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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학자

28, 큐리 부인 이야기 5-2

간천(澗泉) naganchun 2025. 1. 16. 03:12

위대한 여성과학자

28, 큐리 부인 이야기 5-2

 

5, 시련 속에서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

 

2) 비방 속에 얻은 두 번째의 영예

 

 

연구에 복귀한 마리가 처음으로 한 일은 오랜 동안 피엘을 지원해준 켈빈경(William Thomson、켈빈남작 1824년6월26일~1907년12월17일=영국 물리학자)이 논파한 것이었다. 일부러 런던타임스를 선택하여 발표한 켈빈경의 이론이란 라듐은 원소가 아니라 화합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실험 결과로 반론하려고 큐리 부처의 동료들과 함께 우란의 약 300배의 방사능을 가진 순수한 라듐 금속 0.0085 그램의 분리에 당하여 1910년에 분리에 성공하여 경의 오류를 입증하였다. 동년 2월 25일 시아버지가 사망했다. 아들이 데리고 온 이국의 여성을 아무런 편견도 없이 받아들여서 갖은 곤란을 당하면서도 의지가 되어준 시아버지였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좋은 할아버지였다. 그의 죽음은 온 가족을 슬픔에 빠지게 하였다.

 

 

 

 

연구소는 1907년부터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년11월25일~1919년8월11일=스코틀랜드 태생인 미국 실업가)의 자금원조도 있어서 10명 정도의 연구원을 두게 되었다. 이해에는 그때까지의 연구를 매듭짓는 <방사능개론>을 출판하고 또 라듐 방사능의 국제기준단위를 정의하는 일도 했다. 1911년에 결정된 이 단위는 큐리 부처의 성을 따서 <큐리>(기호 Ci)로 이름 붙였다.

 

동년 주위에서 추천한 과학아카데미회원 후보가 된 일이 마리를 번거롭게 하였다. 공석을 둘러싸고 대립 후보가 된 에드아드 브란리(Édouard Eugène Désiré Branly 、1844년10월23일~1940년3월24일=프랑스 물리학자, 발명가)와의 사이에서 지지자에 의하여 두 진영이 형성되어버렸다. 자유주의자인 마리 대 경건한 가톨릭신자인 브란리, 폴란드인 대 프랑스인 그리고 여성 대 남성이다. 특히 일찍이 1902년에 피엘을 패하게 하여 회원이 된 인물이 여성 회원에 맹 반대하였다. 다시는 가톨릭의 투표권자들에 대하여 마리가 유태인이라고 하는 유언비어까지 흘렸다. 엑셀시오르(Excelsior) 지 등은 일변에서 마리를 공격하고 우익계 신문에서는 그녀의 영예는 피엘의 업적에 편승한 것일 뿐이라는 기사까지 실었다.

 

1911년 1월 23일 아카데미회원의 선출 투표가 행해졌는데 모여든 기자들이나 관중으로 회장은 혼란했다. 저녁에 판명된 결과는 근소한 차로 브란리가 선출되어 연구소의 면면은 마리 본인을 제외하고 낙담했다. 이때에는 마리는 요청 받은 몇 개의 외국의 아카데미회원이 되어 있었다. 담담한 마리였지만 수기에는 프랑스아카데미의 낡은 인습을 싫어하고 있었던 것이 적혀 있어서 다시 후보가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관지에의 논문 게재도 거부하여 아카데미와 완전히 결별하였다. 후의 일이지만 프랑스의 공적 기관이 정식 영예를 부여한 것은 1922년에 파리의학아카데미가 의료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전례를 뒤집고 그녀를 회원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마리는 연구에 돌아와서 헤이케 가메루링그 오네스(Heike Kamerlingh onnes, 1853년9월21일~1926년2월 21일=네덜란드 물리학자) 와 협동으로 저온환경에서 라듐 방사선연구를 구상하였다.

그런데 유명인의 스캔들을 팔아서 구매욕을 자극하던 당시의 신문이 11월 4일부 기사에서 마리의 불윤 기사를 대대적으로 게재하였다. 상대는 5세 연하로 피엘의 제자 파울 랑즈빈(Paul Langevin、1872년1월23일~1946년12월19일=프랑스 물리학자,)이다. 그는 기혼이었는데 부부간에 별거하여 재판까지 하였다. 마리는 사생활의 문제로 고민하는 랑즈빈의 상담을 하는 사이에 친밀해졌다. 1911년 10월 말에 브룻셀에서 열린 솔베이회의【The Solvay Conferences on Physics,=솔베이법으로 유명한 어네스트 솔베이 Eernest Solvay, 1838년4월16일~1922년5월26일=벨기에 화학자, 실업가, 자선가)와 월터 헤르만 네른스트(Walther Hermann Nernst, 1864년6월25일~1941년11월18일=독일 화학자, 물리화학자. 네른스트식이나 열역학 제3법칙 발견)가 1911년 처음으로 개최한 일연의 물리학에 관한 회의. 1922년부터는 화학분야회의도 개최됨)】에는 두 사람이 함께 출석하여 마리는 논문을 발표한 젊은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년3월14일~1955년4월18일=독일 태생의 유태인 이론물리학자)에게 츄리히대학 교수직에 추천장을 쓰곤 하고 있다.

