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유비의 맹반격
1. 익주(益州)에서의 공명
성도(成都)에 들어간 공명은 여기서도 관리본부장으로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인재등용, 재정재건에 적극적으로 착수한 것은 물론이다. 그는 촉과(蜀科)라 일컫는 법률 제정에 진력하였다.
그런 공명은 <법가사상>으로 이 신 영토를 경영하려고 한 것이다.
중국의 정치사를 보면 그 통치철학이 항상 <유(儒)>와 <법(法)> 두 가지 색을 띄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강을 설명한다면 <유>의 통치는 국가가 민중의 도덕력을 강화함으로써 사회를 다스리려고 하는 생각이라고 하면 <법>의 통치는 국가가 법률의 강제력으로 민중을 지배 하려고 하는 생각이다.
공명이전의 역사를 보면 진(秦) 시황제는 맹렬한 <법가주의자>였는데 그 방법이 너무 가혹했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는 문란했다. 그리고 한(漢)나라 고조(劉邦)는 진나라를 반면교사로 하여 오히려 <유가>를 중시한 덕치주의 사회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400년이 지나자 <유>의 이상은 모양뿐이고 부패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면 후한제국의 인재등용을 보면 이 나라는 <도덕>의 힘을 기준으로 하여 인재를 발탁하기로 되어있으나 인물의 도덕의 정도에 대해서는 시험 등의 객관적 측정기준이 없는 것이므로 그 실태는 부자의 자식이나 용자가 단정한 자가 도덕성을 지닌 자라고 간주되어 출세하게 되는 것이었다.
<정사(正史)>를 읽고 있노라면 후한제국 말기의 인재가 명문호족의 자제이거나 장신의 미남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원소(袁紹) 나 유표(劉表)도 명문 출신에다가 훌륭한 체격을 가진 자였다. 반대로 조조(曹操)가 처음에 낙양의 문지기 일 밖에 하지 못한 이유는 빈한한 가문이고 몸집이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리사욕으로 민중을 지배하는 타락한 국가로 전락한 것이다. 이처럼 부패한 세력이 민중을 학대한 결과 <황건적의 난>을 비롯하여 지옥 같은 전란이 계속되고 국가는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조조가 많은 정적을 타도하고 난세의 최대 세력을 구축한 것은 물론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난 점도 있지만 그가 일찍이 <한제국의 구조 개혁>을 주장하여 <법치주의>에 바탕을 두고 부패를 일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의심을 잃지 않은 명사들 순욱(筍彧)이나 순유(筍攸)를 비롯한 많은 인재와 민중이 그의 사상을 따랐기 때문이다.
조조는 완전한 <능력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여러 가지의 법령을 제정하여 민생의 향상을 꾀하였다.
이런 훌륭한 조조 앞에 유비가 연전연패를 거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비는 공명을 만나기 전에는 용병대장으로서의 주체의식밖에 없어서 눈앞의 전투에만 골몰하였다.
그런데 익주에 들어간 공명은 조조처럼 <법가>의 사상으로 사회를 다스리려고 하였다. 난숙한 유가 사상을 재구성하고 법의 힘으로 구조개혁을 행하려 하였다.
촉한(蜀漢)이 조조(曹操) 의 위(魏) 나라를 위협할 정도의 대 세력으로 성장한 것은 공명의 활약의 결과물이었다.
<정사>에는 법가로서의 공명의 포부가 실려있다.
어느 날 문신인 법정(法正 )이 말 하였다. <공명, 당신이 기초한 법안은 너무 엄한 것이 아닙니까? 일찍이 한고조(劉邦)는 <법삼장(法三章)>이라는 느슨한 통치로 민심을 얻었습니다. 우리들도 그것을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공명은 이에 답하여 <당신의 의론은 하나를 알고 둘은 모르고 있습니다. 고조 때에는 민중이 진(秦)나라의 엄한 악법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법삼장>이 유효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익주(益州)는 유가의 타락한 정치로 민중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니까 엄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 민중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법정(法正)은 원래 유장(劉璋)의 부하였는데 중용되지 않으므로 그에서 이탈하여 유비에게로 온 인물이다. 그는 군사참모로서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격에 문제가 있어서 권세를 악용하여 과거에 자신을 미워한 자들을 사적으로 살해하였던 것이다.
법정의 사사로운 벌은 사회 문제가 되었으나 공명은 어쩔 수도 없어서 이를 말하는 인사들에게 이렇게 말하여 달래었다.
