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 이야기(1)
1. 중국의 환관
1. 역사 속의 왕의 여자들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군주들은 거의 예외 없이 수많은 처를 얻고 무수의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호화로운 궁전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곧 군주로서 호색한이 아닌 자가 없었던 것이다. 남자로 태어나 권력을 잡았으면 이처럼 생활해보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예를 들면 기원전 10세기의 유대의 솔로몬왕은 천명의 처첩을 거느린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고, 서아시아를 지배한 이슬람제국의 역대 슐탄은 지배하고 있는 영토에서 수 백 명 씩 미녀를 헌상하도록 하여 거대한 하렘 안에서 꿈같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도 산 같은 금은 재화를 가지고 수백 명의 처첩을 소유하는 절대 권력자였다는 것이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 역대 황제의 후비는 이들 군주의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마치 사실을 알면 졸도할 정도로 많은 수의 미녀를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나라 무제(武帝)는 8천명의 미녀가 있었다 하고, 진(晋=3세기경)의 무제(武帝)는 실로 1만 명이나 있었다 한다. 오호16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의 후초국(後超國)에 이르러서는 후비의 수는 3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놀라움의 경지를 넘긴다. 황제들은 전국 각지에서 뽑아 보내는 미녀들을 살리기 위하여 막대한 자금을 써서 화려한 궁전을 건조하고 확장하였다.
2. 왕의 종
그런데 이만큼 수많은 궁녀가 있으면 그를 부릴 사람도 필요하게 된다. 궁녀나 시녀들은 왕궁 내를 돌아다니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남에게 얼굴을 내놓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궁내에는 체력을 써야 할 만한 일들이 많았다. 곧 남자의 손이 필요했다.
이런 점에서 여자 노예보다도 황제의 소유물이면서 후궁인 미녀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는 노예 곧 남자 성기를 제거하여 중성화된 노예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요와 공급의 관계가 환관을 낳게 한 시대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곧 궁녀와 환관의 수는 항상 정비례의 관계였다.
환관이라 불리는 성기를 제거한 남자는 고대로부터 세계의 각 궁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환관은 간음의 죄를 범하지 않으므로 일반인보다 신뢰할 수 있다 하여 귀중하게 여겼다. 그리스나 로마나 페르시아나 인도에서도 강대한 왕 밑에는 언제나 많은 처첩이 궁정에서 떼를 이루는 것이 현실이었으므로 이들에게 봉사하고 관리하는 환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3. 중국의 환관
중국처럼 환관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는 나라도 없고, 게다가 4천년이라는 기나긴 왕조의 역사를 환관을 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환관의 기원은 기원전 14세기 은(殷)왕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은나라 왕족이나 귀족은 가내 노예를 얻기 위하여 전장에서 이민족의 포로를 그에 충당시켰다. 그 때 남녀 접촉을 방지하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거세를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궁형(宮刑)으로 거세된 죄인도 쓰게 되어서 전쟁 포로와 합하여 환관의 공급원이 되었었다. 은나라시대에 출토된 갑골문자에는 남자의 성기 옆에 하나의 작은 칼을 배치한 것 같은 모양의 문자가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회화문자로서는 엄(閹=거세한 남자란 뜻)이라는 문자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으므로 환관을 엄인(閹人)이라 부리게 되었다 한다.
4, 환관이 되려면
은나라 때의 거세 방법은 매우 원시적이라서 사망률도 높았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망률이 75%였다고 하니 수술에 성공한 사람은 희소가치가 있어서 고가로 팔렸다고 한다.
이런 성기 절제의 기술은 서서히 진보하였다고는 하지만 청조말기가 되어서도 기본적으로는 그리 변화가 없었다.
