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여성과학자
28, 큐리 부인 이야기 4-2
영광의 빛과 그림자
방사성물질의 연구는 원래 마리의 박사학위 취득을 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다망하여 그 준비에 당하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그것도 겨우 줄여서 앙리 베큐렐이 뒷받침하여 1903년 6월에 논문심사를 받았다. 남편과 시아버지, 언니,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3명이 논문심사 교수진은 마리에게 파리대학 이학박사(DSC)를 수여하였다. 그날 저녁 회식에는 지인을 비롯하여 파리를 방문하기 위하여 들른 어네스트 라자포드(Ernest Rutherford, 1st Baron Rutherford of Nelson, 1871년 8월 30일~1937년 10월 19일 ) 부처도 함께 했다.
큐리 부처의 업적을 가장 일찍이 평가한 것은 영국이었다. 1903년6월 왕립연구소는 큐리 부처를 정식으로 런던에 초청하여 강연을 의뢰하였다. 피엘은 실험을 섞은 강연으로 갈채를 받았다. 마리는 왕립연구소 회합에 처음으로 출석한 여성이 되었다. 켈빈경(William Thomson、켈빈남작Baron Kelvin of Largs, 1824년6월26일~1907년12월17일, 영국 물리학자)이나 윌리암 크루크스(Sir William Crookes, 1832년6월17일~1919년4월4일 영국 화학자, 물리학자), 존 윌리암 스트랏드(John William Strutt、제3대 레일리남작(3rd Baron Rayleigh),1842년11월12일~1919년6월30일=영국 물리학자)등과 친교를 가졌다. 다시 11월에는 왕립협회에서 데비 메달(Davy Medal=왕립협회가 1877년부터 매년 화학 제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에 대하여 주는 상)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1903년12월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는 피엘과 마리 그리고 앙리 베크렐 3명에게 노벨물리학상을 수여할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앙리 베크렐 교수가 발견한 방사현상에 대한 공동연구에서 특필할 만한 공적을 세운 일>이었다. 이리하여 마리는 여성 최초의 노벨상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현재는 노벨상이라고 하면 대단히 권위가 있어서 모든 과학자가 꿈꾸는 상인데 1901년 노벨상이 시상되기 시작한 당시는 그다지 가치가 있는 상이라고 평가되지 않았던 것 같다. 노벨상 창립자인 알프레드 노벨은 그가 발명한 다이나마이트가 주로 전쟁에서 대량 사용되어서 거부가 된 인간으로 <죄를 멸하기 위하여> 노벨상을 창립한 셈이었으므로 그야말로 양식이 있는 자나 과학자들로부터는 그다지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 아닌지 모르지만(과학자는 그다지 고결하지는 않다는 생각에서) 큐리 부처가 수상식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인지도 모른다.
큐리 부처는 스톡홀름 시상식에는 출석하지 못하였으나 받은 7만 프랑의 상금은 일가의 경제 상태를 도울 뿐 아니라 금전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인, 학생들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이 노벨상 심사가 행해질 때 아카데미는 물리학상 수여에 대하여 검토하고 있었는데 선고위원회 가운데에는 신원소 발견은 화학상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의문의 소리가 있었다. 이 때문에 1903년도 수상 이유에서는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은 일부러 빼어서 장래의 수여에 포함되도록 되었다.
노벨상 수상은 두 사람을 한꺼번에 유명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큐리 부처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가지가지의 취재나 면회 의뢰, 들어오는 수많은 편지 등에 시간을 빼앗기고, 자택이나 연구소에까지 쳐들어오는 매스컴에 무엇보다도 연구할 여유를 빼앗겼다.
1904년 파리대학은 피엘을 물리학 교수직에 초빙하려고 교섭하였으나 실험실이 준비되어 있지 않음을 안 피엘은 이를 사양하려 하였다. 대학 측에서는 의회에 작용하여 연구비와 설비비를 염출해내었으므로 피엘은 이를 승낙하였다.
이해에 마리는 임신 중이기도 하여 일가는 점점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연구는 하지 못하고 대중에게 쫓기어서 가명으로 부르타뉴(Bretagne)의 시골에 피난하기도 하였다. 그런 부처는 1904년12월 6일 둘째 딸 에브(Ève Denise Curie Labouisse,1904년12월6일~2007년10월22일=프랑스 예술가, 작가) 를 낳아서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교직에 복귀하고 실험실에도 들기 시작하였다.
여전히 파티 등은 피하고 있었는데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연극을 감상하러 가기도 하고 무용가 로이 후라(Loie Fuller,1862-1928)나 조각가 오규스트 로댕(François-Auguste-René Rodin, 1840년11월12일~1917년11월17일=프랑스 조각가), 과학 관계로서는 이웃에서 사는 잔 페란(Jean Baptiste Perrin, 1870년9월30일~1942년4월17일=프랑스 물리학자) 부처, 조류주 우르방(Georges Urbain、1872년4월12일~1938년11월5일=프랑스 화학자)이나 사르르 에두아드 구이라움(Charles Edouard Guillaume、1861년2월15일~ 1938년6월13일=프랑스 물리학자)등과도 친교를 맺었다. 때때로 이들을 집에 초대하기도 하였는데 거기에는 제자들도 오고 피엘의 제자 중 폴 랑즈빈((Paul Langevin、1872년1월23일~1946년12월19일=프랑스 물리학자)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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