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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간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도 인정한 인과율을 깰 수 있을까?

간천(澗泉) naganchun 2020. 9. 13. 12:13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도 인정한 인과율을 깰 수 있을까?

 

시간은 인간으로서 가장 가깝고 당연한 것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옛날부터 인류에게 가장 알지 못하는 하나였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이 지적생명에게 준 최대급의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다.

이 수수께끼에 도전하기 위하여 함께 사고의 여행을 떠납시다.

시간은 거꾸로 돌아올 수 있는가.처음으로 보다 자연계의 다수는 대칭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가? 고래로 물리학자들을 고민하게 한 궁극의 물음은 게임브리지대학 우주이론센터에서 호킹 박사에게 사사하고 훈도를 받은 젊은 물리학자가 이론물리학의 최신지견을 구사하여 이 난문에 도전하는 사고의 여행을 떠났다. 20세기 물리학의 혁명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시간에 대한 생각하는 방법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찾는 여행이다. 우리들의 일상의 감각으로는 거의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은 거짓말이겠지? 이런 이야기가 가득 찬 양자세계. 그것이 이번에 취급하는 아인슈타인의 인과론과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20세기 물리학의 또 하나의 혁명 <양자역학>이란

 

전에 기사에서 아인슈타인의 사고(思考)를 찾아서 그가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에로의 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하는 생각에 이르는 도정을 따라가 보았다. 거기서 <시간은 거꾸로 돌아올 수 있는가?><어째서 한 방향으로 나가는가?>라는 명제를 안은 나는 과거라는 원인이 미래라는 결과를 이룬다는 시간의 인과율에 통해버렸다. 그러나 나는 <비법/오의>가 있다는 데에 착안했다. 인과율이 우리들에게 <시간의 화살>을 쏘아서 방해하는 것은 빛이 과거로부터 미래에로의 한 방향만으로 나가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 거꾸로 미래로부터 과거에로 향하여 날아가는 빛이 있다면 인과율과도 모순되지 않고 시간이 거꾸로 돌아올 가능성이 열린다.

상대성이론에 이어서 20세기 물리학에 일어난 또 하나의 혁명 그것이 양자역학이다.

모든 물질은 점점 나누어 가면 가는 입자로 나누어진다. 입자를 <양자(量子)>라 부른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소립자(素粒子)>라 부르는 최소의 입자가 모습을 나타낸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소립자는 입자와 파도의 성질을 동시에 겸하여 갖추고 있어서 그런 성질이 <사물을 통과하고><동시에 2개의 장소에 존재할 수 있다.> 등의 현상을 동시에 일으킬 수 있다. SF 닮은 이야기이지만 어느 것이나 실제로 자연계에서 일어나고 있어서 과학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서 사물을 통과한다는 것은 장애물이 있어도 그 건너 쪽으로 돌아서 나가는 <회절(回折)>이라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벽을 통과하는 전파나 소리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양자세계의 성질<불확정성원리>란?

 

그러면 <동시에 2개의 장소에서 존재할 수 있다.>란 어떤 것인가. 실은 소립자에는 어떤 시각에 어느 위치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결정할 수 없다고 하는 불가해의 성질도 있다.

이것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립자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치가 정해지면 속도가 정해지지 않고 속도가 정해지면 위치가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물리학에서는 <불확정성관계>라 한다. 그리고 속도란 위치를 시간으로 나눈 것이라서 이것은 시간과 위치와의 불가해한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상한 시소와 같은 관계 덕분에 소립자는 동 시각에 여러 장소에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속도><운동량>이라 보면 <위치와 속도의 불확정성관계><위치와 운동량의 불확정성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가 발견하였다. 그런 때문에 이 성질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라고도 말하는데 미크로의 양자세계에서는 이러한 불확정성관계가 있다는 표라는 것이 언젠가는 알 수 있을 날이 올 것이다. 실은 이러한 흔들리는 상태는 양자컴퓨터에서는 매우 유용하다. 여기서 소립자를 주인공으로 한 미스테리를 소개한다.

1965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도모나가 싱이치로(朝永振一郎) 선생이 지은 <광자의 재판>이라는 단편소설이다.(고단샤 학술문고/ 談社術文庫거울 속의 물리학)

무슨 죄(아마도 살인)를 범한 의혹으로 체포되어 피고가 된 <나미노 미츠코(波乃光子)>가 재판에서 검사로부터 범행시각에서의 아리바이에 대하여 질문을 받는다. <그 시각에 당신이 A지점에 있었던 것은 목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B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검사가 그렇게 말한데 대하여 어쩐 일인지 미츠코는 <나는 그 시각에 ,A지점에도 있었습니다. B지점에도 있었습니다.>고 답해서 아리바이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법정에 있는 전원은 어이가 없어서 미츠코는 파도처럼 거동하여 2개의 창으로 동시에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미츠코>란 빛을 만드는 소립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 이름처럼 마치 파도로서의 성질을 발휘하여 보여준 것이다. 이 작품은 마치 서스펜스 드라마처럼 소립자의 기과한 거동이 이야기 되어서 양자역학의 입문으로서 일독을 권하고 싶다.

