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불변의 시공을 비뚤은 상대성이론
그래도 깨지지 않은 것은?
상상해보아 주세요. 당신은 다방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고, 주스를 주문하고, 다 된 주스를 마셨다고 합시다. 이 일련의 행동은 시간이 거꾸로 가는 세계에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먼저 처음에 있는 것은 <맛좋았다.>라는 감각이다. 다음에는 주스가 컵에 토해 내고, 점점 컵에 담긴다. 그 다음에 당신은 주스를 주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서 밖으로 나간다.
이처럼 시간이 거꾸로 되돌아가는 세계가 있다면 어림도 없다. 혹은 SF인가, 스피리츄얼한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시간은 거꾸로 되돌아가는가.>의 머리말
자연계의 다수는 대칭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시간은 일 방향으로만 흐르는가? 고래로 물리학자들을 고민하게 한 궁극의 물음이다. 케임브리지대학 우주이론센터에서 호킹 박사에게 사사하고 훈도를 받은 젊은 물리학자가 이론물리학의 최신지견(最新知見)을 구사하여 이 난문에 도전하는 사고의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20세기 최대의 혁명의 하나인 <상대성이론>에서의 시간의 존재 방식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원인>과 <결과>의 순서에 대하여의 시고편력이다.
일정한 방향으로 놓아진 <시간의 화살>이란
자연과학에서는 시간은 어쩐 이유에서인지 물리학의 테마로서 생각해왔다. 그러나 물리학이란 그 이름대로 <물(物)=사물>의 <리(理)=이치>를 다루는 학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실체도 있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는 시간 등의 대물(代物)에 어떻게 접근해야 좋을 것인지 옛날부터 많은 물리학자가 머리를 앓게 하였다. 이윽고 붙잡을 수 없는 시간에 어떻게 해서 접근하기 위한 3개의 실마리가 생각나게 되었다. <방향> <차원수> <크기>이다. 그리고 이들 관점에서 보아갈 때에 시간에는 다른 물리적인 연구대상과는 전혀 다른 특징이 있음을 알았다.
이들 중에 <방향>에 대해서는 많은 물리학자가 <시간은 흐름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은 적당히 여기저기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흐름은 <한 방향에서 한 방향으로 나아갈 뿐으로 그 반대는 있을 수 없다.> 곧 불가역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시간의 방향에 대한 이렇게 보는 방법을 나타내는 말이 <시간의 화살>이다.
처음에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톤(Sir Arthur Stanley Eddington、1882-1944년)이 그의 저서 『The Nature of the Physical World』(물적 세계의 본질) 속에서 그 말을 사용한 것이 최초라 한다. 에딩톤은 시간은 우주가 시작해서부터 줄곧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화살 같아서 결코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 말하고 이것을 <시간의 화살>이라고 명명했다.
시간이 일방통행이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인가.
그런 말은 쓰지 않아도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나아간다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생각했었다.
예를 들어서 조용한 연못에 돌멩이를 던졌을 때를 상상해보면 파문이 주위로 퍼져가는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것이 흐르고 있는 것을 느끼게 하는 광경이다. 이 파문은 바깥쪽으로만 퍼져나갈 뿐 무엇인가를 만나서 반사라도 하지 않는 한 결코 안으로 향하는 일은 없다. 거기서 사람은 시간의 흐름의 불가역성을 보게 되었다. 이 예는 파도에서의 <시간의 화살>이라고 불리고 있다.
근년의 연구에서 우주는 <빅뱅(Big Bang)>이라고 하는 고에너지 상태에서 시작한 다음 현재에 이르러도 오히려 팽창을 계속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수축하는 일 없이 팽창하는 방향으로만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돌멩이가 만드는 파문의 예와 비슷해서 <시간의 화살>을 이미지화 시킨다. 어쩌다가 시간의 불가역성은 우주가 된 때부터 근원적인 레벨로 결정되었었는지 모른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주 규모로 생각하는 <시간의 화살>을 우주에 있어서의 <시간의 화살>이라 부른다.
일상에 넘치는 <시간의 화살>을 나타내는 증거
이것들은 물리적 현상인데 달리도 시간이 흐르는 방향이 불가역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예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초목이 눈을 틔우고 줄기가 뻗으며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고 이윽고 마르는 모습은 우리들의 태어나서 죽음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싫지만 생각해 알려준다.