고대 오형(五刑)의 하나인 궁형은 코나 귀 등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는 육형(肉刑) 중에서도 머리 부분에 다음 가는 성기를 잘라내는 것이므로 사형에 준하는 중형이었다. 궁형의 궁(宮)자는 바람이 통하지 않는 밀실을 의미하고 이 형이 밀실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궁형이라고 하게 되었다 한다. 궁형은 간음죄를 범한 죄인에게 적용되어 원칙적으로 남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여자에게도 궁형은 있었다. 남자의 경우는 남자의 성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받으나 여자의 경우는 유폐(幽閉)라는 형벌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여자 수형자는 손발을 묶고 나무로 복부를 몇 번이나 두드린다. 그러면 자궁이 내려앉아서 음도를 막아버리는 결과가 된다. 그도 그 후에는 용변은 가능하지만 성행위는 영원히 할 수 없다.
그리하여 불쌍한 신세가 된 그들은 궁정의 노예가 되어서 일만하는 운명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일에 대한 의욕이나 살아가는 기쁨 같은 것은 있을 이가 없고 단지 기계적인 업무를 반복되는 나날이 계속되는 것이다.
5, 환관의 이상심리
그들 성기의 결함이 있는 환관들의 자기비하의 심리상태는 이상할 정도로 과민한 것으로 언제나 편협하고 시기심으로 굳어져있다. 마음에 언제나 쓸쓸함을 지니고 자폐적으로 시야도 좁고 차가운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성기를 절제한 환관의 몸은 남성 홀몬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육체적으로 크게 변화한다. 피부는 부드러워지고, 수염도 나지 않으며 목소리도 가늘고 예리해진다. 중년이 되면 비대해지기 쉽고 둔부와 대퇴부에 지방이 붙어 여자의 걸음걸이를 하게 된다. 그 신체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이상한 존재이다. 이러한 변화는 그들의 정신에 타격을 준다.
그런데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곧 환관이 될 때에 제거된 성기를 죽기 전에 제자라에 붙여야 하는 것이다. 만일 육체가 불완전한 상태로 이 세상을 뜨게 되면 내세에는 비참한 신세로 태어나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거된 성기를 단지에 넣어서 소중히 보존하는 것이다. 혹시 도둑을 맞거나 잃어버리면 큰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고가의 자금을 내고 남의 것이라도 사들여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환관이 된 그들에게는 자살자가 끊이지 않았다. 인생에 있어서의 기쁨이나 애정도 모르고 일생을 조소와 능욕을 받아야 하는 결과이다. 그러나 자살은 엄금되어 있고 자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무서운 예방조치가 고안되었다. 자살한 자의 시체는 거친 들판에 내버려져서 들개가 먹거나 썩을 때까지 내버려둔다. 또 자살자를 낸 집안사람은 이민족이 출몰하는 변경으로 강제로 보내고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하는 일도 있다.
6, 환관의 권력 행사
그러나 본래는 궁정 내에서 잡무를 보는 노예와 같은 환관이지만 세월이 감에 따라 권력을 수중에 넣어서 그 역할이 변질되어 권세욕을 마음껏 누리는 존재가 되어갔다. 끝내는 황제를 위협하는 특권계급이 되어가기도 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황제로서 지방 세력의 대두나 재상의 압력 장군의 횡포 등은 그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시기심으로 굳어진 황제는 이런 신료들을 신뢰할 수가 없고 오히려 환관을 의지하게 되었다.
일찍이 황제와 맞아서 권력을 수중에 장악한 환관 중에는 군사, 외교, 정치, 종교 등의 여러 분야에 걸쳐 권력욕을 마음껏 누리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당라나 현종(玄宗) 때에 고력사(高力士) 같은 환관은 그 전형이다. 당시 모든 중요 과제는 먼저 고력사의 눈을 통해야 황제에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상례였다. 곧 환관이었던 고력사(高力士)는 황제의 화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고력사는 현종황제에게 양귀비을 소개하고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발했을 때에는 양귀비를 자기 손으로 죽이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당나라 말기에 이르면 제위에 즉위한 10명의 황제 중에 9명이 환관에 의하여 옹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환관들끼리 내부분열로 환관 세력을 일소하자는 황제도 있었지만 거꾸로 환관에 의하여 황제의 권력을 땅에 떨어뜨리고 사실상 환관이 권력을 잡는 데 까지 이르렀다.
