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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대 악녀(惡女) 이야기 3--서태후

간천(澗泉) naganchun 2009. 10. 15. 15:21

 

중국 3대 악녀(惡女) 이야기 3

 

권력 독점욕의 화신 서태후(西太后)

 

 

 

기록에 의하면 서태후(1835~1908)는 1835년 10월 10일에 북경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행정(杏貞)이다. 아버지는 혜징(惠徵)이라 하고 만주인의 중견 관료로서 공문서를 작성하는 서기관이었다. 14세 연상의 오빠가 있고 동생으로 여동생(후 광서제의 생모)과 남동생이 있었다. 서태후는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여자로서 공문서를 읽고 쓸 수 있었다 한다.

 

1. 자금성 입궁과 황제 함풍제의 죽음

 

1851년 17세 때에 북경 자금성에 가서 황제의 황후와 귀비를 선발하는 선수녀(選秀女) 행사에 응모했다. 당시 황제는 함풍제(咸豊帝)로 20세였는데 처음으로 여는 선수녀였다. 선수녀에 응모할 수 있는 사람은 일정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의 딸로서 만주족(여진족)에 한했다. 한족(漢族)의 딸은 제외되었다. 이는 황실의 혈통을 지킨다는 뜻이 있었다.

그 이듬해에 그녀는 합격하여 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는 귀인(貴人)이라는 계급으로서 합격자 10명 중 3위였다. 그녀가 궁에 들어가서 얼마 없어 황후가 결정되었는데 그는 16세인 수녀였고 그녀는 후궁으로서 18세였다.

궁에 들어가서 3년 후 21세인 서태후는 함풍제의 첫 아들을 낳았다. 함풍제에게는 아들이 그 하나뿐이었다.

서태후가 아들을 낳고 얼마 후에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나 영국군이 북경으로 쳐들어오자 공친왕(恭親王=함풍제의 동생)을 시켜 영불군과의 화친 교섭에 당하도록 하고 황제는 북경을 탈출하여 열하(熱河)의 별장으로 도피하였다. 이에 서태후도 동행했다.

함풍제는 여색과 아편에 빠져서 국정은 소홀히 하였고 스스로 극본을 만들어 궁중에 극단을 초대하여 매일 5시간을 극을 관람하는 데에 몰두 하였다. 원래 결핵을 앓아 허약한 체질이었는데 천연두에 걸려 마침내 1861년 31세로 열하에서 서거했다.

 

2. 집권하기

 

함풍제가 서거하자 후계문제를 두고 황자 재순(載淳)의 생모인 서태후(의귀비)와 함풍제의 고명을 받은 재원(載垣), 단화(端華), 숙순(肅順) 고명대신들 사이에 일력이 있었다.

서태후는 황후인 뉴호록(鈕祜祿=동태후)과 황제의 아우인 공친왕(恭親王) 혁소(奕訴)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1861년 10월 26일 함풍제의 관을 열하에서 북경으로 운구하게 되었는데, 서태후는 숙순(肅順)으로 하여금 운구를 호송하도록 하고 자신과 동태후와 재순(載淳=황태자)이 먼저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 가자 즉시 공친왕 혁소(恭親王 奕訴)를 시켜 숙순을 체포하고 11월 8일에는 재원(載垣), 단화(端華)는 자진하도록 하고 숙순을 처형하였다.(辛酉政變-1861년)

1861년 북경에 귀환하자 서테후의 소생인 황자 재순(載淳)이 6세에 동치제(同治帝)라 하여 즉위하였다. 서태후에게는 황태후(皇太后)의 칭호가 부여되었다. 본래 함풍제의 황후는 거처가 자금성 동쪽에 있어서 동태후라 하고 동치제의 생모인 그녀는 서쪽에 있어서 서태후라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태후는 정치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공친왕과 동태후와 서태후가 삼두 정치로 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태후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사실상 공친왕과 서테후 2두정치가 되었다.

1874년 18세인 동치제가 혼인을 하면서 친정을 하려 하였으나 1875년에 천연두를 앓아 요절했다. 다시 후계문제가 생겼다.