거꾸로 향해가는 시간의 흐름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시간의 화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들 인류를 비롯하여 어느 정도 지성을 가진 생물은 뇌에 장기적 기억장치를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에 <저것>을 했으니까 현재 <좋은 일이 있었다.>(먹이를 찾았다. 좋은 이성과 맺어졌다. 라는 등) 그러면 미래에 다시 <저것>을 하자고 일련의 강물 의 흐름 같은 기억을 가질 수가 있다. 이것을 <학습>이라고 하지만 생물은 이렇게 하여 환경에도 적응하고 진화해왔다.
이것이 혹시 미래에 이러난 일이 앞에 있거나 그 다음에 현재나 과거로 시간이 흐른다고 하면 우리들은 어떤 행동을 취하면 좋을는지 몰라서 패닉상태에 빠질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인지학에서의 <시간의 화살>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이러한 여러 가지 예를 보아도 시간의 흐름은 확실히 불가역으로 <시간의 화살>이라는 말은 시간의 본질적인 성질을 나타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빛을 절대적 지위에 붙이니 시간이 느려졌다.
일찍이 20세기 초까지의 물리학에서는 시공은 절대불변으로 다른 모든 것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기준이라고도 생각했었는데 1950년에 발표된 이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여 우리가 사는 세계 그 자체인 공간이나 시간 곧 <시공>은 누글누글하게 변동하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당시는 빛이 나가는 속도는 상황에 따라 변한다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면 전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라이트를 가지고 있는 경우와 멈추어 있는 사람이 라이트를 가지고 있는 경우를 비교하면 전차에 타 있는 사람의 라이트에서 나오는 빛의 속도는 전차의 속도 +빛의 속도이므로 멈추어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라이트의 빛보다 빠를 것이라고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믿어졌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를 절대적인 지위에 격상할 것을 생각했다. 빛의 속도는 어떤 상황에도 불변이고 게다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 가운데 최대속도라는 것을 증명하기 이전에 <원리>로 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착상은 바르고 <광속도불변의 원리>가 확립되어 거기서부터 특수상대성이론을 끌어내었다. 물체가 우리들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운동을 하고 있다면 뉴톤까지의 물리학이라도 사실상 문제가 없는 것이지만 물체가 광속, 곧 초속 30만Km에 가깝다는 특수한 운동을 하고 있을 때 예를 들면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는 로켓에 타서 바깥을 보면 물체의 크기가 줄어들어 보인다. 그래서 지상의 사람보다도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것이 일어난다. 공간도 시간도 특수한 운동에 의하여 사이즈가 바뀌기 때문이다.
미국의 희극 <플래시(The Flash)>라는 초고속으로 다릴 수 있는 정의의 영웅이 있는데 시간이 어느 만큼 느려지는가를 계산하면 플래시에서의 시간경과는 우리들의 시간경과의 6할밖에 없고 그만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래시의 손목시계는 표준 시간보다도 진행이 느리므로 악한 일이 행해지는 장소에 달려가는 것이 느려지지 않은가 하는 걱정이 있으나 어느 정도 느리게 흐르는지를 알면 손목시계의 보정량(補正量)도 알 수 있다.
* 《플래시(The Flash)》는 2014년부터 미국 CW 방영중인 드라마이다. 그레그 벌란티, 앤드루 크라이즈버그, 제프 존스가 제작하고 있으며, DC 코믹스의 슈퍼히어로 캐릭터 시리즈 《플래시》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위키백과
절대불변이었던 시공이 누글누글해졌다.
다시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중력이란 시공의 삐뚤어짐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극히 대강을 말하면 트램폴린 네트(trampoline Net) 같은 시공에 공을 놓으면 그 무게로 네트가 눌러진다는 이미지이다. <물건이 떨어진다.>란 그 오묵해진 자리에 굴러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우주에는 극단으로 강한 중력에 의하여 시공의 네트가 궁극에까지 오므라든 장소가 있다는 것을 예언하였다. 그것이 블랙홀이다. 1915년 지금부터 100년이나 전의 일이다.
미래를 정하는 것은 인과율?
