막적인 싱글돔 지붕과 비교하여 허식적이며 실은 그 허식에 의하여 세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하는 외형의 미를 산출하고 있다. 또는 능묘를 끌어올리고 있는 4개의 첨탑도 본래 능묘에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돔의 4개의 <차트리(chatri /small tower)>도 옥상에 사람이 오르지 못하는 한 무용한 허식이다.

한편 벽면의 장식은 모두가 눈에 띄지 않은 것이지만 건축 자체의 구성에서 일탈하지 않는다. 상감세공인 꽃 모양이나 당초 모양 기하학적 무늬나 서체(calligraphy), 모두는 백을 기조로 하고 건축의 틀에서 결코 튀어나오지 않는다. 전체의 모양을 이루는 것은 바로크적인 과잉한 장식이 아니라 오히려 기능주의와 구조표현주의의 건축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여기에 묻힌 왕비와 같은 청초하고 기품이 있는 완성된 미를 낳고 있다. 단지 그것이 너무나 고전적인 조화미의 세계인 까닭에 건축 작품이라고 하기보다 방안에 들여 놓을 만한 하나의 거대한 공예품 같은 인상을 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