통상적으로 황위 계승은 동세대에서는 안 되게 되었었다. 곧 <재(載)>자 항렬의 형제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 그러나 서테후는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다른 황족 중에서 가까운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순친왕혁환/醇親王奕譞의 자) 5세인 재첨(載湉)을 1875년에 광서제(光緖帝)라 하여 즉위시키고 동태후와 함께 수렴청정하며 권력을 독점했다.

광서제가 17세가 되었을 때 친정을 하게 하였는데 그러고 나자 서태후와 광서제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마침 1881년에 동태후가 45세로 서거하고 청불전쟁의 책임을 물어서 공친왕을 실각시키고서 서테후가 절대적인 지위를 확보하였다. 1888년에 광서제의 황후로 자신의 조카딸을 천거했다. 후의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이다.

3. 광서제의 유폐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서태후에 대하여 광서제는 사사건건 강행책을 주창하였다. 광서제는 일본을 본받아서 외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단행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보수파 정치가의 파면, 수도를 북경에서 상해로 이전, 복장제도를 고친다는 등이어서 합리적인 개혁안이었는데 너무 성급하게 나온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보수파의 중심이었던 서태후는 격노하여 마침내 서태후는 광서제를 체포하여 남해의 자그만 섬에 유폐시키고 말았다.

4. 의화단 지지

이 무렵 산동성에서는 외국의 침략을 원망하는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의화단(義和團)이라는 비밀결사였다. 이들은 부청멸양(扶淸滅洋=청조를 지키고, 외국인을 멸한다)의 기치를 들고 북경으로 행진했다. 이윽고 이 운동은 화북 전지역으로 퍼졌다.

서태후는 의화단을 지지하고 의화단과 함께 하여 외국인 세력을 배제하려고 열강제국에 대하여 선전포고하였다. 이때 서태후는 외국인 1명을 죽이면 은50량을 상금으로 준다고 선포했다 한다.

마침내 의화단이 북경에 진출하여 외국공사관을 포위하고 일본영사관 서기관을 체포하여 살해하고 회의 교섭에 나선 독일 대사는 노상에서 무참히 살해되기도 하였다. 결국 연합군(영, 미, 러, 불, 독, 오, 이, 일=8개국)이 북경으로 진군하여 의화단과 청군을 격파하고 자금성을 접수했다. 이들은 광서제를 새로 옹립하고 서태후를 체포하여 전범으로서 재판에 넘길 계획이었다.

 

5. 서태후의 도망과 진비 살해

이에 1901년 서태후는 북경을 탈출하여 1,400킬로나 떨어진 산서성 서안으로 도망쳤다. 66세였던 그녀는 농민으로 변장하고 인질로서 광서제를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광서제가 총애하는 진비(珍妃)를 우물에 던져 넣어 죽인 것이다.

진비는 아름답고 총명한 왕비로서 항상 광서제의 개혁안을 지지하였다고 한다. 25세인 그녀는 때로는 환관 복장을 하고서 광서제의 마음을 위로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서태후는 이 진비가 마음에 꺼렸던 것이다. 유폐된 섬에서 2년 만에 끌려 나온 진비에게 서태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황제는 지금부터 북경을 떠난다. 도중에는 적들이 많다. 그대는 데려가지 못한다. 만일 황실의 체면을 더럽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대는 여기서 자진한다.> 이에 새파랗게 질린 진비는 <황제는 북경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도망치는 것은 만주족의 선조를 욕보이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서태후는 격노하고 <입을 다물라, 죽으러 가는 몸이 무슨 말을 하는 게야.> 그리고 <그대는 여기서 죽으면 되는 거야.> 진비는 무릎을 꿇고 <황후님 황후님 저를 용서하여주십시오. 결코 잘못은 저지르지 않겠습니다.>서태후가 빨리 일을 처리하라는 눈치를 주자 환관 최옥귀(催玉貴)는 진비에게 다가가서 꿇고 있는 진비를 끌어안고 천천히 우물로 향해 걸어갔다. 그 우물은 입구가 매우 작고 깊은 마른 우물이었다. 진비는 그 우물에 머리부터 거꾸로 던져졌다고 한다. 그녀는 던져지기 전에 환관 이연영(李蓮英)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한다. 그 후로 서태후는 그 귀에 살려달라는 소리가 떠나지 않고 그녀의 망령에 매우 괴로워했다고 한다.