이리하여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빛>이, 그리고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이 절대불변일 것이라는 시간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비뚤어지게 하거나 한다는 것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실은 상대성이론 이야기는 이제부터 중요해진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낳은 다음 상대화한 시간에서의 <원인>과 <결과>라는 법칙에 대하여 밝혀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때,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우리들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헤어진 것이다.>
전 세계에서 얼마만큼의 연인들이 과거에 이런 회하를 나누었을까? 모든 결과에는 그것이 일어나게 한 원인이 존재한다고 우리들은 생각한다. 그래 이 세상은 모두 원인과 결과에 지배되고 있다. 그리고 물리학에서도 <인과율> 이라는 법칙이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고, 그 거꾸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인과율의 생각하는 방법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결과는 우주가 탄생한 최초에 결정된 것이라는 <결정론>이라고 말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간다. 그것은 그것으로 장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라서 재미있지만 역시 무리가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은 우연을 싫어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법칙을 <신>이라고 하여 숭배하고 있는 듯하니 인과율이 미래의 어디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 범위를 확실히 정하고 있었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때문에 사색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곧 그 천재는 어떤 원인이 결과에 어디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하는 것을 빛이라는 절대자의 입장으로 한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원인과 결과, 과거와 미래를 잇는 <광원추(光圓錐)>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원인이 있어서 그것이 다음의 일들에 전해지기까지에는 힘이라든지 정보가 어떤 방법으로의 전달수단이 불가결하다. 그러면 가장 그것을 잘 전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우주를 최대속도로 나가는 빛이다. 비록 진공이라고 해도 빛이라면 전해진다.
그러면 빛이 나갈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어떤 원인이 어떤 결과를 낳는 인과율이 성립한다. 이 빛이 나갈 수 있는 범위를 <광원추>(라이트콘)라고 한다. 모든 일어나는 일은 이 광원추의 가운데를 벗어날 수가 없고 과거에서 미래에로 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아인슈타인은 생각한 것이다.
광원추이다. 여기에 그려져 있는 역삼각형과 삼각형의 정점을 잇는 선 안에서만 원인과 결과는 관계하지 않는다고 하자. 이 선은 빛의 속도가 닿는 한계범위이고 그 내부는 속도가 광속도 이하의 예를 들면 소리(음) 등의 전달정보를 모두 포함한다. 이 한 가운데의 정점부분이 지금 우리들이 마치 존재하는 현재라는 것이다.
거기는 모든 것이 과거와 이어진 것은 아니고 그 아래의 삼각형의 영역과 이어진 정보만 현재와 관계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광속의 범위에 가두어서 너무나 확실히 정하고 말았다. 되풀이하지만 인과율이란 원인과 결과가 순서마저 관계한다는 법칙이다.
그것은 곧 과거와 미래의 순서는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과거로부터 미래에로의 방향으로 나가고 거꾸로 되돌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말한다면 승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예를 들면 SF를 좋아하는 사이에서 상대성이론에 대하여 말할 때에 자주 등장하는 타임마신도 가령 만들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인과율이 있기 때문에 미래로밖에 가지 못한다. 과거로 돌아와서 원인에 무엇인가 변경을 가하면 현재의 결과와 잘 맞지 않고 인과율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답답하다. 인과율! 불루박스 『시간은 거꾸로 돌아가는가』라는 책에서 나는 <시간을 거꾸로 나가는 세계는 있는가>라는 명제의 장대한 시간탐구의 여행에 나섰다. 그러나 이 사고의 여행의 시작에서 일찍이도 물리학의 거인에 통하지 못하는 사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체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인과율이 우리들에게 <시간의 화살>을 쏘아대서 방해하는 것은 빛이 과거로부터 미래에로의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거꾸로 미래에서부터 과거로 향해서 날아가는 빛이 있다면 인과율과도 모순되지 않고 시간이 거꾸로 되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런 것은 단지 형편이 좋을 대로 하는 말이 아닌가 하고 꾸짖겠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상대성이론에 이어서 20세기의 물리학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혁명인 양자역학에서 시간은 어떻게 생각되고 있는지 다음 회에는 여기를 여행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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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불르박스의 <시간은 거꾸로 되돌아오는가?>에서 작성했다. 시간의 불가사의와 되돌아옴의 수수께끼를 둘러보는 여행 다음 회는 8월 6일 예정이다.
시간은 거꾸로 되돌아오는지 우주에서부터 양자까지 가능성의 모든 것 <시간을 되돌리자>는 참으로 가능할는지 모른다.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해왔던 시간은 근년 역전하는 현상이 관측되어 어쩌다 <시간이 사라지는 모델>까지 제창되고 있다. 케임브리지대학 이론우주론센터에서 만년의 호킹에게 사사한 <최후의 제자>가 말하는 새로운 시간상이다. 읽으면 시간이 되돌아올 것 같은 생각이 난다.
출처=gendai ismedia. jp>articles
필자=다카미스 유이치(高水裕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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