 

미래는 확률로밖에 나타내지 못한다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이처럼 우리들의 직관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도저히 이미지화 할 수 없다. 알았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런 것, 모르겠어.>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런 양자역학의 힘차게 나르는 본질이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확률>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모두 기술했다고 하는 뉴톤의 운동방정식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시간의 변화를 전제로 하여 방정식의 형식으로 된 것이다. 곧 어떤 시각에서의 상태를 미분방정식의 형식으로 적으면 미래의 어떤 시각에서의 상태를 결정적으로 예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결정론이라 하는 시고방식이다.

미크로 소립자의 움직임을 기술하는 양자역학에도 미분방정식에 의하여 미래를 예언할 수가 있다. 그런데 양자역학이 예언하는 것은 <반드시 일어나는 미래>가 아니고 그런 미래가 일어날 것 같은 <확률>이다. 그 미래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마치 천기예보의 강수확률처럼 60%였다가, 30%였다가 한다. 미래가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이 불확실성이 미크로의 양자세계에서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출몰하여 우리들의 직관을 흔들어 놓는다. 예를 들어서 뉴톤의 운동방정식에서의 설명처럼 공을 수평으로 굴리는 것을 생각해보면 결정론의 세계에서는 공이 어느 시각에 어느 장소에 있는지는 100% 결정된다. 그러나 양자세계에서는 공이 어느 시각에 어디에 있는지는 확률로 밖에는 예측할 수 없다.

 

양자역학에 맹렬히 반발한 아인슈타인

 

이처럼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원리라는 것이 있어서 시간과 무엇인가가 종종 불확정성관계가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가치를 취할 것인가가 어느 범위 안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만일 시간이 플러스의 값과 마이너스의 값의 사이를 흔들리고 있다고 하면 <시간의 화살>에 따라서 플러스 방향으로만 나가던 시간이 조금의 충격으로 흔들려서 거꾸로 마이너스 방향으로 나가는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시간의 화살>이 거꾸로 간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자역학의 사고방식을 도입하면 인과율이 깨질 가능성이 나온다.

처음 분으로 <비의>라고 한 것은 이 것이다. 인과율에서 이끌어내는 결정론을 믿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대두한다고 맹렬히 반발하였다. 미래가 확률로 정해진다는 생각이 아무리 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확률적인 미래란 기분 나쁘다고 한 아인슈타인의 기분은 잘 알 수 있다. 결정론에서는 심플하게 정연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은 미래는 과거에 의하여 결정되기보다 불확정한 쪽이 희망을 가질 수 있어서 구원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간도 소립자로 되어있다?

 

현재 소립자는 17종류가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 중 9종류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의 90%이상에 관여하고 있다. 꽤 종류가 있다. 이러한 <부품>이 많음이 양자역학의 들판을 넓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들 소립자에 더해서 중력 등의 힘이나 시간이나 공간 등의 그릇이라는 아이템도 별도로 필요해진다.

<간단히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하는 유료 사이트 회원 등록을 했지만 들어가 보면 <세계를 만든다.>라는 단추를 누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아이템을 손에 넣기 위하여 다시 돈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이란 살기 힘들다. 그러나 처음 듣기로는 의외이겠지만 실은 힘도 소립자로 되어 있다. 다시 시간도 어쩌면 소립자와 같은 것의 집합인지 모르나 과연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세계를 만드는 데는 소립자에 한 번 돈을 내는 것만으로 오케이라고 하겠지만 과연 어떤가.

이번 양자역학의 대두가 고대로부터의 시간에 대하여 기성 개념을 깨어버린 데 대하여 생각해보자. 다시 도()는 물리학에 있어서 최신의 토픽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후로 그런 세계에로의 입구로서 어차피 기묘한 이야기를 2가지 말하고자 한다. 양자세계에서 발해진 수수께끼 양자역학의 기괴한 성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괴담 1, 시간의 흐름은 연속적이 아니다!?

