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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중국의 3대 악녀(惡女) 이야기 1 <여후>

간천(澗泉) naganchun 2009. 10. 7. 05:14

 

중국의 3대 악녀(惡女) 이야기 1

 

악명 높은 황후 여후(呂后)

 

 

여후의 이름은 치(雉)(BC239년~BC180년)

자는 아(娥). 중국 최초의 악녀.

한고조 유방(劉邦)의 정실로서 유방 생전에는 현처였으나

유방 사후 여씨 일족을 중앙 정부에 배치하고 공신들을 살해하고

고조의 총애를 받던 척부인(戚夫人)을 처참하게 살해하고

악명 높게 행세했다.

내정면에서는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한다.

 

 

 

1, 유방의 아내가 되다.

 

여치의 아버지 여공(呂公)이 용무가 있어서 퍠현(沛縣)의 현령을 방문하였는데 친구인 현령과의 친분이 두터운 큰 인물이라고 안 지방의 유지들이 선물을 가지고 연회석에 참가하려 모여들었다. 이 연회석에 지방 관리를 하고 있던 유방(劉邦)이 <금 일 만 량>을 내고 참석하였다.

이때 연회석에 참석했던 지방 관리인 소하(蕭何)가 말하기를 "너는 고작 사상(泗上)의 정장(亭長=국영숙사의 장)이지. 네가 <일 만 량>의 큰돈을 가지고 있을 이가 없다. 고만 허세를 부려라." 하고 말하였으나 유방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당당히 연회석에 들어갔다. 그 지방 사람들은 근래에 유방이 방약무인하고 호언장담을 잘한다는 것을 알고 모두 눈살을 찌푸렸으나 단 한 사람 여공만은 반겨서 술을 권하기까지 하였다.

여공은 술을 권하면서 유방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러 가지의 사람의 관상을 보아왔는데, 이보다 더 고귀한 상을 가진 사람은 처음입니다. 장차 대업을 성취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실은 나에게 딸이 있는데 당신 같은 사람에게 결혼을 시키고 싶습니다." 그러자 유방은 쾌히 승낙하였다.

이 말을 들은 여공의 처는 졸도할 만큼 큰 소리로 "어찌하여 천한 정장 정도의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내려 합니까. 당신은 딸을 귀한 사람에게 시집보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항의하였다. 그러자 여공이 말하기를 "당신은 모를 것이오. 나의 눈은 틀림이 없소." 하고 대답하였다.

여치는 아버지의 사람을 보는 눈이 있음을 이해하고 그에 응하기로 하였다. 여치는 이미 조씨(曺氏)라는 조강지처가 있음을 알면서도 유방에게 시집을 갔다.

지금까지 부잣집 딸로서 부자유함이 없이 살아온 여치였지만 유방의 집은 가난하고 밭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말씀에는 의심하지 않았다.

 

2, 황제의 정실이 되다

 

여치(呂雉)가 아내가 되어서 3년 후 유방(劉邦)은 퍠현(沛縣)의 현령이 되고 진(秦)나라 왕조에 반기를 들어 거병하였다. 거병 후 7년 BC202년에 유방은 숙적인 항우(項羽)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황제가 되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이다.

여치(呂雉)는 황후(皇后)가 되고 여후(呂后)라 불리게 되었다. 여공(呂公)이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다. 여공은 임사후(臨泗候)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때까지 여치(呂雉)는 대단히 고생을 하였다. 유방(劉邦)은 술과 여자에 눈이 멀어서 여씨의 지참금마저 다 날렸다. 여치는 유방과의 사이에 일남일녀를 두었다. 후의 혜제(惠帝)와 노원공주(魯元公主)이다.

전쟁 중에는 아이들과 함께 항우(項羽)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유방은 가족을 버리고 혼자 도망쳤기 때문이다. 또 아이들을 병거에 태우고 도망하는 중에도 적에게 잡힐 것 같이 위급한 때는 병거를 가볍게 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버리기도 하였다. 그럴 때 마다 가신들이 그 아이를 병거에 태우곤 하였다. 아버지로서는 최악의 행동이었으나 여치는 원망하지 않고 남편의 뜻을 받들어 따라다녔다. 그런 결과 황후까지 된 것이다.