<우리들이 북쪽의 조조, 동쪽의 손권, 안의 손부인에게서 벗어나 성공한 것은 모두 효직(孝直=법정)의 덕이다. 이 공로를 생각한다면 조금은 참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은 공명이라는 인물의 본질을 잘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천하삼분의 계의 제일단계를 완성했다는 기쁨보다 오히려 <위험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하고 있다. 공명은 위험의 경감에 묘하게 신경을 쓰는 인물이었다. 관리본부장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 자질이라 할 수 있다.
2. 삼 영웅의 대치
공명은 이리하여 내정 사업에 더해서 보다 중요한 책무를 담당하였다. <보급병참>이다.
군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 해도 보급병참이다. 어떤 강한 군대가 있어도 식량이나 의약품, 창검이나 화살을 적당히 보급하지 못한다면 전장에서 패할 것은 뻔한 일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민완한 관리자가 보급병참을 원활하게 운영한다면 군대는 그가 가진 힘을 충분히 발휘하여 승리할 수가 있다.
유비 진영은 원래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운(趙雲) 등 장군을 가진 정예군이었다. 이런 군대가 어째서 패하였는가 하면 보급병참의 인재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때문이다.
유능한 공명은 보급병참을 장악하여 주군인 유비의 군사 활동을 완벽하게 지원한 것이다.
물론 그런 공명의 재능을 파악하고 신뢰를 보낸 유비는 역시 주군으로서 비범한 그릇이었다.
익주 평정 후 유비가 처음으로 대결한 상대는 의외로 손권(孫權)이었다. 북방으로부터의 조조의 원정군을 간신히 격퇴시킨 손권은 그런 사이에 서방의 익주를 잃은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손권은 유비에게 사자를 보내어 <대여했던 형주(荊州)를 반환하라.>고 말하였다.
유비는 남부에서 주유(周瑜)를 축출하고 이 땅을 얻은 때에 손권으로부터 <새로운 영토를 얻기까지 빌린다.> 하는 명목으로 빌린 셈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손권이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유비는 새로운 영토를 얻었으므로 손권의 반환 요구는 정당한 것이다. 그런데 유비는 손권의 사자를 내쫓은 것이었다. <이제부터 양주(凉州=섬서성)를 침공할 예정이니 그 때까지 기다려 달라.> 는 것이었다.
이런 불성실한 회답을 받은 손권은 분노하여 마침내 5만의 대군을 이끌고 형주(荊州)를 공약하였다. 유비도 5만의 대군을 이끌고 장강을 내려가서 형주에서 손권의 군대와 마주 겨누었다. 공명은 성도(成都)에서 보급병참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그 정세를 바라다본 조조는 바로 군을 출동시켜 한중(漢中)(사천성북부)에 할거하는 신흥 종교단체 오두미도(五斗米道)를 공격하였다. 교조인 장로(張魯)는 곧 항복하고 조조는 유비 공약의 교두보를 확립한 것이다. 그는 유비가 형주(荊州)에서 한가히 있는 동안에 익주(益州)를 빼앗으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는 하지 못하였다. 조조의 위협을 눈치를 챈 유비가 형주 남부의 4군(호남성)를 동서로 분할함으로써 손권과 화해를 성립시키고 익주에 돌아온 것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빠르게 화해가 성립되었는가 하면 유비와 손권은 서로 전장에서 노려보기는 하였어도 결전을 벌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조조에 비하면 약세였던 그들은 조조가 어부지리를 취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대체하면서도 서로가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크게 활약한 자가 천하삼분계의 주도자였던 유비파의 노숙(魯肅)이었다.
익주에 돌아온 유비는 동요하는 민심을 달래고서 장비(張飛)의 군을 출동시켜 사천(四川)에 침입해온 조조(曹操) 군의 장합(張郃) 장군을 맞아 이를 패주시켰다. 한편 오(吳)로 돌아간 손권은 북방에 대군을 출동시켜 조조의 합비성(合肥城)을 공격하였는데 조조의 장료(張遼)장군에 패하였다. 신 정세에 동요한 조조는 한중에 수비대를 남기고 본거지로 귀환하고 말았다.
3. 한중(漢中)의 싸움
유비는 조조의 한중수비대가 의외로 약체라는 이야기를 듣고 법정(法正)의 조언을 바탕으로 반격을 개시하였다. 유비 스스로 5만의 군사를 이끌고 한중에 돌입하여 그 서방에 위치하는 성도(成都)에 장비(張飛)와 마초(馬超)의 군대를 보냈다. 전군의 보급병참은 성도를 지키는 공명이 맡았다.
