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여성과학자
28, 큐리 부인 이야기 5-1
5, 시련 속에서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
1) 남편 피엘 큐리의 죽음
1906년에 들어서 교수직과 함께 새로운 큐비에(Cuvier)가의 실험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좁고 교통이 불편한 교외이지만 조수와 사환이 더해진데다가 실험주임으로는 마리가 임명되어 급여도 지급 받았다. 큐리 부처는 여전히 바빴다. 마리는 세브르여학교의 교사를 계속하고 피엘은 과학자를 기르고 대학교수로서 여러 가지의 잡무에 쫓기고 있었다.
그것은 4월19일 목요일에 일어났다. 비가 올 듯한 날에 피엘은 여러 가지 예정을 마치고 마차가 드나드는 좁은 도피누(dauphine)거리를 횡단하고 있을 때 부닥친 마차에 깔려서 사망했다.
관중은 피해자가 유명한 과학자라는 것을 알고 곧 대학에 전화로 연락했다. 학부장과 교수인 장 페린(Jean Baptiste Perrin, 1870년9월30일~1942년4월17일=프랑스 물리학자)이 큐리 일가를 심방하였다. 그때 마리는 집에 없어서 시아버지가 그들을 맞아 침통한 시간을 기다렸다. 오후 6시 이레느(Irène Joliot-Curie、1897년9월12일~1956년3월17일=프랑스 원자물리학자, 큐리의 장녀)를 데리고 귀가한 마리는 그 소식을 듣고 얼어서 잠시는 누구의 질문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시신과 유품을 받은 마리가 한 없이 눈물을 흘린 것은 이튿날 달려온 시아주버니 자크의 모습을 본 때였다. 이 불의의 사고는 세계에 보도되었다. 21일 생가인 소에서 장례식이 행해졌다. 정부의 대표단 파견이나 조사나 행렬도 마리는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질소하게 식을 거행했다. 시아버지나 시아주버니는 감정이 가라앉은 그녀를 걱정하였다. 그 당시 마리의 일기에는 <같은 운명을 줄 마차는 없을 것인가.>하고 적고 있다. 그 후도 그녀는 침통하게 가라앉은 채로 때때로 비명을 지르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여서 일기에는 비통한 말이 이어졌다.
남편 피엘 큐리
5월 13일 파리대학 물리학부는 피에르를 위하여 준비한 직위와 실험실에서의 제반 권리를 마리를 위하여 유지할 것을 결정하였다. 장례식 이튿날 신청한 국가의 유족연금은 단호히 거절한 마리였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회답을 보류하였다. 여러 가지가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이윽고 그녀는 <무거운 유산>을 이어받고 피엘에게 걸맞은 연구소를 만드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결단하고 대학의 직위와 실험실의 후임을 수락하였다. 이리하여 파리대학 최초의 여성교수가 탄생하였다.
여름 기간 주거를 피엘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대학 강의 준비에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1월 5일 오후 1시 30분 마리는 만뢰의 박수를 받으며 소르본 교단에 섰다. 어떤 인사말이 나올 것인지 흥미진진하게 기대하는 학생과 청중 앞에서 마리가 처음으로 한 말은 피엘이 최후가 되어버린 강의를 맺는 한 문장이었다. 담담하면서 그의 뜻을 이어 받는 마리에게 청중은 감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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