서태후는 밤마다 머리맡에 서있는 진비의 망령을 두려워하여 이듬해 북경으로 돌아오자 바로 그녀의 유해를 거두어 청왕조 묘역에 정중하게 개장했다.

그 후 그녀는 생각을 바꾸어 청군에 명령하여 외국군과 협력하여 의화단을 공격하라고 했다. 한편 북경에 입상한 연합군은 일부 대신을 전범자로 처형하고 방대한 배상금을 청구했다. 그 액수는 40년 분할로 4억 5천 만 량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대대로 물어야 할 정도였다.

 

6. 서태후의 귀경

 

열강제국은 방대한 중국을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토착 권력자에게 맡기고 차라리 간접 지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서태후를 인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열강제국은 서태후를 <드래곤 레이디(Dragon Lady)>라 칭했다.

1년 후 1902년 서태후는 북경으로 귀환했다. 그것은 마치 개선장군이 개선하는 것처럼 화려한 것이었다.

그녀는 도중에 연극을 관람하기도 하고 성찬을 먹으며 북경에 돌아온 것이다. 탈출할 때 농민으로 변장한 초라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자금성에 이르는 거리는 새롭게 포장되어 노면은 거울처럼 닦아졌고 부서진 건물은 수리되어 곱게 장식되었다. 이러기에 막대한 공사비를 지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민중의 환영을 받는 점으로 봐서는 꽤나 카리스마적인 존재였다 할 것이다. 그런데 정치에 대한 신념이 있다기보다 권력에만 집착하여 그 때 그 때 실권을 잡기에 혈안이 되었었다.

처음에는 의화단을 지지하다가 외국군이 북경으로 쳐들어오자 1, 400킬로나 떨어진 곳으로 도피했으나 외국의 힘에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서는 의화단을 공격하도록 하고 외국을 비호하게 되었고 북경 입성 후에는 서양에 경도되기 시작하였다.

발레나 월츠를 장려하고 파리의 최근 패션을 즐겼다 한다. 이로써 보면 단순한 여성적 감정에 뿌리를 내리고 논리나 사고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태후의 권력이란 호화로운 의상으로 사치를 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처럼 호화로운 생활로 낭비의 결과 중국의 식생활이나 가극이나 자수 등이 민중에게 침투되어서 문화적으로 크게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7. 서태후의 죽음과 그 후

 

1908년에 광서제가 서거하고 서태후는 후계자로 부의(傅儀)를 선통제(宣統帝)라 하여 옹립하고 동년에 74세로 서거했다. 3년 후 1911년에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신정부를 선포하고서 1개월 안에 청왕조는 붕괴되었다. 200여 년간의 대청왕국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서태후는 북경 동쪽에 있는 청왕조 역대 황제의 묘역인 육묘(陸墓)에 묻혔다. 그런데 20년 쯤 지난 후 중화민국 병사들에 의하여 도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북경 교외에 주둔하고 있는 국민혁명군 12군 소속 부대가 부장품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그것은 막대한 재보였다고 한다. 그 부장품을 운반하는 데에 수 십 대의 마차가 필요했다고 한다. 그 내역은 금은 불상 100체 이상, 큰 방울의 진주 1만 2천 알, 4천 개의 진주로 장식된 이불, 대량의 비취 등 그야말로 보석의 산이었다.

서태후의 묘 일부를 폭파한 병사들은 지하의 묘실에 침입하였다. 서태후의 목관을 부수고 연 병사들은 유해를 관 밖으로 끌어내었는데 유해는 탄력이 남아있는 대로 잠자듯이 있었다 한다. 병사들이 그 유해의 입을 열고 입안에 담겨있는 구슬을 빼내었다. 다시 유해에서 옷, 속옷, 구두까지 벗겨 나체가 되게 하여 몸에 보석이 있을 것으로 알고 뒤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