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화 촉한의 암운(2)
3, 이릉(夷陵)의 싸움
이릉(吏陵)의 싸움의 참 목적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여러 가지의 설이 있다.
소설 연의에서는 <인덕자인 유비가 순수하게 의제인 관우(關羽)의 원수를 갚고 싶다.>는 드라마틱한 것이지만 유비는 정치가이므로 그 밖의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라고 해도 형주(荊州)의 정치적 중요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천하 삼분지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하여 상기하기 바란다. 형주의 영유는 공명의 천하 통일 계획으로는 필요불가결한 전제이다. 익주(益州)만을 다스리는 황제란 <총인구 90만의 매우 적은 분지의 구슬>일 뿐이다. 유비로서는 어떻든 형주를 도로 찾고 싶었을 것이다.
또 유비 기치하의 정예군은 원래 형주 출신으로 구성되었었으니 그들을 위하여 고향을 도로 찾는 것은 군의 규율을 유지하는 데에도 필요했다.
또 유비 휘하의 정예부대는 원래 형주(荊州) 출신자로 구성되었으니 그들을 위하여 고향을 도로 찾는 것은 군의 규율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위(魏)라는 강적을 북방에 안고 있는 상태로 정복의 여정을 출발하였다. 촉한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한조부흥) 앞에서는 위(魏)와의 휴전은 허용할 수 없으므로 이 약소국가는 이 정면 작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때문에 조운(趙雲), 마초(馬超), 위연(魏延) 등 용장은 위의 침공에 대비하여 국내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유비가 한 팔로 의지하던 모신(謀臣) 법정(法正)과 부장 황충(黃忠)은 2년 전에 병몰하였다. 다시 출진 직전에 또 다른 한 사람의 의제인 장비(張飛)도 부하의 손에 암살되었다. 유비 황제는 쇠해가는 이선급 장병으로 오(吳) 나라에 도전한 것이다. 물론 공명은 성도(成都)에서 보급 병참에 전념하였다.
상대하는 오(吳)는 공명의 실형인 제갈근(諸葛瑾)을 사자로 파견하여 유비(劉備)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하지만 이것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유연한 외교 전략으로 대하였다.
곧 손권(孫權)은 위(魏)의 조비(曹丕)에게 사자를 보내어 <항복한다.>고 말한다.
당시 위(魏)와 오(吳) 사이는 험악해서 위가 촉한(蜀漢)에 호응하여 오나라를 공격할 기능성은 매우 컸다. 그러나 겁에 질린 형상의 조비(曹丕)는 반신반의로 <그러면 공물을 바쳐라. 또 아들을 인질로 내놓아라.>하고 의외의 요구를 하였다. 손권(孫權)은 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주군의 비굴함을 본 손오(孫吳)의 중신들은 이가 갈리도록 억울했으나 손권(孫權)은 <자 잘 보고 있거라.>하고 만좌를 누그러뜨렸다.
이리하여 위나라는 촉한에 호응하여 오나라를 공격할 명분을 잃어버렸다. 보기 좋게 북방의 위협을 봉쇄한 손권은 육손(陸遜)(여몽(呂蒙)의 후임)이 이끄는 5만의 주력을 유비군을 공격하는 데 충당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유비로서는 예상외의 일이었을 것이다.
유비가 이끄는 이선급의 4만 명은 그런대로 건투하였다. 이릉(吏陵) 전면에서 노려보던 오(吳) 나라와 촉(蜀) 나라 양군은 7개월에 걸친 장기 지구전에 돌입하였다.
유비는 험한 산악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농성하고 있는 육손(陸遜)을 아무리 해도 공략할 수가 없었다.
상대하는 육손은 수적으로는 우세하였으니 유비의 훌륭한 포진과 촉한군의 왕성한 사기 앞에 공격할 방법을 구할 수가 없었다. 유비는 이렇게 보면 우수한 군략가였는지 모른다. 장기전이 된다면 불리한 것은 실은 오나라 측이었다. 왜냐하면 손권은 조비에게 적자 손등(孫登)을 인질로 내기로 약속하였는데 이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이 병중이라서.>라든지 <준비에 시간이 걸린다.>고 핑계를 하였다. 이에 불신을 느낀 조비는 비밀리에 오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유비는 아마도 이런 정세를 기대하여 무의미라 할 만한 장기지구전을 굳이 계속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이윽고 손권이 타협의 뜻을 표명하고 적어도 형주(荊州)의 서 반쪽을 반환해줄 것으로 꿈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의욕을 내린 것은 유비이다. 한여름이 되자 이릉(吏陵)의 촉나라 병사의 사기는 이완되고 경계를 게으르게 되었다. 육손(陸遜)은 거기에 화공을 감행한 것이다. 이 지방에서는 여름이 되면 나무들이 건조하므로 삽시간에 맹렬한 불속에 싸인 촉군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괴멸하고 말았다.
유비는 많은 부하를 잃어가면서 몸 하나만 도주하여 백제성(白帝城)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여기서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것은 한제국(漢帝國) 재흥의 꿈을 때려 부순 철퇴였다.
4, 제갈공명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촉한(蜀漢)의 운명이 시들어가는 것을 보아왔는데 그 사이 우리들은 공명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정사나 연의에서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손가락을 물고 바라보고 있었다.> 라는 것이다.
먼저 정사에서는 공명의 하는 일은 <관리본부장>이다. 그는 유비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내정이나 보급 일에 특화하고 있었는데 외교나 군사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런 일은 유비나 법정(法政)이나 관우(關羽)가 해야 할 일이라고 잘라내고 무관심이었다. 그러므로 관우의 파멸을 방관하고 유비의 오나라 원정의 발의를 듣고서도 전혀 무관심이었던 것 같다. 전략적 판단을 요하는 사항은 모두 유비에게 맡긴 것이었다.
이 시기에 공명의 발언으로 오직 정사에 적혀있는 것은 이릉의 싸움의 전말을 들어서 알았을 때 한탄한 한 마디이다. <아아, 법정(法政) 마저 살아 있었다면 폐하에게 이런 무리한 원정은 시키지 않았을 것이고 혹시 원정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참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은 매우 의미가 깊다. 첫째로 공명은 본심으로는 오나라 원정에 반대였다는 것. 둘째로 자신보다 법정의 더 유능하다고 생각했다는 것, 셋째로 유비는 공명보다도 법정의 말을 잘 들었다는 것.
공명은 천재군사(天才軍師)라고 하는 선입견에 잡힌다면 이 구절은 <무책임>으로도 들린다. 그러나 사실 공명의 하는 일은 <관리>였으니까 이 구절은 <무책임>은 아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공명의 육성이라고 할까 무념함이 느껴지는 구절이다.
다음 <연의>에서는 공명의 하는 일은 <초절적(超絶的) 수퍼 천재 군사>이다. 마법도 쓰고 예지능력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관우(關羽)의 패사에서 유비(劉備)의 참패에 이르기까지 방관자로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취한 행동은 <무책임한 평론가>라 해도 좋은 것이었다.
<정사>의 공명이 인간적으로 호감을 가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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