 

3, 공신 한신(韓信)을 죽이다

 

한왕조(漢王朝)를 세운 고조는 항우(項羽)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공신을 왕(王)으로 봉했다. 경포(黥布), 팽월(彭越), 한신(韓信) 등이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은 무시할 수가 없어서 만일의 모반을 두려워하여 고조는 후에 유씨 성이 아닌 왕을 세운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신(韓信)은 군략에 뛰어나서 항우와의 싸움에도 그의 전략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한왕조를 뒤집을 세력이 나온다면 한신 이 먼저일 것이다. 그와 싸우기에는 힘들 것이다. 어느 날 한신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모함하는 자가 나타났다. 이에 유방은 한신을 장안으로 불렀으나 한신은 벌 받을 것을 염려하여 오지 않았다. 유방은 이것을 구실 삼아 회음후(淮陰候)의 자리에서 격하시켰다. 그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한신은 근신하고 있었는데, 수년이 지나도 왕의 자리에 복귀시켜주지 않음에 불만을 느끼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진의(陳懿)가 한왕조에 대하여 거병할 것을 청하자 한신은 동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유방은 토벌하러 대(代)로 향하였으므로 이 틈을 노리고 한신은 장안을 탈취하려고 거병하였다. 그러나 결행 직전에 여후에게 고발하는 자가 있었다.

"황제가 없는 지금 내가 한왕조를 지켜내어야 하겠다."

이윽고 한신에게 고조로부터의 사신이 당도했다. 대(代)의 반란이 진압되었으므로 축하회에 참석해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신은 "대의 반란이 이렇게 빨리 진압될 이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축하할 일입니다. 국가의 경사인 만큼, 곧 참석하겠습니다."하고 곧 참석하여 여후에게 축하의 말을 하였다. 여후는 차가운 웃음을 띄우고 둘레의 경호원에게 명하여 한신을 체포하고 말았다.

여후는

"이렇게 장안에 올 줄이야. 내로라하는 사려 깊은 한신으로서는 실수였군요. 그대가 대의 진의와 모반을 일으키려고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여후의 덫이라고 깨달은 한신은 이를 악물고 말하였다.

"진의가 토벌 당했다. 대의 반란이 그렇게 빨리 진압될 줄이야, 그것은 불운이군."

이 말을 들은 여후는 웃으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진의는 아직도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어요. 당신의 호응을 기대하고서 말이요. 한군이 그렇게 빨리 진압할 수가 있겠어요. 사자는 거짓으로 내가 보낸 것입니다. 나의 계략도 대단한 것이지." 여후는 고조가 돌아오면 한신을 용서해 줄 것을 염려하여 곧바로 한신을 처형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일족도 모두 처형하고 말았다

 

4, 공신을 숙청하다

 

양(梁)의 왕으로 봉해진 팽월(彭越)은 한신(韓信)과 같이 고조가 대(代)에 친히 출정할 때 병을 핑계하여 원정하지 않았다. 고조는 이에 대하여 격노한 때문에 팽월은 서둘러서 사죄하려 하였으나 부하 장군이 반대했다.

"처음 요청했을 때 가지 않았는데, 문책을 당하여 간다고 해도 위험할 뿐입니다. 반드시 죄를 무를 것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쪽에서 먼저 기선을 제압해야 합니다."

팽월도 당황하여 결국 사죄하러 가지 않았다.

그런데 고조에게 팽월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는 자가 있어서 곧 병을 파견하여 팽월을 체포하고 말았다. 고조는 팽월이 일찍이 세운 공을 생각하여 평민으로 격하하고 사천(四川)에 유배하여 죽음만은 면하게 하였다. 이 팽월 일행이 사천으로 가는 도중 여후의 차와 마주쳤다. 이것이 팽월의 불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팽월은 여후에게 울면서 호소했다.

