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 이야기(2)
2. 고려와 조선의 환관
1) 고려의 환관
환관제도
신라시대에도 환관제도가 있었다 한다. 그러나 기록이 상세하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처음 왕 가까이에서 신변을 호위하고 모시는 내시직(內侍直)에 재예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자제(世族子弟) 또는 시문(詩文) 경문(經文)에 능한 문신을 임명했으나 18대 의종(毅宗) 이후 점차 환관을 임명하였다.
즉, 고려 초부터 인종 때까지는 임용 대상자의 신원을 조사하는 서경제도(署經制度)가 원활히 운영되어 환관의 임명은 허용되지 않고 액정국(掖庭局)에 속하여 문반, 무반이 아닌 제3직인 남반(南班) 7품까지밖에 오르지 못하는 한품직(限品職)으로서 궁중의 잡역을 맡았었다. 그 뒤 몽고 간섭기에 들어서 대간 기능이 마비되고 왕권이 외세에 의존하여 전제하게 되자, 한품직이었던 이들이 발흥하게 되어 24대 원종 때에 환관이 6품 이상의 조관(朝官)에 임용되어 한품제의 법제적인 장벽이 제거되었다.
환관의 횡포
서기 1300년 이후 25대 충렬왕 때에는 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환관 수명을 친정인 원나라 세조(世祖)에게 바친 이후로는 환관의 진공 요구가 빈번하였다. 원나라에 들어간 환관들은 원나라 황실의 총애를 받아 원나라의 사신으로 와서 영향력을 행사해 고려로부터 봉군되기도 하고, 친족들까지 득세하게 하였다. 또한, 국왕의 권력을 이용해 자기의 출신 연고지역을 속현, 부곡에서 일반 군, 현으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본국을 중상하고 악질적인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자도 있었다. 충선왕 때의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 방신우(方臣祐), 이대순(李大順), 충혜왕 때의 고용보(高龍普) 등은 가장 심하였다. 특히 백안독고사는 원나라 영종(英宗)에게 참소하여 원한을 품고 있던 충선왕을 토번(吐蕃)으로 귀양을 보내게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환관이 궁중의 요소요소에 배치되었고, 대간의 권한을 대신해 왕의 측근에서 정치에 개입하고 대토지를 점유하는 등, 정치 경제 질서를 문란하게 하였다. 공양왕 때에는 국왕의 언약도 환관의 세력 앞에 실행되지 않을 정도였으며, 관직을 받은 환관은 더욱 증대되고 품계는 급격히 상승되었다. 이러한 고려 말의 환관세력의 정치적 경제적 부작용은 권문세가의 그것과 더불어 고려사회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구실을 했다.
환관이 되는 길
환관이 되는 길은 특수사정에 의해 강제적으로 거세된 경우와 우연한 사고로 인해 된 경우, 선천적인 경우, 그리고 스스로 또는 부모, 기타 보호자에 의해 거세된 경우를 들 수 있다. 중국에서는 죄인에 대한 형벌제도인 궁형(宮刑)에 의하여 거세하여 궁중환관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형벌제도상 궁형이 시행되지 않은 대신 훈제(燻制) 방법으로 죄인을 거세하였다. 즉, 원나라에 환관을 진공하기 위하여 봉건적인 가혹한 법규 외적인 강제책으로 실행했으리라 추측된다. 대상자는 사회적으로 무력한 천민층이었으며, 강제적인 거세를 자행하였다. 한편 스스로 거세하는 경우는 빈곤한 경제 사정이나 지방 관료의 가혹한 수렴 및 부역을 피하고 환관으로의 향락과 득세를 위해, 또는 가노가 주인의 혹독한 탄압을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으로, 또 군역을 피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충렬왕 이후에는 원나라에 아부하는 환관의 위세와 국왕의 은총은 환관에 대한 동경심을 일으켰다. 심지어 권문세가들도 득세를 위해 아버지는 아들을, 형은 동생을 거세해 원나라 환관으로 들여보내기도 하였다.
환관의 경제적 기반과 국가 재정의 피해
환관의 경제적 기반은 그들의 직임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들은 예종 때부터 궁중내탕(內帑)의 출납에 관여했고, 의종 때에는 한층 더 심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지위 상승과 함께 창고 궁사(宮司)의 별감(別監)에는 모두 환관이 임용되었다. 이로써 궁중 사장고(私藏庫)의 실권을 장악해 경제적 세력기반을 확립하였고, 내부의 재물을 사취해 경제력을 증가시켰다. 이것은 결국 고려 왕실재정의 약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토지 지급의 법적 혜택이 없었음에도 왕실의 총애를 받는 집단으로 등장하면서 국왕으로부터 사패(賜牌)에 의한 사전 수여와 특권에 의하여 대토지를 강제로 점유해 장원형태의 특수귀족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왕부 재물의 절취, 사주행위(私鑄行爲), 국왕으로부터의 특사(特賜), 엽관 행위에 따른 다액의 뇌물수입 등으로 경제력을 확대하였다. 한편 빈번한 화원(花園)의 설치 및 사원(寺院)의 조영 등에 필요한 화초, 궁중사치물 등을 구하기 위해 송나라 상인들과의 상행위로 부정 이윤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환관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고려왕조의 재정을 약화시켰다.
2) 조선의 환관
환관의 직무와 교양
조선시대의 환관은 내시부에 속했으며, 지근에서 왕을 모시는 임무를 띠고 대전(大殿), 왕비전, 세자궁, 빈궁전 등에서 명령전달, 궐문수직 및 청소 등 잡무를 맡아 보았다. 이러한 환관직은 관계상 일반 관직과 구별되고 엄격히 규제되어 고려와 같은 큰 폐단은 없었다. 또한 자질향상을 위해 사서(四書) 소학(小學)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을 교육받았으며, 매달 시험을 치러야 했다. 성적평가는 특별근무일수로 환산되어 정상적인 근무일수와 함께 고과(考課)의 기준이 되었으며, 1년에 네 번 근무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교육과 성적평가는 한편으로 이들의 통제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왕, 왕비 등의 지근에 있음을 기화로 경제적 이권을 챙겼으며 정치세력과도 연결되어 궁중의 질서를 어지럽히기도 하였다.
환관의 사생활
조선시대 수양자법(收養子法)에는 동성(同姓)에 한해 양자를 삼도록 되었으나 환관에 한 해서는 그 가계(家系)의 단절을 배려해서 이성(異姓)의 양자를 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환관도 처첩을 거느리기도 했으며, 환관의 아내를 환처(宦妻) 또는 동정녀(童貞女)라고 하였다. 그리고 양자에 의해 이어진 내시 종파(宗派)는 계림파(桂林派), 판곡파(板谷派), 강동파(江東派), 장동파(壯洞派), 과천파(果川派), 서산파(西山派) 등이 있었다.
그리고 환관은 궁 안에 거주하는 장번(長番) 환관과 궁궐 가까이 종로구 봉익동과 효자동에 집단 거주하면서 경복궁, 창덕궁, 종묘에 출퇴근하는 출입번(出入番) 환관이 있었다. 특히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장번환관은 대전 장번내시로 대감 호칭을 받을 만큼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하였다. 한편 환관은 모시던 왕이 세상을 떠나면 궁궐 밖에 나와 살았으며, 죽을 때까지 소복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죽어서도 집단적으로 묻혔는데, 지금의 도봉구 쌍문동, 파주시 교하면, 양주군 장흥면 등에 묘지군이 있다. 이 환관제도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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