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이작 뉴턴(1642~1727)이야기(3/13)
==떨어지는 사과에서 힌트를 얻어 근대과학의 기초를 구축했다.==
3, 학교 교육
1) 그랜삼의 학교에서
14세 때에 그랜삼(Grantham)의 학교에 다니던 뉴턴은 모친이 돌아와서 일시 농업을 하기로 되었다. 그러나 농업에 맞지 않음을 안 모친은 다시 학교에 다니게 하여 학업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학교는 자연과학계의 과목은 거의 없었다.
그랜삼의 하숙집 주인이 약제사였기 때문에 뉴턴은 화학실험을 좋아하게 (연금술=구리나 철을 금으로 바꾸는 연구에 이어짐)되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그 때부터 손재주가 뛰어나서 하숙집의 여자 아이를 위하여 여러 가지를 만들어 주곤 하였다 한다.(일시 약혼까지 했었다고 하는 사이였다) 이 약제사의 집에서의 경험에서 뉴턴은 종생 약은 자기 스스로 지어서 썼다고 한다.
2)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뉴턴은 1661년(18세)에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Dublin)에 입학했다.
신분은 급비생(수업료 면제 대신에 대학의 잡일을 도움)이었다. 물론 보통의 학생도 있어서 이런 것이 뉴턴을 더 어둡게 하였다고 한다.
깔끔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적었던 출납부도 남아있다. 거기에 트럼프에서 돈을 잃은 일이나 친구에게서 돈을 빌린 것(이자가 적혀있다) 등도 밝혀진다. 물론 공구나 약제 등도 구입하고 있다.
대학 3년생(1663년) 무렵부터 뉴턴은 독자의 공부, 연구를 시작했다. 이미 광학에 대한 언급도 시작된다.(자신의 눈으로 위험한 인체실험도 하고 있다). 수학의 본격적인 공부도 이 무렵부터여서 이듬해에는 이미 당시의 톱 수준에 달하고 있었다.(천재였으니까)
마침 이 무렵 영국에서 페스트가 대유행하였다. 대학도 1665년 8월에 폐쇄되었다.
뉴턴의 대학을 졸업한 것은 이 해의 1월이다. 뉴턴은 1665년 6월부터 1667년 3월까지 고향에서 피난하게 되었다.(정확하게는 1666년 3월말부터 페스트가 재발하여 대학이 재 폐쇄되는 1666년 6월말까지 일시 케임브리지에 돌아갔었다.)
이 고향에 있던 1년 반이 <경이의 해>라 하는 기간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학교가 폐쇄되면 기뻐서 놀았을 것이다. 뉴턴도 대학이 폐쇄되어 좋아했겠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의 시간 곧 연구, 사색에 몰두하는 시간이 확보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유인력의 발견에 관련되는 하나의 사과나무를 보고 있을 때 사과 열매가 떨어지는 데서 인력에 대해서의 영감이 일어났다는 일화는 이 무렵이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뉴턴은 사과 열매가 떨어지는 것과 달이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같은 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은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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