"나는 결코 모반을 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쪼록 무고함을 말씀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적어도 유배가 아니라 고향으로 갈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여후는 무표정으로 팽월을 노려보다가

"알았습니다. 그대의 열의를 보아서 상주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므로 팽월은 감격하여 엎드려 절하였다. 여후는 낙양에 이르자 고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어찌하여 팽월을 처형하지 않았습니까. 서민으로 격하하는 것만으로는 화를 면하게 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음, 나는 항우와의 전쟁에서 크게 팽월에게 조력을 받았다. 이제야 말을 바꾸어 죽인다고는 할 수 없다."고조는 아무튼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후는 한 꾀를 생각해내었다. 복심인 부하로 하여금 팽월의 모반이 사실이었다고 밀고하게 하였다. 그것을 들은 고조는 하는 수 없이 참형을 명하였다. 여후는 곧바로 삼족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말았다. 또 여후는 팽월의 살을 도려내어 소금에 절여서 다른 제후들에게 보냈다. 한왕조에 배반하면 이렇게 된다는 위협이었다. 그런데도 이에 같은 반열의 경포(黥布)는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강하게 예감하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반기를 들었다. 고조는 친히 병을 끌고 진압에 나섰다. 경포도 호걸이었지만 나이를 이길 수는 없어서 진압당해 처형되었다. 고조도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5, 고조 유방이 죽다

 

고조는 화살을 맞은 상처로 침상에 엎드려 있었다. 쇠약해진 모습이 길지 않다고 깨달은 여후는 고조에게 물었다.<폐하 이후를 듣고 싶습니다. 만일 소하가 죽는 경우 누구룰 쓰면 좋을까요>><조참이 좋을 것이오.><그러면 그 다음은요.<왕릉(王陵)이 좋을 것이오. 또 진평(陳平)을 보좌로 하여 주발(周勃)에게 군을 맡기면 편안할 것이오.>

<그 마음은 어떻습니까.><너는 도대체 언제까지 살 작정이냐. 그 다음은 알아서 해라.>

기원전 195년 4월 고조는 장락궁(長楽宮)에서 붕어했다. 62세였다

 

.6, 조왕 여의(趙王如意)를 암살하다

 

고조는 생전에 많은 미인을 후궁으로 두었었다. 특히 만년에 척부인(戚夫人)을 총애했다.

여후의 자식 영(盈)이 16세에 즉위하여 혜제(恵帝)가 되고, 여후는 여태후(呂太后)로서 약한 혜제(恵帝)를 대신하여 정치를 하게 되었다. 먼저 고조의 총애를 받던 척부인(戚夫人)에게 복수하기로 하였다. 여후가 척부인에게 그토록 미워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척부인에게는 여의(如意)라는 아들이 있었다. 밤마다 침소에서 영(盈=여후 소생)을 태자를 폐하고 여의를 태자로 봉하도록 고조에게 몇 번이나 간청을 했다. 곧 정실의 위를 노린 것이다. 당황한 여후는 장량(張良)에게 의론하기로 하였다. 장량은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 세속에서 떠나 선인처럼 살고 있었다. 장량은 여후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옛날 폐하가 가신으로 끌어안으려 하였으나 참내하지 않은 4명의 현인이 있습니다. 이 4명을 태자 영(盈)의 후견인으로 할 수 있다면 해결될 것입니다.>

여후는 서둘러서 그 학자들을 후견인이 되어 주도록 부탁했다. 승낙을 얻은 어느 날 그 현인이 영에게 따르는 것을 보고 고조는

<영에게는 훌륭한 날개를 갖춘 것이로군요. 이제 태자를 폐할 수는 없다.> 고 체념하였다.태자 폐위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여후의 척부인에 대한 원한은 골수에 사무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조왕(趙王)인 여의(如意)를 장안으로 불러냈다. 틈을 보아서 살해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어린 여의가 죽는 것을 불쌍하게 생각한 혜제(恵帝)는 여의와 침식을 함께 하는 것으로 보호하려 했다. 곤란해진 여후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의외로 그 기회가 빨리 왔다.