 

양자세계에서 시간과 불확정성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속도와 운동량을 들었지만 같은 모양으로 시간의 파트너로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에너지>가 있다. 양자는 서로 맺어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간을 정확히 정하려고 하면 소립자가 가진 에너지의 양이 정해지지 않고, 거꾸로 소립자의 에너지를 정하면 시간이 정확히 정해지지 않는 관계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아직 기괴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그 하나로 <에너지의 양이 띄엄띄엄 값을 취한다.>는 것이 있다. 우리들이 물의 흐름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적인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에너지란 것에 대해서도 무한히 가늘게 쪼갤 수가 있어 어떤 값이라도 취할 수 있는 연속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미크로 양자세계에는 에너지는 연속적이 아니라 잣대에 새겨진 눈금 위에 톡톡 존재하듯이 띄엄띄엄한 연속적인 값을 취한다는 것이다. 꽤 대강을 말한다면 1의 다음은 1.000000000001이 아니고 2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값은 매우 작기 때문에 우리들은 연속적이라고 착각하였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여기서 당신이 <에너지가 불연속이라는 것은 그 파트너인 시간도 띄엄띄엄이라면?>

라고 생각된다면 당신은 훌륭한 물리학자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 로베리츠는 <실은 시간도 무한히 가늘게 쪼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최소 단위 같은 것이 띄엄띄엄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 여행의 걸음을 조금 나아간 데서 새로 등장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괴담 2, 존재는 <보는 자>가 결정한다! 시간은?

 

또 하나 양자역학이라면 기괴한 성질이 있다. 어떻게 말할까. 이것이야말로 가장 이상해서 가장 난해한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대문제이다.

예를 들면 공을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굴리면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공은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굴러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미크로의 양자세계에서는 소립자를 공으로 보면 공의 상태는 누가 보는가에 따라 변화하고 마는 것이다. A지점에 정지한 채로 혹은 다른 곳에서 뽕뽕 튀어 돌고 있다는 여러 가지의 상태가 각각 확률을 가지고 동시에 존재하고 관측자가 관측하는 것으로 대상의 상태는 하나로 결정된다. 그래서 결정되고 나면 그 이외의 가능성은 한 순간사이에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곧 당신이 공을 봄으로써 세계가 바뀌고 마는 것이다.

다시 SF<병행세계(竝行世界)>(어떤 세계에서 나뉘어서 그에 병행하여 존재하는 별다른 세계를 말함) 처럼, 관측해도 여러 가지 가능성은 소멸하지 않고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생각도 났다.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사고실험(思考實驗)으로서 유명한 것이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ödinger's cat)>이다.

 

* 슈뢰딩거의 고양이 (Schrödinger's cat)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1935년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보이기 위해서 고안한 사고 실험이다. 위키백과.

 

슈뢰딩거의 고양이,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는 상자에 한 마리를 넣고 상자 안을 방사선물질인 라듐을 가득 채운다. 다시 청산가스발생 장치와 방사선 측정 장치를 넣어서 이 2 가지를 접속시킨다. 이것은 라듐이 α붕괴를 일으켜 방사선(α)을 방출하면 그것을 방사선 측정 장치가 감지하고 그것에 의하여 청산가스발생장치가 기동하여 청산가스가 나오게 한 것이다.

α붕괴가 일어나면 상자 안은 청산가스로 채워져 고양이는 확실히 죽는다. 그리고 1시간 사이에 라듐이 α붕괴를 일으키는 확률은 50%라 한다. 1시간 후에 고양이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는 각각 50%씩의 확률이라는 것이다. 이 사고 실험의 포인트는 라듐의 α붕괴는 미크로의 소립자적인 스케일의 현상이므로 α붕괴가 <일어난 상태> <일어나지 않은 상태>의 어느 한 쪽으로 정해지지 않고 절반씩의 확률로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일이다. 곧 고양이가 <살아있는 상태><죽은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인가 한 쪽으로 정해지는 것은 마침 상자를 열어서 안을 관측한 때이다. 당신의 책임은 중대하다. 그렇다 해도 잔혹한 설정으로 아이에게 양자역학에 대하여 가르칠 때에 어떤 얼굴을 하고 이 이야기를 하면 좋을는지 고민하게 된다.

슈뢰딩거는 이 사고(思考)실험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미크로의 소립자에서 아무튼 마크로의 고양이로 <살아있는 상태><죽은 상태>가 존재한다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관측에 의하여 고양이의 생사까지 결정된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미크로와 마크로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슈뢰딩거는 자신도 양자역학의 연구를 하고 있지만 이 이론에는 아직 결함이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실은 이 날카로운 지적에 대한 답은 지금도 나오지 않고 있다.

다시 현재로서는 우주의 탄생으로 이야기가 퍼지고 있다. 우주는 인플레션이라는 현상에 의하여 급격히 팽창하였지만 넓어진 우주는 완전히 균질이 아니고 양자역학의 대상이 되는 극소 스케일의 티가 있고 이 티가 우주의 구조의 <()>으로서 우주를 풍부한 것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 티가 <>으로서의 실체를 가진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누군가가 관측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 만들어진 우주에서 도대체 누가 관측했단 말인가? 여기까지 오면 과연 <()>이라는 말은 의지할 것이 못되지만 언젠가 이 초월 적인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고자 한다.*

출처=news.yahoo.co.jp articles

2020. 8. 9 <마이니치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