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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월요단상

아버지의 누나 ; 큰 고모

간천(澗泉) naganchun 2013. 4. 22. 04:39

 

아버지의 누나 ; 큰 고모

 

 

 

새싹이 돋아나고 그 이파리들이 촉각을 곧두세우고 공기 속으로 기지개를 켜는 이 즈음에 큰 고모가 돌아가셨다.

친지들 곁에, 그 얼마나 가까이 살아야 생사고락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일까? 마음이나 정성이나 관심의 끈을 어찌 부여잡고 있어야 그게 가능할 것이가?

인연의 릴레이에서 큰 고모가 나에게 건네 준 바통은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지만 그게 언제 이어 받았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전에 뵙고는 만나지를 못했는데 아프시다는 소식만 듣다가 이제 가시고 말았다. 언제 본 모습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 정체되어 있는 모습으로 고모를 추모한다.

 

큰고모. 앙상한 뼈마디가 두드러지지만 항상 웃는 모습이셨다.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 아닌 타지로 시집가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시지만 억세지 않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검게 그을리고 주름이 깊게 폐인 얼굴 주름에서 하회탈을 연상시키는 분이다.

조카가 고모를 추억함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각 사람이 자기 살기 바빠서 고모의 삶까지 챙기고 살아갈 여유는 정말 가지지 못했다. 십 여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나이 들고 몸도 쇄약해지고 아주 많이 쪼그라들었음이 분명하다. 보지 않아도 선하다. 마르고 왜소하지만 연약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너무 가녀린 성품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어찌 이 험한 세상을 살아오셨는가 말이다.

 

큰 고모에게는 동생이 여럿 계시다. 그래도 고모가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동생들 중에 아버지는 유일한 남동생이다. 지성과 감성이 풍부한 우리 아버지는 지금 고모의 죽음으로 그 마음이 얼마나 쓰라릴까 생각한다. 아버지는 큰 누님의 지나온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일찍 홀로된 고단한 여인의 인생에 자신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를 생각하며 안타까워 했을 것이다. 누님에게 많은 위로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후회의 아픈 상처를 더 후벼 파면서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는지 모른다. 당신이 직접 잘 챙겨주지 못한 심정으로 형제애가 두터운 아버지에겐 유독 큰 시련의 시간들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고모를 몇 번이나 만나 어느 만큼의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게 될까. 얼마나 고모와 친해지고 시간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가족이 많은 집에서는 그 집안의 경조사에 만나는 일이 전부일 것이다.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는 가족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한국 가정에서는 평생 십 여회 안팎의 만남일 것이다. 나머지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소속되어 있다는 그것 만으로 항상 뭔가 연결되어 있고 만났던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우리는 그리 많이 자주 오래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혈족은 마음으로 피가 통하는 그런 관계다. 그래서 이리 마음이 아픈 애틋한 사랑인 것이다.

 

큰고모는 편안히 하늘나라로 가실 것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분들은 나이 드신 우리 가족의 한 분의 자연스러운 삶의 마감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그녀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별하게 아버지는 큰고모에 대해서 추모하고 있을 것이다. 큰고모를 추억하는 우리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는 그 가족에 대한 정으로 당신이 더 많이 마음 아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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