어느 겨울날 아침 혜제는 활쏘기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그날은 추웠기 때문에 잠자리에 있는 여의를 깨우러 갔다. 잠을 깬 여의는 옆에 혜제가 없으니 궁녀에게 물으니

<폐하는 활쏘기 연습으로 나가셨습니다. 언제나 하는 연습장에 계실 것입니다. 오늘은 특히 춥습니다. 따뜻한 국을 드시지요.> 하고 국과 술을 내놓았다. 여의는 한 목음 마셨다.

실은 이 궁녀는 여후가 시킨 것이었다. 혜제는 걱정이 되어서 어느 때보다 일찍 돌아왔는데 여의는 짐독(鴆毒=짐새의 털을 술에 담가서 만든 독)을 마셨기 때문에 이미 죽어 있었다.

다음은 척부인이다.

 

7, 척부인을 처참하게 살해하다

 

 

여후는 척부인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었으나 수일 후에는 척부인에게 잔혹한 처형을 행했다. 먼저 입에 약물을 집어넣어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귀에 유황을 넣어서 듣지 못하게 하고, 다음에는 눈동자를 도려내었는데 너무 격통이 심해서 척부인은 실신했다. 거기서 물을 끼얹혀 정신을 들게 하고 다시 양 손과 발을 잘라서 아픔에 견디지 못하여 구르는 모습을 구경거리로 하였다. 이러한 잔혹하기 짝이 없는 처치에 얼마나 척부인에 대한 원한이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이윽고 척부인은 죽었는데 시체를 측간에 처넣어서 인돈(人豚)이라 이름 지었다.

여후는 혜제를 대동하고 측간 앞에 나타났다. 안을 잘 보세요 하고 권하니 혜제는 두려워하면서 안을 드려다 보니 한 덩어리가 보이는데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마 마마 이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여후는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저것은 척부인입니다. 선제를 포로로 하여 우리를 괴롭힌 여자의 종말입니다.>

혜제는 말할 수 없이 얼굴이 창백해지고 토하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사람으로서 할 짓입니까. 나는 당신의 자식으로도 황제로서도 자격이 없습니다.>

그 후로 혜제는 병석에 눕게 되고 매일 술로 지내다기 얼마 없어 기원전 188년에 서거했다.

 

8, 여후가 전횡하다

 

 

여태후의 아들인 혜제는 23세로 서거했다. 그런데 장황후(張皇后)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여태후로서는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이 즉위하지 않으면 자신의 권력은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후궁이 낳은 아들을 장황후의 자식으로 하고 그 생모를 살해하였다. 장황후는 여후의 딸인 노원공주의 딸이어서 여씨 일족 중에서 골라 즉위 시키려는 여후의 뜻과 맞았다. 그래서 6공자 중에서 공(恭)이 태자가 되고 즉위하여 소제(少帝)가 되었다. 이 때 나이는 5세였다. 수년 후 소제는 여후가 자신의 생모를 살해했다는 것을 알고 은밀하게 여후를 미워하고 있었다.<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내가 성인이 되면 반드시 원수를 갚으리라.> 소제의 살기를 감지한 여후는 소제가 성인이 되면 자신이 위험해진다고 생각하여 소제를 폐위시키고 다시 유폐시켰다가 살해하고 말았다. 다음은 6공자 중 홍(弘)을 세워서 즉위시키고 그 후로는 여후의 전횡은 그칠 줄을 몰랐다.

고조의 자식인 조왕우(趙王友)나 연왕건(燕王健) 등 4명을 살해하고 대신 여씨를 왕으로 하였다.

유방 생전에는 <혹시 유씨 일족이 아닌 자가 왕이 되는 때가 오면 용서 없이 이를 죽여라.> 하고 법을 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릉(王陵)은 맹렬히 반대하였으나 진평(陳平)은 <여후가 죽을 때까지는 참는다. 이제 반대하여서 득책이 없다. 여씨를 폐하고 유씨를 부흥시키기를 꾀하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다.>고 왕릉을 설복시켰다.