황제는 환관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느 황제는 "이러고서는 나는 노예와 같지 않은가."하고 소리 높여 울기도 하였다 한다. 당나라 말기의 황제들은 전성시기임에도 반대로 매일 독살이나 책모에서 오는 죽음의 공포가 내게로 오지 않을까 하는 겁을 먹으며 궁정생활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황제와 환관 어느 쪽이 최고 권력자인지 모르게 될 정도였다.
7. 환관의 인기
환관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성기를 절단하는 자도 생겨났다. 이런 자를 자궁자(自宮者)라고 불렀는데, 14세기 명나라 시대에 이르자 그러한 풍조가 점점 강해져서 처음에는 100명이 되지 않을 정도였던 것이 명나라 말기에는 10 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 식량이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아서 날마다 아사자가 생겼다고 기록할 정도이다. 명대의 황제는 몇 번이나 자궁 금지령을 내렸으나 그 수는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환관이 되면 노역을 하지 않아도 되고 혹시 권력을 가지게 되면 환관의 친족의 위세는 나는 새를 떨어뜨릴 정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농민은 숨어서 아이를 거세하여 환관으로 하고 싶어 했다. 곧 빈곤으로 허덕이는 농민으로서 환관이 되는 것은 입신출세와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고 학대 받는 현실에서 도망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청대에는 성기를 절제하는 전문 직업인도 나타나서 거세대금은 전6량(錢六兩)이었던듯하다.
8, 환관의 종말
톱클래스의 환관 중에는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어서 광대한 토지를 사고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다수의 첩을 두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궁전과 같아서 높은 누각이 몇 채나 즐비하고 광대한 뜰에 멋진 연못이나 정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다.
서태후 때에 환관을 한 이련영(李蓮英)은 청 왕조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되자 민중으로부터 착취하여 모은 돈으로 광대한 토지를 손에 넣고 호화로운 저택을 지어서 이제는 무용한 자신의 관직을 은 일 만량에 팔았다. 그가 소유하는 재산은 각종의 동산을 포함하여 여러 왕에 필적할 만한 거부였다.
같은 소덕장(小德張)은 은(銀) 20만량 이상의 자본금을 가지고 베이징에 포목점이나 전당포를 다수 가지고 있었고, 공장마저 설립하여 자본가로 탈바꿈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태후의 권력 최성기에 전국의 관료로부터 받은 뇌물을 계속 저축한 결과이다.
그러나 모든 환관이 톱클래스가 되는 것은 아니고 대다수는 하급 환관인 채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급 환관일 경우에는 무엇 한 가지 좋은 것은 없고 그것은 산지옥 같은 삶이었다.
일단 궁에 들어가면 감옥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밖으로 나올 수도 없고, 궁정 내부의 사정을 입 밖에 내지도 못하도록 금지 되었다. 만일 이 규정을 어기면 관계자는 모두 체포되어 살고 있으면서 살을 조금씩 베어내어 죽이는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환관은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 사정없이 궁 밖으로 내쳐져서 몸을 의지할 형제도 없이 결국 절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북경 교외의 절에는 당시의 환관의 공동묘지가 존재한다.
9, 필요악으로서의 존재와 소멸
중국 4천년의 긴 역사는 환관과 관료, 때로는 외척 등의 음침한 권력 투쟁의 역사이다. 정치사에 간섭하는 것을 엄금한 명대이후에도 그들은 권력을 얻어 증식하고 계속 암약해 온 것이다. 그런 음모의 소용돌이에서 때로는 사람들에게 원한을 산 나머지 환관 대학살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몇 번 있었으나 그들의 존재는 결코 소멸되는 일이 없었다.
황제의 권위와 후궁 제도가 존재하는 한 환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역사가 요구하는 필연의 밑바닥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황제의 신변의 잡무는 모두 환관이 취급했다. 곧 날마다 황제의 지근거리에 있는 환관은 황제의 권력을 배경으로 하는 일이나 또 황제를 조종하기에도 용이했던 것이다.
20세기가 되어서 청 왕조가 멸망하고 신정권 중화민국이 후궁제도가 필요 없게 되어서 이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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