 

그 사이의 보도는 랑즈빈에게 보낸 마리의 편지를 폭로하여 타인의 가정을 파괴하는 부도덕한 여자라고 마리를 규탄하였다. 그 후 보도는 이어져서 다시 그녀를 유태인이라든지 피엘은 아내의 불윤을 알고 자살한 것이라는 등 있을 수 없는 일을 연일 게재하였다. 끝내는 기자가 브룻셀에까지 따라갔기 때문에 마리는 회의의 폐막을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택에 돌아오자 거기는 군중으로 둘러싸여 돌을 던지는 자도 있었다.

마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탈출하여 친한 에밀 보렐(Felix Edouard Justin Emile Borel, 1871년1월7일~1956년2월3일=프랑스 수학자, 정치가)부처의 집으로 가서 그의 비호를 받았다. 정부의 공공 교육대신은 보렐에게 마리를 비호한다면 대학 교수를 파면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보렐 부처는 일체 개의치 않았다. 보렐부인 마르그리트(Marguerite)는 잔 페란(Jean Baptiste Perrin, 1870년9월30일~1942년4월17일=프랑스 물리학자, 192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교수의 딸로 그녀는 마리를 해친다면 다시는 얼굴도 보지 않는다고 아버지를 거꾸로 위협하였다. 소동은 여러 곳으로 비화하고 있었다.

 

이 소동의 와중인 1911년 11월 7일 스웨덴에서 노벨화학상을 수여한다는 전보가 왔다. 이유는 <라듐과 폴로늄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화합물의 연구에 있어서 화학에 특필할 만한 공적을 올린 일과 신원소 발견>을 들어서 평가하고 있었다. 마리는 처음으로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가 되고 또 다른 분야(물리학상, 화학상)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의 스캔들을 이유로 스웨덴 측에서도 수여를 보류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마리는 의연히 수상할 뜻을 밝혔다. 그리고 이번은 스톡홀름에 갔다. 기념 강연에서 마리는 피엘의 업적과 자신의 일을 명확히 구별하고 이 성과의 발단은 두 사람의 공동 연구에 있었다고 했다. 이것은 분명히 앞에서 말한 프랑스 우익신문의 중상 기사 <그녀의 영예는 피엘의 업적에 편승한 것일 뿐>이라는 기사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였다.

 

수상 후 12월 29일 마리는 우울병과 신염으로 입원하였다. 일시 퇴원하였으나 1912년 3월 재입원하여 신장 수술을 받았다. 그 후 교외에 집을 얻어서 요양했는데 6월에는 장기요양소에 들어갔다. 8월에는 다소 회복하여 여성 물리학자 하사 에아톤 (Hertha · Eaton) 의 초대에 응하여 영국에 갔다. 2개월 간 지난 후 10월에 파리에 돌아와서 새로운 아파트를 빌어서 이사했다. 그 사이에 마리는 줄곧 스크로두스카(Skłodowska)란 성을 썼는데 매스컴은 여전히 무엇인가 꼬투리를 잡아서 두들기는 일이 많았다. 그런 한편 타국이 마리를 평가하면 프랑스의 선진성의 상징이라 하여 좋은 기사만 싣기도 하였다. 마리는 저널리즘을 싫어했다.

 

마리로서는 괴로운 시기에 그녀를 지지해 준 것은 많은 지인과 가족들이었다. 1912년 5월에는 헨리그 센큐비치(Henryk Adam Aleksander Pius Sienkiewicz, 1846년5월5일~1916년11월15일=폴란드 소설가)를 단장으로 하는 폴란드의 교수련대표단이 마리를 방문하여 바르샤바에 방사능연구소를 설립하는데 그녀가 소장으로 일 해달라고 타진하였다. 1905년의 러시아 제1혁명 이후 제정러시아의 압박이 누그러지고 무엇보다도 마리의 명성이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는 점이 컸다. 이 요청을 마리는 숙고하여 본래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던 일 곧 피엘로부터 물려받은 연구소를 그에게 상응하는 것으로 만들 것을 생각했다. 이리하여 폴란드 귀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파리에서 지도할 것을 수락하였다. 1913년 바르샤바(Warszawa)의 연구소 개소식에 출석한 마리는 처음으로 폴란드어로 과학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여름에는 건강도 회복되어 일가는 스위스로 여행을 하는 등 좋은 시골에서 휴식을 취하자 마리는 다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914년 7월에는 남편의 이름을 딴 피엘 큐리의 거리에 라듐연구소의 새로운 건물 큐리동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실험에는 당하지 못하였다.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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