한중을 수비하는 하후연(夏候淵)은 유비의 맹공에 견디며 조조의 원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원군은 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조의 위나라 내부에 반란이 속발했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과격한 구조개혁을 하고 있었으므로 유교(儒敎)의 문란한 통치로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자들은 이 폭군(민중에게는 명군이지만)을 미워하였다. 또 유학의 교조주의자들로서도 유교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듯 조조의 정치 자세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조조가 종종 반대세력에 탄압을 가하고 처형한 것은 그들의 저항이 그로서는 커다란 장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비는 이런 저항세력의 희망의 별이었다. 이 시기에 조조에 반란을 일으킨 저항세력은 종종 유비나 관우(關羽)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었다.
유비는 이 무렵부터 <한 왕실의 자손>이노라고 하면서 <한 왕조의 부흥>을 기치로 삼았다. 조조의 고통을 당하고 있던 저항세력은 유비가 조조를 타도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조조는 이런 혼란에 대처하기 위하여 한중에 지원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공명의 탁월한 병참기술로써 10만 대군을 품을 수 있었던 유비는 마침내 조조의 한중수비대를 압도한다. 정군산(定軍山) 결전은 위의 서정장군(西征將軍) 하후연(夏候淵)을 전사시키고 남정시(南鄭市)를 중심으로 한 한중추요부(漢中樞要部)는 유비의 손 안에 들었다.
창업 공신을 잃은 조조는 격노하여 설욕을 맹세하였다. 마침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성공한 그는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한중탈환 정복에 나섰다.
상대하는 유비는 법정의 헌책에 따라 지구전으로 대항하였다. 이미 한중 요부를 점거한 유비군 10만은 산악지대에 엄중한 요새진지를 구축하고 맞을 태세이다. 조조군 20만은 수적으로는 유비군을 압도하지만 촉(蜀)의 잔도(棧道)를 답파하여 피곤한 위에 장기전으로 들어감에 보급이 부족하였다.
유비는 산 위에서 조조를 내려다보면서 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맹덕(孟德=조조의 별칭)이여. 지금의 나는 절대로 쓰러뜨릴 수 없소. 나는 반드시 한천(漢川)을 차지해 보이겠소.”
조조는 일찍이는 약소했던 용병대장이 어느 새 강대해졌음에 크게 놀랐다. 그는 유비에게는 법정이라는 참모가 붙어있다고 들었다.
“저 현덕이 이런 전법을 짜낼 수는 없다. 누구한테서 배운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진중의 신하로서 법정의 우수성은 두드러졌다. 또 전장의 황충(黃忠)이나 조운(趙雲)의 활약도 훌륭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활약은 10만 대군에게 지체 없이 보급을 계속한 공명이 있어서일 것이다. 물론 가장 훌륭한 것은 이런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한 총대장 유비인 셈이다.
대진 수개월 후 조조의 대군은 손해와 피곤이 겹쳐져서 전투 불능이 되고 마침내 한중을 체념하고 전면 퇴각하였다. 조조는 <계륵(鷄肋)이다.>고 말하며 아쉬워하였다. 요컨대 한중은 계륵처럼 국물거리밖에 되지 않으니 아쉽지 않다고 한 셈이다.
유비는 이리하여 한중의 전투에서 완전 승리하였다. 이것은 그의 정치생명으로서는 최대의 쾌거였다. 그리고 이 한중의 중요성은 <계륵(鷄肋)>이라고 형용할 만큼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400년 전 한제국(漢帝國) 창업의 영걸 고조황제 유방(劉邦)이 최초로 봉해진 유서 깊은 곳이다. 일찍이 유방은 약소한 입장이지만 이 지역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정적인 항우(項羽)에게 도전하고 최후에는 이 강적을 이긴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 중원의 빈 조조 세력은 유비가 유방이 재래라 하여 조조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믿고 조조의 국내 저항세력의 진동은 점점 거세졌다.
다짐하듯이 유비는 <한중왕(漢中王)>이라 칭하였다. 그는 “나야말로 고조 유방의 재래이다.>고 만천하에 선언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형주(荊州)를 수비하던 관우(關羽)도 군을 움직여 북으로 진공했다. 이 무렵 공명은 성도(成都)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보급병참이라는 수단을 교묘히 써서 조조를 격파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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