여태후의 야망은 여씨에 의한 한왕조의 탈취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확하지만 이 시점에서 여태후 앞에 막아 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9, 기이한 일들이 생기다

 

 

북방에는 한나라를 위협하는 흉노족이 있었다. 일찍이 고조 때에도 이를 치지 못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흉노는 왕을 선우(單于)라 하는데 이때의 왕은 모돈선우(冒頓單于)였다. 어느 날 이 모돈선우로부터 여후에게 편지가 왔다. 그 편지에는

<--폐하는 일찍이 고조가 돌아가셔서 혼자 몸으로 나날을 보내기 쓸쓸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당신의 빈 곳을 채워드리고자 하는데 어떠하신지요.>

하는 내용이었다. 여후는 화가 나서 즉시 주발(周勃)를 시켜 치도록 하였으나 여러 장군의 만류로 마음을 바꾸었다. 후일 선우로부터 사죄의 편지가 왔다. 하나의 장난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궁정 내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처음으로 보는 일식 현상이 나타나서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에 여후는 크게 웃으며

<나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나 탓이라서 여러분에게 화가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안심하라고 전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여후는 자신이 지은 죄가 낳은 신의 노하심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10, 여후가 죽다

 

여태후는 정기적으로 교외로 액땜을 하러 나갔었다. 기원전 180년 3월 액땜을 마치고 귀로에 흑청색의 개가 여태후에게 달려들어서 허벅지를 물었다. 개는 도망치고 이상하게 여긴 여태후는 점을 치게 하였는데 <이것은 여의(如意)님의 앙화일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물린 자국에 상처가 나고 점점 악화되어서 병상에 눕게 되었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느낀 여태후는 여씨 일족을 모아서 말하였다. 특히 조왕(趙王)인 여록(呂祿)과 양왕(梁王)인 여산(呂産)에게는 특히 <너희들은 지금 왕으로서 영화를 누리고 있지만 원래 선제는 유씨 이외는 왕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많은 충신들이 너희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 단지 나를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없어지면 일거에 반란을 일으킬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병권을 장악하여 일족이 협력하기 바란다. 나의 장례는 언제 하여도 좋다.> 하고 간절히 말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서거했다 기원전 180년 7월이었다.,

 

 

11, 여후의 사후

 

 

여후가 죽자 얼마 없어 진평(陳平)이나 주발(周勃) 등 원훈은 제왕(齊王) 유아(遺児) 등 황족이나 여러 나라에 남아있는 유씨인 왕의 협력을 얻어 쿠데타를 일으켜 여씨 일족을 살해한 후 혜제(恵帝)의 배다른 동생 대왕유항(代王劉恒)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이가 문제(文帝)이다. 문제를 옹립한 전후에는 소제홍(少帝弘)도 혜제(恵帝)의 아들이 아니고 여후가 어디서 데리고 온 성씨를 알 수 없는 자라는 이유로 혜제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던 상산왕 유조(常山王劉朝)、회양왕 유무(淮陽王劉武)등과 함께 암살당했다. 또 여후의 여동생 여수(呂須)는 태장을 놓아 살해했다. 여수(呂須)의 아들 번항(樊伉)도 살해되었다. 여씨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이때에 살아남은 자는 노원공주(魯元公主)와 장경(張敖)의 아들(張皇后의 兄弟)장언(張偃)뿐이었다.

 

 

12, 평가

 

여후시대는 황족이나 원훈들이 살해되는 등 궁정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연속이었다. 그러나 시정에서는 매우 평화롭고 안정된 시대였다. 이것은 여후가 대외 원정 같은 대사업을 극력 억제하고 국민의 생활안정에 진력하였기 때문이다.(특히 한신(韓信)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한 일이라든지, 동시에 다시 전란에 휩싸이는 일을 막는다든지 하여 그 공적은 크다.)후에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에 의한 문경의 치(文景의治)및 무제 시대에 들어서의 대원정을 필두로 하는 대사업이 정치적 경제적 기초는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