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여성과학자
28, 큐리 부인 이야기 6-1
6, 세계대전과 세계의 반응
1) 제1차 세계대전
전쟁은 연구소 스텝들도 병사로 소집하여 남성으로 남은 자는 지병을 가진 기계 기사뿐이었다. 딸들을 브류타뉴(Bretagne)에 있게 하고 마리는 파리에 남았다. 9월 2일에는 독일군의 공습이 파리에까지 미치고 마리는 정부의 요청으로 연구소가 소유하는 귀중한 순수 라듐 금속을 보르도(Bordeaux=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도시)에 소개시키기 위하여 기차에 탔다. 그러나 그녀는 이 비상사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곧 파리로 돌아왔다.
윌헤름 렌트겐(Wilhelm Conrad Röntgen、1845년3월27일~1923년2월10일=독일 물리학자. X선 발견자)이 1895년에 발견한 X선은 이미 X선 촬영에 의하여 의료에 공헌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그것을 실시할 시설이 매우 적다는 것을 마리는 알고 있었다.
수술에 총탄이나 파편 등 인체에 박힌 이물을 사전에 확인할 수 있다면 부상자의 생존율이 높아진다. 그녀는 X선 연구에 관여한 경험은 없었으나 대학 강의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마리는 대학이나 제조업자 등을 순회하여 필요한 기재를 조달하고 복수의 병원에 그것을 설치하여 교수나 기사들에게 의뢰하여 조작하게 하였다.
렌트겐( X선 촬영설비 ) 차에서
거기에 조용한 연구자의 모습은 없었다. 마리는 군이 X선 촬영설비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이동가능한 자동차에 설비와 발전기를 탑재하여 1914년 8월 무렵부터 병원을 순회하기 시작하였다. 마르누회전(Battle of the Marne=1914년9월 벨기에를 돌파한 독일군을 프랑스군이 마르누호반에서 멈추게 한 제1체 세계대전 중의 전투) 의 부상자 치료에 위력을 발휘한 이 이동 렌트겐차는 군 안에서 <작은 큐리>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함으로써 1대로서는 부족하므로 마리는 공적, 사유의 차를 모아 개조하였다. 유력자 부인들은 협력적이었으나 군이나 행정기관은 난색을 표하는 일이 많았다. 마리는 관리들을 설득하여 조달이나 통행 허가를 받고 기재 조달을 위하여 정부로부터 적십자방사선국장이라는 직함을 얻어 활동하였다.
미숙한 이용자를 위하여 설비 사용 매뉴얼을 준비하고 부상자의 치료에 효과를 올렸다.
마리가 설치한 렌트겐 설비는 병원이나 대학 등 200개소에 더해서 자동차는 20대가 되었다. 마리 자신도 해부학을 공부하고 자동차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고장 시에 대응하기 위하여 자동차 정비에 대해서도 습득하였다. 이렌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자신도 이에 참가하고 싶다고 나와서 마리는 이를 승인하였다. 다시 모녀는 저축한 상당액을 전쟁 채권 구입에 충당하고 다시 노벨상을 포함한 다수의 메달을 기부하려고 하였다. 단 후자는 담당 관리가 거절하였다.
렌트겐 장치에는 보다 효율적인 라돈을 쓰게 되어서 보르도에서 가져온 라듐금속을 써서 마리는 튜브에 라돈기체를 채우는 작업도 했다. 이것은 마리에게 X선 피폭을 일으켜 후에 건강상태에 악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고 있다.
1918년 11월 전쟁은 끝났다. 전쟁 채권은 쓰레기가 되어서 일가의 저축은 많이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는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 일보다 기쁜 것은 1919년에 고국이 타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폴란드 제2공화국이 건국된 것이었다. 그 초대 수상은 파리 학생 시대의 친구 이그나시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 1860년11월18일~1941년6월29일=폴란드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정치가, 외교관, 수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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